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정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 참된 본질의 회복의 길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는 제국주의와 함께 전파된 영국의 기독교가 선교지에서 어떠한 반응을 낳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원주민 문화에 관한 이해가 없이 유럽 문화의 절대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제국주의적 선교는 바누아투의 타나 섬에서처럼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선교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병행되어 힘에 의한 강압이 이루어질 때에는 오히려 원주민의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문화 코드에 둔감한 영국의 기독교는 타 문화권 선교에만 실패한 것이 아님을 이 방영물은 잘 보여주었다. 영국의 기독교는 영국 내에서 다음 세대를 선교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기독교가 한 시대의 문화에 적응한 후 그 시대의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게 되면 전통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는 기독교를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며 거부하게 되어 있다. 이 방영물은 미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현대 문화 코드에 잘 적응한 측면이 있음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 역시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여 화석화된다면 타문화권에서는 물론 미국의 다음 세대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 방영물은 기독교가 왕성한 미국 사회에 범죄율이 매우 높은 것은 양극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진단한다. 미국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미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즉 미국 사회는 아직 기독교적인 사회는 아니다. 한편 유럽의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이 감소하고 있지만 유럽 사회는 그 동안 성경에 담긴 약자 보호의 정신을 꾸준히 체화하여 왔다. 그리하여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고 범죄율도 낮다.


한국 기독교의 문화 적응은 미국의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영국처럼 전통 문화와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현대 문화에 완전히 개방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적으로 감소하겠지만 영국처럼 급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한국 기독교가 계속 성장하려면 과거 교회 전통의 틀을 과감하게 개혁하여야 한다. 교회 문화와 복음을 혼동하지 말고 복음은 유지하되 전통 교회 문화는 얼마든지 개혁하고 새로운 문화 코드에 개방되어야 한다. 개혁과 개방은 한국 기독교가 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이 한국 사회를 참으로 발전시키려면 한국에서 성장하는 기독교가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성경적 기독교여야 한다. 미국식 기독교는 자본주의처럼 경쟁과 성장에 익숙한 기독교이지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기독교가 아니다. 유럽식 기독교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는 정신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정신을 한국에서 실천할 만한 영향력을 가질 만큼 성장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면서도 성장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에 한국 기독교에 주어진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 그런데 양극화 현상의 해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성서에 담긴 핵심 메시지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난한 자들, 자유가 없는 자들, 힘이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자들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이 제7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탕감하는 빚탕감법, 6년 동안 종을 부린 후에는 풀어주는 노예해방법, 대토지소유를 금지하는 토지법 등이다. 이러한 법의 정신이 체화되는 사회 속에는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이러한 법의 정신을 더 철저화한다. 예수께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신다(마가복음 10:21).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11:4)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이 기획물 제 4 부 “길 위의 인간”은 자신이 선 교리적 입장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이와 다른 입장을 모두 부정하는 근본주의적인 사고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나 모두 이러한 근본주의자들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선의 자리로 여기고 적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악의 자리로 여기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이 되는 약점을 보이는데, 미국의 경우 근본주의자들은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지적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따른다는 근본주의자들이 어떻게 성경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본문의 문맥이나 본문의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세상을 선한 편과 악한 편으로 단순하게 나누고 자기가 속한 편을 무조건 선한 편이라고 여기는 미성숙한 세계관과 만나 기독교를 천박하게 타락시킨다.


이 방영물의 제4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사탄, 종말, 천국의 개념이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며 세 종교를 모두 상대화한다. 화해와 소통을 위해 방해가 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이 모든 종교들에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상대주의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각 종교들을 피상적으로 비교하여 발견된 유사성을 토대로 이 종교들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고유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근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를 권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자주의적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 본문을 독자가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없음과 같다.


근본주의를 극복하려면 각 종교인들이 각자의 종교의 본래적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종교를 문자주의적으로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고 그 문화를 정통 교리인 것처럼 고집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는 성서에 담긴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예수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거듭나지 않고 성서의 정신과 관계없이 성장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무관하며 성서와도 관계없다. 본질의 회복은 개혁과 개방보다 먼저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본질이 회복되지 않은 기독교는 성장할 필요가 없으나, 본질이 회복된 예수교는 그 생명력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할 것이다.


미국 못지않게 양극화된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세력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러한 선택은 단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선택이며 선교적 선택이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권력과 재물을 택하는 잘못을 범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젊은 세대를 선교하지 못할 것이며 유럽의 기독교처럼 쇠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편에 서지 말고 권력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기독교가 권력과 재물의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하나님의 길과 병행하려고 하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길 위에서 근본주의라는 가면이 우상숭배적 상대주의라는 실상과 만나는 모습이 진리를 믿지 않는 거짓 종교인들의 정체이다.


근본주의를 하려면 정치적 의도 없는 순수한 근본주의를 취해야 하며, 상대주의를 하려면 종교의 탈을 벗어버려야 한다. 대개의 신앙인들은 대개 근본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은 다른 모양의 폭력이다. 참으로 비판받아야 할 자들은 양처럼 순수한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이용하는 이리떼들이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탈을 쓴 상대주의자들로서 자기들도 믿거나 따르지 않는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며 권력과 재물을 취하며 명예마저도 누리고자 한다.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항상 적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화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본인들이다.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 못지않게 화해와 소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경전을 모독하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독한다. 또한 예수의 역사성과 신성을 부정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폄훼하는 데 지극히 열심이다. 이들은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왜곡하는 일본인들 못지않게 이웃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남이 믿는 신앙을 짓밟으려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종교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정으로 의심하려면 자신들의 불신앙의 절대성마저도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영물은 방송 초기(제 1 부)에 반기독교적 성향을 보인다. 이것은 방송의 흥행을 위해 반기독교적 탈을 쓴 것이므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근본주의의 탈을 쓴 정치적 근본주의와 유사한 모습이다. 또한, 특정 종교의 신앙의 폄훼하는 것은 종교들 간의 화해와 소통을 위한 이 기획물의 목적에 맞지 않으므로 이 기획물은 자기모순을 범한 셈이다. 결국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하여서라도 흥행하려는 “인간의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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