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목자는 130~140년경 로마에서 비오 교황(140~155년)의 형제인 헤르마스가 저술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대 교회의 일부 공동체에서 전례 때 공식적으로 낭독되고 경전으로 인정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세례를 받은 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회개이다. 고대교회의 회개는 오늘날의 고해성사에 해당한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청하기도 하고 용서를 받기도 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그런데 고대교회에서 참회한 죄인들의 모든 죄는 늘 용서받는다는 확신이 이후로도 계속 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러한 변화를 암시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이 내린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는 이들이, 그리고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를 맛본 이들이 이제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는 회개하여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거듭 십자가에 못박고 모욕하는 것입니다』(히브 6, 4-6).

2?3세기에 노바티아누스파와 다른 엄격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엄격한 회개의 의미로 해석하였다. 또한 세례 후 중죄를 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마침내는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다른 이들은 매우 권위적이고 결정적인 이 문구들을 엄격한 규율 조치로서보다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대처할 교훈적 경고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히브 6, 4에서 말하는 회개의 불가능은 원칙적 불가능이 아니라, 대개 배교자는 다시 회심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상 알 수 있기 때문에 허구적 불가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회개가 고대교회에서 어떻게 개별적으로 행해졌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분명하다. 다만 1~2세기 전환기와 2세기 전반기에 씌어진 일부 작품에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목자의 회개론은 2세기 중엽의 신학 발전을 이끄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회개 논쟁은, 세례를 받은 뒤 회개를 금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헤르마스가 처음으로 세례 후의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였는지, 아니면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회개를 단 한 번으로 제한하였는지에 관한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첫째 경우는 헤르마스가 교회의 성성 때문에 세례 후 회개를 거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엄격함을 완화하였다는 입장이고, 둘째 경우는 그가 단 한 번으로 제한된, 일반적인 회개 관습을 강화하였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본문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둘째 해석이 더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회개할 뜻이 있는 죄인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르마스가 세례 후 회개를 한 번 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운 것은 이전의 관대한 관습을 더 엄격하게 강화한 것이라 하겠다. 그 이후로 고대 그리스도교는 세례를 받은 뒤 다시 지은 죄에 대해 한 번의 회개만 허용하였다.

한 번만 허용된 고대교회의 엄격한 회개는 신자들에게 크나큰 희생을 요구하는 엘리트 교회의 관습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테르툴리아누스 이래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개적인 회개 조치로 자기 약점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수치심을 느끼고 회개를 멀리하였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교회의 용서를 얻기보다 오히려 죄지은 상태에 머무르려 한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한 개탄은, 콘스탄티누스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뒤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더 심화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상황을 맞으면서도 유연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많은 점에서 회개 규정들을 더욱 강화하였다. 특히 일회적 회개 원칙은 서방에서 철저히 지켜졌다. 이 경우 회개에 부과된 보속이 강화되어 -예를 들어 평생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 지키기도 힘들고 어렵게 되자 회개는 점점 더 임종 때까지 연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회개한 사람은 교회에 받아들여진 뒤 거의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회개를 하고 나면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갖지 못하게 하여, 성직자가 될 수 없으며, 어떤 공적인 교직도 맡지 못했다.

회개는 세례의 특성처럼 한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가 뒤따랐고, 회개 제도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정한 회개를 죽을 때까지 연기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더구나 506년 아그드 교회회의는 사목적인 이유에서 35세 이하의 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금하였다. 538년 오를레앙 교회회의는 나이 든 이들도 배우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회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로써 회개는 실제 삶에서 멀어져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 성격이 사라지고, 생명을 위한 용서의 성사가 죽음을 준비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세례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세례 후 회개하는 것보다 평생 세례지원자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세례를 죽을 때까지 미루었다. 사람들은 「세례복을 입은 채 사망한」이라는 표현을 묘비에 자랑스럽게 기록하였다.

