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구약, 내러티브로 읽기"


구약성경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저작연대를 명확하게 밝히는데 필요한 정보들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적 흐름을 거스르는 부분이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전개는 서술적 기법의 일종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해도 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기법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점이 생긴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난감해 하는 본문의 진술에 대해 당시 청중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과거에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일부 엘리트들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대부분 오늘날의 구약성경을 암기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르쳤다.비록 글로 표현을 하지 못해도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구약성경은 일부 엘리트들만의 저작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암묵적 합의를 거친 기록물로 보아야 한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역사적 정확성 보다는 향유하고자 하는 신학적 가치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약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개인의 궁금함에 집중하기 보다는 당시의 청중들이 향유하고자 했던 사상이 무엇인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행히도 요즘은 다양한 비평방법론이 개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본문을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 내러티브 비평이 독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병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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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성서신학/구약 2016. 8. 28. 01:32

Joel S. Baden 교수와 ( Associate Professor of Old Testament, . John J. Collins 교수가 대화식으로 진행되는 출애굽기 강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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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

추천도서 2016. 8. 11. 23:58

『사도 바오로』 (E. P. 샌더스, 전경훈 역, 뿌리와이파리)


E. P.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주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놀랍게도 바울의 복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놀랍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보통 율법은 행위를 요구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새관점" 논쟁이 한창 뜨거울 때 관련 글들을 유심히 읽어보니, 샌더스는 율법과 복음을 은혜라는 주제 하나로 통합시킨 인물로 보인다. 즉, 신약에 나타난 복음의 은혜와 동일선상에서 구약의 율법 역시 은혜라는 관점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내 관심을 끈 이유는 구원론 때문이다. 워낙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논쟁이라 나는 그 출발점으로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갈라디아서 2장 1-14절을 삼았었다. 대략 초고는 완성했으나 몇 가지 이유로 제출하지는 않았다. 정말 아쉬운건, 그 파일이 사라졌다... ㅠ.ㅠ 확실한건 갈라디아서 2장에 대한 샌더스의 견해와 나의 이해가 전혀 달랐다. 샌더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인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이방 기독교인들 간에 율법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들과 바울 사이에 신학적 합의를 이루었다고 본다. 이러한 차이는 전개과정에서 크나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래서 샌더스의 주장은 나에게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외에도 동의가 되지 않는 서술이 여럿 있다. 그중 몇 가지 예로 든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했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 하느님이 개입해 이 세상 속에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하리라 기대했다."(59쪽)


"바오로는 주님이 돌아올때 신자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살아남아 구원되리라고 말했다."(60쪽)


전체적으로 샌더스와 나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니 앞으로 그의 의견을 수용하기 보다는 반박하는 경우가 더 많을듯 싶다. 그럼에도,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쉽게 읽힌다. 그리고 원어와 번역어 사이에서 충실한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 발전에 존재하는 간극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 책말고도 추천할만한 바울신학 개론서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샌더스의 신학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도 바오로
국내도서
저자 : E. P. 샌더스(E. P. Sanders) / 전경훈역
출판 : 뿌리와이파리 20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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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제국주의 관점에 대한 내 생각>


요새 반제국주의 관점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경향의 글들을 접해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반제국주의 관점에 대한 반대>라는 짧은 글을 남겼었다. 요점만 쓴거라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김세현 교수님이 댓글로 생각의 물꼬를 터뜨릴만한 질문을 남겨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질문은 그대로 옮겼다.


질문: 성경언어에는 반제국주의적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제국주의 언어도 있지 않을까요? 요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대의 언어로 소통했기에 오늘의 관점에서 반제국주의, 친제국주의 등의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여 성경저자(바울)이 어떻게 줄타기하듯 자신의 글을 기록했는지를 좀 더 심도있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항적 언어와 수용적 언어가 미묘라게 얽혀있어 보입니다. 그 부분을 좀 더 세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바울이 승화시켜 자신의 목회적 관점을 가지고 편지를 썼는지를 말입니다.


