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 10장 1-18절를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문"(7, 9절)과 "선한 목자"(11, 14절)로 표현한다. 예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동시에 "문"과 "목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적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관련 연구자료들을 읽어보면, 이 구절들을 우화(allegory)가 아닌 비유(parable)로 해석해야 하며, 각 단락마다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되리라 예상되지만, 만약 "문"과 "선한 목자"의 연관성에 대한 선명한 답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매우 보람된 공헌이 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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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본문을 읽을 때 다른 성경 구절들이 연상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목자들을 향한 심판과 새로운 목자의 등장이라는 주제의 경우에는 에스겔 34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본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 학기 요한복음의 연구주제인 "COVENANT AND GOOD SHEPHERD IN JOHN 10:1–21"에 인용할 자료들을 찾고 있는데, 주제와 연구방법론은 저마다 달라도 연구자들 모두 예외 없이 에스겔 34장을 언급하고 있다. 선한 목자의 죽음("내 목숨을 버리는 것", 17절)은 이사야 53장을 관련 구절로 제시힌다. 이처럼 특정 주제를 접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본문이 있기 마련이다.


내 고민은 '성경 저자들 그리고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청중들도 현대인과 동일한 본문을 떠올렸을까?'하는 의문에 있다. 두 본문간의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의문의 의지가 사라질만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혹은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의 구전이나 기록들을 포함한)에 대한 이해에 대한 확신은 아직 단언할 수 없다. 더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구약 인용에 대한 단서를 명확하게 남겨두지 않았다.


내 이해에 의하면, 물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목자들을 향한 심판과 새로운 목자의 등장이라는 주장은 스가랴 9-14장에서도 두드러진다. 특히 내 주안점은, 스가랴 9-14장에 나타난 목자 모티프에 대한 이해에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에 대한 비유를 설명할 때에는 스가랴 9-14장을 언급하지 않는다. 에스겔 34장이 간략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이 주제를 담고 있는 반면에 스가랴 9-14장은 방대한 분량을 살펴봐야 하므로, 간결성이란 측면에서 에스겔 34장이 더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이번 연구에서 시도해 보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비유와 스가랴 9-14장을 연결한 해석이다. 스가랴 9-14장의 목자 모티프는 이미 연구를 해놓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0장과 연결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 되지만, 과연 내 가정만큼이나 두 본문의 긴밀성이 잘 설명될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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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metaphor)를 병치와 치환의 방식으로 구분한 개념이 바로 '병치은유'와 '치환은유'이다. 자세한 설명은 네이버 문학비용용어사전를 참조하라.


병치은유/치환은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107&cid=41799&categoryId=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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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스가랴서와 에스겔 40-48장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물이다. 

https://biblicalstudies.org.uk/pdf/eq/1968-4_197.pdf


1968-4_19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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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주해와 설교> 라는 주제로 열린 제41회 한국성경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에 대한 기사입니다. 


1편. 송영목 박사와 김경식 박사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23


2편. 이승구 박사와 최승락 박사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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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논문 ] 바울의 율법관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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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의 중요성

끄적 2018. 2. 8. 17:30

[지도교수의 중요성]

내 신학석사 졸업논문을 지도해 주신 김경식 교수님이 한국성경신학회에서 발표하신다고 해서 야고보서에 대해 공부할 겸 학회에 참석했다. 모처럼 성서학회에 참석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배우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김 교수님의 초대로 학교 연구실에서 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점심식사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한동안 갖지 못하다가 졸업논문을 지도 받게 되었는데, 내가 주제선정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나와 같은 주장을 하는 기존 연구가 없어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과감히 진행하라고 격려해주셨다. 덕분에 학계에 기여할만한 연구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

유학 갈 학교로 고민하고 있을 때에도 영어공부할 겸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하고 박사는 영국에서 하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본인이 미국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석사를 하고 애버딘대학교에서 박사를 하셔서 두 나라의 차이점을 잘 알고 계셨고, 석사는 무리하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해 주셨다. 덕분에 지금 미국 유학 생활을 비교적 순탄하게 하고 있다.

오늘은 미국 유학 생활과 영국 유학에 대해 주로 대화했다.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미국에 있다보니, 주위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려는 유학생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 중 나에게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냐고 말해 주는 경우가 흔하다. 새로 적응해야 하는 영국 보다 짧지만 2년 정도 적응한 미국이 더 수월하지 않겠냐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물가도 그중 하나이다. (내 입장은 명확하지만 가끔 솔깃하기도 하다) 그래서 영국 유학에 대한 조언은 다른 경로를 통해 구해야 한다. 김 교수님은 두 나라를 직접 겪어보신 분이시라 성서학은 영국에서 공부하는게 더 낫고, 한국인은 미국 보다 영국에서 공부하는게 더 수월하다고 하신다. 특히 나처럼 교수의 강의 보다 스스로 연구하는걸 선호한다면 영국이 제격이라고 하신다. 본인도 그래서 영국을 선택하셨단다. 나에게는 앞으로 연구제안서를 잘 준비하는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도 해주셨다.

영국유학은 오래 전부터 다짐했었지만, 가끔은 딴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오늘 김 교수님의 조언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다. 앞으로 딴 생각하지 않고 영국 박사과정을 목표로 준비할거다. 칼빈신학교에서 만난 어느 목사님의 말처럼 나는 "영국 갈 신약학자"이다.


* 이 글은 2월 6일 (화) 오후 4시 40분쯤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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