이 갈등상황의 해결은 5~6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변두리인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사목적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지역 사람들은 먼저 공개적인 회개를 포기하기 시작하고, 주교나 사제, 수도자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보속을 받았다. 이는 아일랜드와 영국이 대륙 선교를 나서면서 서방에 널리 퍼져 일반적인 해결책이 되었다. 모든 신자가 해마다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규정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출처] 교부들의 가르침 (6) 헤르마스의 목자 / 하성수 박사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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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링과 죄

성찰 2015. 7. 1. 03:06

어제 난생 처음 스케일링을 했다. 6월말까지 의료보험으로 저렴하게 할 수 있다는 신문기사에 혹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간 치과라 엑스레이를 찍은 후 스케일링을 받기 시작했다. 눈은 가려졌고 벌린 입안으로 금속물질이 들어가 치석을 제거하는데 살짝 겁이 났다. (치과의 경험은 다들 똑같은 걸로 알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다.) 스케일링이 원래 아픈건지 모르겠지만, 치아와 치아 사이를 계속 쑤시고 잇몸과 계속 부딪혀서 도중에 '그만할께요'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랫 쪽을 한 후 잠시 쉬어 가는데, 간호사 분이 좀 힘드셨는지 치석이 많다고, 양치질을 제대로 하고 있냐고 묻었다. 하루에 최소 두 번씩 꼬박꼬박하고 혀크리너로 설태제거까지 하고 있는데, 이런 질문은 좀 무례하게 느껴지지만, 오쭉 힘들면 이런 질문을 하다 싶었다. 스케일링을 마치고 의사의 진료를 통해서 충치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제할 때 5년만에 치과에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체로 양치질을 제대로 안 한다는 위로(?)로 들었다.

우리는 자신이 나름 규범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런 생각에서 예외이지 않다. 법 없이 살 정도는 아니지만, 예의 바르게 모범적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준이다. 혹은 타인의 기준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여전히 허물이 가득한 인간이다. 양치질을 하고 설태제거까지 해도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치석이 구석구석에 존재하듯이, 죄 역시 나도 모르게 나의 삶을 뒤덮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릴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 제거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드려야 한다. 마치 내 눈이 가리워져도 의사가 제대로 진료를 해줄 것을 믿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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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말씀묵상 2011. 10. 26. 08:55
[매일성경] 요나 4:1-11
 
요나는 불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자 했다. 요나는 이기적이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면하게 한 박넝쿨에는 크게 기뻐하지만, 곧 시들자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요나의 행동기준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요나 자신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소명의식이 전혀 없었다.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을 선포 받은 니느웨는 회개하지만, 요나는 불순종으로 일관했다.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역에 동감하지 않았고 열매로 인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요나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가? 그리고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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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8의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는 삭개오 이야기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동사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느냐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삭개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예수의 구원사역에 대한 이해에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누가의 용례를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서에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 연구에서는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누가의 용례를 분석한 후에 그에 따른 해석을 제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 결과 누가는 미래적 현재와 습관적 현재를 혼합하여 사용하며, 해석방향을 결정하는 요소인 문맥은 미래적 현재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아마도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직위를 남용하여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무리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삭개오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결단은 당시의 관례와 비교할 때 다소 파격적인 수준이다. 그만큼 삭개오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가를 치르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보여준다. 이에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이다. 따라서 삭개오의 고백은 회개로 여길 수 있다. 그리고 구원 선포는 예수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며 무시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양으로 여기셨다. 예수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언급은 에스겔 34장과 누가복음 15장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목자의 역할을 하신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를 드러낸다.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의 사역에 의한 결과이다. 본문을 통해 부자 관원과 대조되는 삭개오의 자발적인 모습이 부각되면서도, 예수의 사역이 한층 더 강조된다.오랫동안 삭개오 이야기는 ‘세리의 회개’로 읽혀져 왔다. 즉 토색 행위로 부자가 되었으나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 받은 삭개오라는 인물로 그린 이야기로 해석한다. 하지만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더 풍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회공동체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예수께서는 자신들을 통해 교회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회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소외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역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또한 부자들은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서 재물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도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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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34),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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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6절 주해  (0) 201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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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다짐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1]하지만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2]삭개오가 사람들의 불평을 의식하고 있다면(7-8),[3]예수께서도 이들을 의식하고 계셨을 터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리들의 반응(7)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4]예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가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5]누가복음에서 σωτηρία는 총 3번 사용되었으며(1:69, 71, 77), 이 구절들은 모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고하는 사가랴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6]사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맹세에 따라 구원을 베푸신다(1:68-73).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3:8). 그에게 회개는 신학이나 종교의식의 변화가 아닌 삶의 변화이다.[7]그래서 요한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 묻는 세리들에게 부과된 세금만 걷으라고 답한다(3:13).[8]결코 직업을 변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9] 그렇다면 세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정한 세금 징수이다(3:12-13).[10] 따라서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기록이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신앙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8절 주해).[11] 더 중요한 점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죄와 회개를 연관 짓지만(5:32; 13:2-3; 15:7, 10; 17:3-4),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죄를 용서하신다(5:20-24; 7:47-49).[12] 또한 누가복음은 세리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5:27-30; 7:29, 34; 15:1; 18:9-14).[13]실제로 세리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했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3:12). 그리고 결국에는 요한의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다(7:29).[14]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 역시 의롭게 여겨졌다(8:14). 구원의 대상은 삭개오와 그의 집 전체를 포함하며, 이와 같은 사건은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10:2; 11:14; 16:15, 31; 18:8).[15]


