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에스겔 45장에서 이스라엘의 군주가 주도하는 속죄는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서 드린다 (17절). 에스겔의 주요 관심사는 성소와 성전 정화이며(18-20절), 군주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명절에 대속죄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앞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본 대속죄일과 초막절"에서 "에스겔 45장에서 대속죄일은 성전 정화와 관련이 있으며,"라는 문구는 적합하지 않다. 반면 에스겔이 군주가 지켜야 할 명절로는 유월절과 초막절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신학이 요한복음에 흐른다(고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사역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노끈으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일이다 (2:13-22). 가나의 혼례는 첫 표적이며, 내가 매번 강조하듯이 예수의 의지에 반하는 사건이다 (2:1-12). 예수의 구속사를 예수의 대제사장직과 대속죄일로 해석하는 경향과 다르게, 요한이 이야기 전개에서 유대 절기를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지만, 그가 대속죄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이 사건 이후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했다는 기록(23-25절)으로 자신의 전개를 이어간다. 또한 요한은 유월절은 세 번 배치하고, 7:1-10:21은 초막절로, 10:22부터는 수전절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다.

요지는 에스겔의 성소와 성전 정화, 그리고 유월절과 초막절 준수 명령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에스겔에서 대속죄일을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반복적인 속죄제를 통해 정화하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포함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간에, 에스겔과 요한복음이 대속죄일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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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속죄 사역, 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두고 예수의 대제사장 사역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 요한복음 19-20장을 대속죄일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지만, 앞으로 요한복음 전체를 더 세밀히 살펴봐야겠지만, 현 이해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이러한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다. 비록 요한복음 1장 29절에 기록된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는 세례 요한의 선포는 예수의 대제사장직과 대속죄일과 거리가 멀다. (관련 글: 요한복음의 예수와 대속죄일; 속죄일과 초막절)

대속죄일을 강조하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구약 성경은 이 절기를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초막절을 더 강조한다. 에스겔 45장에서 대속죄일은 성전 정화와 관련이 있으며, 군주가 집례해야 할 명절에 포함되지 않는다. 에스겔이 군주가 지켜야 할 명절로는 유월절과 초막절을 언급하고 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재건 과정에서 성문에 모여 지킨 절기는 초막절이며, 대속죄일은 언급하지 않는다. (관련 글: 에스겔 45장 25절과 스가랴 14장 16절에 나타난 초막절; 에스겔 45장에 나타난 초막절; 느헤미야 8장에 나타난 이스라엘 귀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초막절)

그 이유는 성전 신학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군주제의 등장으로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나눠지고, 솔로몬의 성전 봉헌과 관련하여 초막절이 지켜지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성전과 관련지어지며, 대속죄일의 중요성은 낮아졌지만 초막절의 위상은 올라간다. 성전 파괴와 재건 과정에서 그 위상은 더 명확해진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성전과 자주 연결 짓는다. 예를 들어, 2장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자기 죽음과 부활을 처음 암시하셨으며, 7장 37-39절은 예수의 죽음과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성전과 생수의 강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요한복음은 유대 절기를 아주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며, 요한의 절기 사용에서 초막절은 7~10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대속죄일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본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성전 신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이러한 배경에서 요한복음이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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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초막절 단락(7:1-10:21)의 기능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이 글의 내용은 대체로 내 분석에 근거하며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학위 논문에 포함될 예정이다. 

초막절 단락이 시작하기 앞서 저자는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을 다룬다 (6:66-71). 이 단락에서 저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한다 (vv.70-71). 이어 예수의 활동 무대는 갈릴리로 옮기시고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이 명시된다 (7:1).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이 언급되고 (v.2), 명절의 중간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기 시작한다 (v. 14). 여기서 초막절과 성전이 연결된다.

7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성령에 관한 가르침이다 (v. 37-39). 나는 이 단락의 기원을 스가랴 14장과 연결한다. 선행 연구에서는 초막절의 헌수 의식(water libation ceremony)에 초점을 맞추지만, 초막절의 기원은 출애굽의 구원이며, 점차 농사를 위한 비와 관련지어져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감사하는 절기로 정착된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v.37),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v. 38)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 이러한 초막절의 배경을 근거로 한다.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은 예수께서 생수의 강을 성령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v. 39).

