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나는 슬프지 않은데, 왜 탄원의 노래들을 불러야 하나?



[일러두기]

1. 성경본문은 개정개역판을 사용하였다.

2. 원문의 누가복음 6장 12절은 잘못된 인용이라 마태복음 5장 4절로 바로 잡았다.

3. 번역은 직역을 토대로 했으며 필요에 따라 본문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변화를 주었다.


선천적으로 나는 쾌활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플 때 나를 괴롭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 내게 머무는 게 무척 괴롭기 때문에, 나는 내 감정에 대해 대화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한 동료가 실제로 나를 “병적으로 낙관적”이라고 묘사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이 칭찬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탄원시들을 읽고 성경 내 해당 본문과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슬픔을 느꼈을 때 나의 처음의 불편함을 상상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유익하다(딤후 3:16)고 믿으며, 예수 자신도 탄원시들을 인용했음(예를 들어, 마 27:46과 막 15:34에서 시편 22:1)을 염두에 두고, 나는 고백과 탄원을 우리의 예배 계획에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교회 성도들과 내가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이 어떻게 나를 공명시키는지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나는 슬프지 않는데 왜 탄원의 노래들을 불러야 하나”라고 묻는다. 탄원이란 무엇인가? 탄원은 두 진실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다. 첫째, 탄원은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이 고통을 야기한다는 인식이다. 한 탄원자는 악은 왜곡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예비한 길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이사야는 “악을 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사 5:20)라고 기록했다. 탄원은 악을 보고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악을 무시 혹은 경시하거나 고통의 결과를 시시하게 여기는 것을 반박한다. 둘째, 악은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향하려는 힘을 넘어서기 때문에 탄원은 하나님을 의지함을 인정한다. 탄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악을 정복하시고 궁극적으로 고통을 완화 시키실 분이라고 기대하는 적극적이고 충실한 증언이다. 그 근원에는, 씨름과 저항이라는 형태가 있다. 구약학자 트럼퍼 롱맨은 “탄원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단순히 묵인하지 않는 자들의 기도이다.”라고 말했다. 왜 기독교인들이 한탄해야 하는가?


우리 교회 성도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공적인 예배 환경이든 개인 기도든지 기독교인들에게 탄원이 적합하고 심지어 필요한 이유를 심사숙고하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 1. 가끔 당신의 삶이 슬프다.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복잡해서 완전히 기쁘거나 완전히 슬프지 않다. 우리의 사람의 모든 순간에, 신중한 회상은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하는 이유들을 드러낸다. 당신이 상황에 대해 슬퍼하고 있거나 죄의 경향에 슬퍼할 때, 그들의 악을 인정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오직 한 분에게 그것들을 가져옴으로서 탄원은 반응한다. 2. 당신은 망가진 세상에 살고 있다. 전도서 저자는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라고 기록하였다. 단순히 일간뉴스를 보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탄원을 위한 무수한 기회들을 제공한다. 당신에게 근접한 상황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모든 죄의 사례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슬픔의 표현은 우리의 세상의 현재의 망가짐에 대한 충실한 목격자의 일부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에덴과 새 예루살렘 사이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퍼한다. 탄원은 슬픔과 애통을 하나님께 가져온다. 3. 때로는 당신의 교회 성도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다. 당신의 교회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아니면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특정한 어려움의 한 주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아마도 그 어려움은 심각하고 그들이 슬퍼해야 할 이유는 질병, 실업이나 손실의 형태로 막 도착하였다. 또는 어쩌면 그들이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시험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공동체적인 애통은 고통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자신의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과 하나가 되어 그들이 주의 구원을 기다림으로서. 4. 언젠가 모든 슬픔이 웃음으로 바뀐다.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방식을 상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치유하시고 그들의 슬픈 눈물이 그치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슬픔은 신자의 궁극적인 운명이 결코 아니며, 우리의 임시적인 경험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왜 슬픔을 느끼지 않는데 슬픈 노래들을 불러야 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탄원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상한 심령의 분출이다. 그리고 탄원은 확실히 바울의 빌립보서 4장 2절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이중명령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다. 탄원은 그저 슬픔을 멈추고 저항을 더하는 거다. 그것은 우리가 슬픔(악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 저항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 안에서 그것이 기뻐한다. 죄와 우리의 상한 심령은 우리가 탄원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 교회와 세상 안의 죄와 망가짐은 우리가 탄원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저항으로서 우리의 구슬픈 슬픔을 가져오도록 초대하고 우리 하나님께 호소해야 한다. 우리의 탄원을 초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 하신다. 매튜 베스터홀름(@mwesterholm)은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찬양과 음악 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는 미니애폴리스에서 그의 아내 리사와 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출처:http://www.desiringgod.org/articles/why-sing-sad-songs-when-i-don-t-feel-s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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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퍼 롱맨 3세 교수와의 대화입니다. 주제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Dr. Tremper Longman III—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https://soundcloud.com/logos-bible-software/dr-tremper-longman-lll-the-fear-of-the-lord-is-the-beginning-of-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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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마르바 던은 누구나 알고 있는 창세기 1-3장의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으로 전개한다. 그 관점은 바로 던이 오랫동안 강조해오던 "예배"이다. 던의 예배에 대한 강조는 『고귀한 시간낭비』(이레서원)에 잘 나타나 있다.


창세기 1-3장과 예배의 연관성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 그 중요성을 무게 있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실존적 물음들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이 쇠퇴해가고 하나님의 창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 세대에 기독교인들 스스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1.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2.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3.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4. 이 세상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토록 많은 혼란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5. 이 세상을 고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죄와 악을 제거할 방법은 무엇인가?

6.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7.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에게 광범한 역사를 제공해주는 으뜸 이야기(master story), 곧 '거대담론'(meta narrative)이 있는가?

8. 나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악의 세력이 나를 공격할 때, 나를 지켜줄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9. 나는 무엇을 중시하는가? 나는 어떤 가치를 따라 사는가?

10.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주는가?

11. 이 세상이 이토록 혼란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미래가 있겠는가? 희망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2. 무엇이 나의 중심인가?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에 이어지는 죄의 고백과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을 드러내준다. 인간은 스스로 타락의 길을 선택했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했다. 그만큼 인간의 죄는 크다. 하지만 던은 하나님의 회복, 즉 에덴의 회복을 말하며,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자리로 세우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점검하게 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무엇을 증거해야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창세기에서 배웠다

저자
마르바 던 지음
출판사
IVP | 2013-01-1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창세기 1-3장은 성경적 세계관 형성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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