[1] Bock, Luke 9:51-24:53, 1522.

[2] Bock, Luke 9:51-24:53, 1522.

[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4] Robert C. Tannehill, Luke, Abingdon New Testament Commentarie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78.

[5] Evans, Luke, 280.

[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7] Evans, Luke, 48..

[8] Bock, Luke 1:1-9:50, 312.

[9] Bock, Luke 1:1-9:50, 312.

[10] Bock, Luke 1:1-9:50, 312; Double, The Paradox of Salvation, 116.

[11]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12]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3. 삭개오가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를 근거로 삭개오의 무죄를 주장하는 시도가 있다(Evans, Luke, 280).

[13] Bock, Luke 1:1-9:50, 310;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4]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 22.

[15] Bock, Luke 9:51-24:53, 152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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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

한 세리의 회개

19:1-2 여리고는 국경 도시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다. 또한 유대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안에 헤롯의 왕궁이 자리하고 있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으므로, 다른 세입 역시 매우 많았을 것이다. 세리은 판매세 및 관세를 청부 맡고 자기 밑에 세리들을 고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러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지 부정을 저질렀던 것 같다(19:8)

19:3-4 삭개오가 고대 지중해의 기준으로 보아 키가 작다는 것은 아마도 150센티미터 이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중 쾌적한 기후였던 여리고는 특별히 종려나무로 유명했으나, 뽕나무를 포함해서 다른 나무도 많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 묘사된 뽕나무는 무화과나무의 일종으로, 올라가기가 쉬웠다. 이것은 북미의 뽕나무나 유럽-아시아의 단풍나무가 아니다. 구약에 나오는 여리고에는 다닥닥닥 붙은 집이 많이 있었으나, 신약 시대의 번창하던 도시 여리고에는 널찍한 교외 주택과 공원이 있었으며, 지붕보다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 더 쉬웠다.

19:5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해도 보통 스스로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경건한 유대인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의 음식을 먹는 것(예수의 말에는 이것 역시 암시되어 있다)을 몹시 싫어했을 것이다. 세금을 거둘 정도로 불경건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먹는 음식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신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그가 제공하는 음식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은 보통 선지자만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능력 — 예수님이 여기에서 삭개오에게 하셨듯이 — 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9:6-8 삭개오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배상을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과는 조화를 이루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와는(그리고 사실상 우리 시대의 견해와도) 달랐다. 배상을 하겠다는 약속은 그의 지능적인 범죄 역시 다른 종류의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중한 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22:1-4). 그가 약속한 배상은 바리새인의 율법에서 규정한 양보다 훨씬 많았다. 팔레스틴 법은 단지 훔친 소와 양을 죽이거나 판 경우 그리고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그 행동을 증거할 때에만 네 배나 다섯 배의 배상을 하도록 요구한다. 제자도에대한 고대의 기사를 보면 소유에 대해 급진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교사에 대한 분명한 헌신의 표시였다.

19:9-10 대부분의 유대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극악한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배제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에스겔 34:6, 11에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임무를 대신 수행하셨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참고. 솔로몬의 지혜서 6:16)


*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p. 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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