이어 그리스도 논쟁 (7:41-42)을 위치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요한은 초막절 단락에서 그리스도/다윗 기독론의 절정을 의도하고 있다.

8장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33-59). 예수의 정체는 아브라함을 능가한다.

9장의 핵심은 모세의 제자와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28-41). 예수의 정체는 모세를 능가한다.

10장의 핵심은 선한 목자로서 예수께서 목자-양 유비를 사용해 자기 죽음과 부활을 가장 극명하게 가르치는 장면이다 (vv.1-18).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v.18).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구속 사역과 그의 권위를 통해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목자-양 유비는 왕권 사상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스가랴 14장에서 여호와의 날 이후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고 이방 나라에 초막절을 명령하시는데, 이 명령은 열방 국가의 통치자에 대한 순종, 여호와의 열방 통치를 상징한다. 요한이 선한 목자 담론을 통해 예수의 사역과 권위를 드러냈기 때문에, 이 담론의 배경인 초막절을 고려해 스가랴 14장을 적용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요한복음은 초막절 단락에서 예수의 왕권을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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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설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대세이지만, 간혹 장로 요한을 주장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저자설과 무관하게 두 기록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내 관심사인 '어린 양'이 그중 하나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현재는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주창하고, 요한계시록이 완성했다는 잠정 결론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 (1:29)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으나, 아직 선례를 찾지 못했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려는 목적대로 '어린 양'을 그의 기록 초반부에 위치시켰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한은 '어린 양'을 왕권 사상과 연결하는 중요한 기여를 남긴다. 요한의 고유한 절기 사용은 그의 목적에 부합한 기교이다.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정립하는 시작점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을 그 사상을 계승하여 종말론적 심판과 부활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린 양'을 왕권과 연결한다. 반면 요한계시록은 유대 절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복음과 달리 절기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할 필요가 요한계시록에는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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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실 최근 문헌 조사(a literature review)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아들됨'(sonship)은 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헌 조사 이후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의 흐름이 이 주제를 꼭 다뤄야 한다는 판단이 서서 방향을 틀었다.

고대 문명에서 집단 지도자나 왕을 신의 아들로 칭했듯이, 아들됨은 신적 정체성(a divine identity)과 신성왕권(divine kingship)에 관한 개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됨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규정하며, 그에 따른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왕권을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권위도 예수의 아들됨에서 기인한다.

현재 목자-왕 유비를 다루면서 틈틈이 '아들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더 조사를 해봐야겠으나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에 관한 자료 위주로 보인다. 만약 적합한 선행 연구를 찾지 못하면, 일일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거나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게 된다. 내 박사 학위 논문을 내년에 제출할 수 있느냐는 여기에 승패가 달려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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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선행 작업으로 왕권 사상을 다뤄야 한다. 내 관찰에 의하면,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 목자-양 비유, 아들됨(sonship)이 모두 왕권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왕권을 주장한다. 다만 요한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내어놓음, lay down)으로 예수의 왕되심을 선호한다는 역설이 있다.

초막절은 일 년의 수확을 여호와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풍성한 수확을 가능케 하신 비의 주관자 여호와를 찬양하는 시기가 바로 초막절이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우상숭배, 특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고발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숭배가 바로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목자-양 비유는 전통적으로 왕권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목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왕을 상징한다. 목자-양 비유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kingship/Messianism)이다. 예언서에 나타난 미래에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다윗과 같은 왕 혹은 다윗의 후손으로 해석하지만, 요한복음에 이 사상을 신봉하는 무리가 등장하지만, 다윗처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등장하지만, 그의 출신 배경이 다윗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여호와를 궁극적인 왕으로 선포하는 선지자들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넘어서는 구원자 예수의 등장을 선포한다.

