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oseph B. Lightfoot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제공하는 아키브가 있군요.

참고로 Lightfoot은 19세기 성서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현 바울신학의 대가인 James D. G. Dunn이 Lightfoot 석좌교수로 있습니다.



S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

http://archive.org/details/stpaulsepistleto00ligh



구글북스에서도 다운로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http://books.google.co.kr/books?id=N8ECAAAAQAAJ&hl=ko&pg=PR3#v=onepage&q&f=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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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헤이스 교수(Richard Hays, 듀크대학교 신약학)의 <The Faith of Jesus Christ>가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한 곳은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등 N. T. 라이트의 저서들을 주로 번역하고 있는 에클레시아북스이고, 번역자는 최현만이다.


우리나라에서 헤이스는 <신약의 윤리적 비전>(유승원 역, IVP, 2012)으로 신약윤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바울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성서학자이다. 대표적으로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이란 책은 바울서신의 해석학적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잘 읽혀지지 않지만, New Interpreter’s Bible 시리즈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집필하기도 했다.

헤이스는 이 책으로 바울의 새 관점의 선구자로 손꼽혀 왔다. N. T. 라이트가 자신의 바울연구를 집대성한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에서 헤이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고 하니, 톰에게 미친 헤이스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제목은 그 자체로 갈라디아서의 주요쟁점 중 하나인 "피스티스 이에수 크리스투"(갈 2:16)의 번역에 대해 헤이스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담고 있다. 이 문장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눠진다.

(1) 전통적 입장: "이에수 크리스투"는 "피스티스"의 목적격 속격으로 번역해야 한다. 즉 본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다.

(2) 새관점 입장: "이에수 크리스투"는 "피스티스"의 주격 속격으로 번역해야 한다. 즉 본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한 끝 차이의 번역이지만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구절이 바울의 구원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쟁에 대해 헤이스는 자신의 입장을 책 제목에서 드러내고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국내 신학계의 반응으로 생각해본다면, 이 책이 국내 신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이 책은 잠시 조용해진 논쟁에 불을 지필 수 있으려나? 아니면 거대한 폭풍은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이 번역된 후에 일어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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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D. G. 던은 자신의 책 <바울신학>에서 갈라디아서 2장 10절이 연보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갈 2:10이 연보 자체를 가리킬 것 같지는 않다; 다른 곳에서 연보를 가리키는 구절들은 표현과 어조에서 유사성을 지니는데, 갈 2:10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연보를 그의 선교활동과 안디옥에서의 그의 실패 이후의 예루살렘 또는 유대 교회들 간에 벌어진 간격을 메우는 시도로 생각했을 것이다(갈 2:11-14). 그러나 갈 2:10에 언급된 합의가 연보를 촉구하는 말의 일부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가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애초부터 요청했던 것이었다; 이 연보가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울 자신의 의도였다(롬 15:26) - 제임스 D. G. 던, 바울신학, 924 n.170.


이 견해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두 가지 정도만 짚고 넘어가겠다. 

1.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면에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로 답했으므로, 안디옥 사건 이후에 연보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와의 연합을 시도했다는 던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2. 그리고 번역이 정확한건지 의문이 드는 부분인데,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말한 이들은 바울이 아니라 사도들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애초부터 요청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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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the Poor

추천도서 2013. 10. 15. 15:41



이 책은 그리스-로마 사회와 유대전통,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바울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갈 2:10)란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분석하였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구제에 있어 두 사회간 차이가 존재한다. 유대전통에서 구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덕목으로 마땅히 행해야 하지만,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구제는 의무적 사항이 아니였다. 따라서 유력자들과 바울의 구제는 유대전통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다만 저자는 유력자들은 할례가 더이상 예수를 믿는 사람들(특히 이방기독교인)의 필수적 요소가 아니므로, 구제를 통해서 정체성과 실천사항을 규정했다고 여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는 Dunn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고자 하는데, 저자는 대체로 Dunn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내 논지를 뒷받침할 자료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리스-로마 사회와 유대전통에서의 구제와 갈 2:10의 의미에 대한 연구로서 탁월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 서평 ::

http://www.thepaulpage.com/remember-the-poor-paul-poverty-and-the-greco-roman-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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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랠프 P. 마틴의 고린도후서 주석의 내용 중 갈라디아서 2장 10절 해석을 간략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1)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한 약속, 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있었다(갈 2:10을 보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약속을 실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Luedemann, Paul, 87, 88를 보라). - 랠프 P. 마틴, 고린도후서, WBC, 김철역 (서울: 솔로몬, 2007) )511.