우선, 친제국주의 관점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앞 글에서도 사도 바울을 예로 들었으므로, 이번에도 동일한 인물로 적용하는게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친제국주의로 해석할 만한 여지가 있다. 가령 로마 시민권이 그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자 로마시민권자였다.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살해의 위협에 처했을 때, 로마시민권자의 권한을 사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심문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넘겨졌다면,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신성모독죄로 사형 당했을 거다. 하지만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을 계획했던 바울에게 로마 황제의 심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로마시민권자의 권리를 아주 적절하게 사용했다. 분명 이 지점에서 친제국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제국주의 혹은 로마제국에 우호적이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내가 볼 때 바울에게 로마시민권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그의 글을 보면 자신이 로마시민권자라고 자랑한 적이 없다. 동족으로부터 죽임 당할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 찬스로 사용했을 뿐이다. 반면 자천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신음을 앓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자신은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며 가멜리엘의 제자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자랑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때 그는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인 것 보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더 자랑스러워했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말해, 바울에게 로마시민권은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즉, 친제국주의적 태도는 바울의 선교전략을 위한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친제국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반제국주의와 친제국주의 관점 모두 반대한다. 두 관점 모두 사도 바울의 성향에서 비롯된 해석적 틀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둘 중 하나도 전제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는 성도의 불순종에 대한 훈계와 권면에서 드러나는 부차적인 요소이며, 친제국주의는 바울 자신의 사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나는 선교사이자 목회자인 바울이 짊어지었던 주제는 복음증거와 그리스도인의 완전(혹은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그의 글은 대부분 교인이 수신자였기에 당연히 후자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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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언어학 vs 신학

성찰 2016. 8. 3. 14:12

고대언어학 vs 신학


엠디비 시절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박사학위를 할거면 "고대언어학을 공부하세요"였다. 이런 조언을 해주신 분은 바로 신현우 교수. 이틀 전 허은선 선교사님과 같이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똑같은 말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얼추 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 같은 말을 들었네.


신 교수님은 이미 신학방법론은 연구될만큼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고대언어학을 전공해야한다고 하셨다. 2008년도에 예레미야를 텍스트언어학으로 분석하신 장성길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할 기회를 가졌었고, 그 다음에는 히브리대학교에서 히브리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권성달 교수님으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적이 있다. 확실히 언어학 전공자로부터 배우면서 많은 유익이 있었다. 장 교수님으로부터 언어적 장치(Discourse Markers, Cohesion, Coherence)를 통해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단락구분과 구조분석을 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권 교수님으로부터는 문법으로서의 히브리어가 아닌 언어로서의 히브리어를 배울 수 있었다. 두 분 덕에 조금이나마 언어와 성경의 연관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두 분 다 구약학이시로군.


분명 언어학은 성서학자에게 크나큰 도움을 준다. 스탠리 포터의 등장 이후 헬라어와 신약연구에 일어난 많은 변화가 그러한 사실을 잘 드러내 준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이렇다. 성서학자에게 고대언어는 기본이지만, 언어를 잘 한다고 해서 성경연구를 잘 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든다. 본문해석을 위해서는 언어의 구성과 의미 만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 등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결국 중요한건 저자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동일한 단어라도 저자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용례연구가 중요하다. 동일한 역사적 배경을 가졌다고 해도 저자의 신학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배경연구를 선행하고 저자의 신학과 비교한다. 그러므로, 나는 결국 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언어학과 신학을 접목하여 내 자신만의 방법론을 만들어낸다면 최선이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신학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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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국주의 관점에 대한 반대>


반제국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울과 반제국주의"이다. 이 관점은 바울은 당시 패권국이었던 로마제국에 반대하여 기독교사상을 전개했다고 가정하고 본문을 해석한다. 황제숭배의 경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일부 총독들에 의해 지역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유일신 사상에 위배되므로 마땅히 반대해야 했다. 바울의 반제국주의가 명백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가 바울의 반제국주의적 관점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편지는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이 동기가 되어 기록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복음전도을 위해 보냈지만, 여러 신앙공동체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바울의 조언은 불순종에 대한 책망과 올바른 신앙생활에 대한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불순종과 순종이 중심이다. 황제숭배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라는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문제이다. 순종을 권면하다 보니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가르친 셈이다. 즉, 바울의 목적은 권면에 있었으나, 그에 대한 결과로 반제국주의로 나타나는 것이지, 애당초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제국주의 관점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바울의 저의를 무시하고, 반제국주의에 강조점을 둔다. 바울은 애초에 반제국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념적 반대에 우선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선교자로서 목회자로서 훈계한다. 그의 관심은 신앙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있다. 이러한 이해 때문에 나는 반제국주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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