요한은 이 두 주제를 자신만의 신학으로 재정립하는데, 아들됨은 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요한의 아들됨은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그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권한을 동시에 드러내는 수단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스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야웨 신앙에 관해서는 고대 유대 유일신론(ancient Jewish monotheism)을 염두에 둬야 하고,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는 삼위일체론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앞 세 주제를 다루는 작업이 쉽지 않아서, 뒤 두 주제는 차후 연구 주제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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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서는 유다 마카비의 그의 후손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 기록이다. 주요 내용은 마카비 가문을 중심으로 한 유대 세력과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대결이다. 후에 마카비 가문은 하스몬 왕국 시대를 열게 되고,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향한 기대(소위 다윗 메시아사상)가 팽배했던 시대에 마카비 가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1. 마카비서에 나타난 초막절과 수전절

1) 초막절(Sukkot)
마카비서에서 '초막절'/'그 절기'(the Feast)를 지키는 내용이 몇 차례 나온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지킨 절기는 초막절이 아니라 '수전절'(Hanukkah)을 새로 제정한 셈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정확히는 숙곳(Sukkoth)에서 초막을 지었고, 예루살렘 정복 이후에는 그 지역에서 초막절을 지켰던 유대인들에게 초막과 성전의 연관성은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카비 항쟁을 통해 '성전 정화'가 필요했다. 마카비 가문은 새로운 절기를 제정할 의도가 없었고, 기존 유대 절기 중에서 자신의 시대에 필요한 '성전 정화'에 적합한 절기로 초막절을 택했다. 본래 초막절은 티쉬레이(Tishrei, 태양력 9/10월) 십오일부터 지키지만, 실제로 그들이 절기를 실시한 시기는 기슬레우월(Chislev, 태양력 11/12월) 이십오일이다.

2) 수전절(Hanukkah)
성전 정화 이후 그 절기를 포고령으로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 선포한다. 이후에도 마카비서에는 '수전절'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카비서에 등장하는 초막절은 대부분 수전절로 읽어야 한다.

2.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초막절과 수전절

요한복음에서는 초막절(7:1-10:21)과 수전절(10:22ff)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요한의 예수는 초막절을 배경으로 선한 목자의 죽음을 가르치신다(1-21절). 이후 수전절을 배경으로 선한 목자의 죽음에서 파생된 논쟁에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질문, 즉 그리스도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초막절과 수전절을 예수의 정체성과 연결하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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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해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은 그가 갖고 있던 당시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의 일부를 드러낸다. 나다나엘이 그같은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토대로 고백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언급했기 때문이다(48절). 나다나엘은 유대인들에게 팽배했던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메시아 사상을 갖고 있었다.

요한복음 1장 로고스 (1:1-18)과 세례 요한(19-36절)로 시작하는 이유는, 서두에 예수의 정체를 미리 선언한 이후에 제자부터 시작하여 2장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까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여 (1-12절), 전통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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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은 세례 요한의 발화를 통해 처음 예고된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문구는 속죄와 관련해 이사야 53장의 "야웨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세를 이룬다. 53장에서 속죄의 역할과 "어린 양"이란 문구는 이러한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3: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더구나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구절에 의해 해석자들은 이런 경향을 강화한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사야 53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러한 유사성은 예수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사이의 연결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현재 이사야 53장에 언급되는 야웨의 종을 메시아와 연결 짓지 않으며, 속죄는 이사야가 덧붙인 개념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종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사야조차도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는 종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깨닫고 난 후 유대인들의 '고난'이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1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 그의 의지가 군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구절에서 중요한 관점은 '예외성'이다.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메시아사상의 스펙트럼이 넓었다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다수가 신봉했던 사상(들)과 결을 달리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여기서 큰 무리가 모인 이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은 다윗과 같은/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다른 행보를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예외성'을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했던 무리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이 예수의 부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예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하신 이유는 '예외성'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자신의 사역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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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원론을 헬레니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금도 이원론 이외에 몇 가지 요소들을 근거로 요한복음의 배경이 헬레니즘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문학비평이 성서학에 도입되면서 문학 기법 중 ‘역설’(irony)로 요한복음을 해석한 연구들이 제법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의 십자가와 영광이란 주제이다.

요한복음의 대조 기법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이원론과 역설은 모두 예수의 구속사와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은 먼저 영생을 강조하고, 이어 심판을 말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며 심판은 불신의 결과이다. 요한에게 불신(=죄)의 대가는 심판이며, 믿음의 대가는 영생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구속사에 기인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셨고, 요한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예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의 이원론과 역설은 요한의 시대적 배경이나 문학적 기교를 넘어서 예수의 구속사, 즉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이원론과 역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기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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