1. 바울은 사도들과 약속한 적이 없다.

마틴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은 약속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개역개정)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면 이전부터 구제를 해왔다. 그러므로 약속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2. 바울의 구제는 자신의 신학에 따른 행위이다.

고린도후서의 구제는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던 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신학에 따른 실천이였다. 바울의 구제관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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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2절("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에 대한 던의 주석을 간략히 정리하고 내 생각을 적어본다.

게바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보고 식탁교제에서 물러난 이유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게바가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사에 대한 신학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게바는 고넬료 사건 이후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탁교제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없다. 그러나 게바는 할례자들이 교회를 박해할까봐 두려워한다(참조. 1:13). 게바의 행동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게바를 책망한다(2:11). 게바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2:14). 할례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던 게바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의 행동이 유대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탁교제 금지와 할례준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게바의 행동은 교회보호라는 차원에서 보면 적합해보이고, 바울의 반응은 과민해보인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게바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 상관 없이 복음의 진리를 허문다. 게다가 게바는 외부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내부의 단결을 허물어뜨리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우리는 게바의 행동을 통해 교회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의 진리를 해치고 내부의 단결을 허물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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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0절("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에 대한 던의 해석을 읽는데, 그의 신학적 견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활동은 유대 율법과 전승의 특별하고 특이한 특징이다. ... 유력자들의 이러한 요구는 바울과 바나바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유대 언약 신앙의 주요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 할례 논쟁은 승인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언약적 율법주의'의 원리를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112-3.

아마도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관심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으로 인한 사도들의 요청으로 여겨지는데, 던은 이 요청을 '언약적 율법주의'와 연관짓는다. 이러한 과감한 해석은 바울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던의 대가다운 면모이거나, 그의 신학적 고정관념이 남발된 경우일지 모른다. "본문이 말하게 하라"는 개혁주의의 성경해석방법은 쉽고도 어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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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4절에 대한 슈라이너의 통찰력 있는 해석을 읽고 감탄한다.

The false brothers in Paul's view were still stuck in bondage, for like prisoners they came to see what freedom in Christ is like. But they did not arrive as prisoners who longed to be free but as those who desired to bring others into bondage with them. - Schreiner, Galatians, 125.

[번역] 바울의 입장에서 거짓 형제들은 자신들과 같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보고도 여전히 노예 신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죄인들과 같이 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자신들과 같이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단상] 바울이 거짓 형제들이 몰래 침입한 목적을 밝히는데 "노예로 삼다"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명확해진다. 거짓 형제들은 자유를 보고도,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로 삼으려는 자들. 현 시대의 거짓 형제들과 같은 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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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 2: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지속되도록 하려고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끊임 없이 저항한다. 이러한 저항을 통해 "바울은 자신 스스로 권위를 바로 세우고 갈라디아 교회의 모범이 되었다"(Schreiner, Galatians, 126).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있는지, 교회의 모범이 되고 있는지,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지 자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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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s main point in the argument is not whether he was identified as an apostle but whether he was recognized as one who proclaimed the true gospel. - Thomas R. Schreiner, Galatians, 129.

[번역] 이 논증에서 바울의 주요 쟁점은 자신이 사도와 동일시되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가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인정받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갈라디아서 2장 8절에 대한 슈라이너의 주석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복음전도자로서 자신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지에 더욱 집중하고 있지 않고, 어떠한 지위나 직함에 집착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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