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애초에 이 글을 언제 써야 할지, 굳이 번거롭게 왜 써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저녁에 먹은 된장찌개가 내 속을 뒤집어 놔서 잠 못 이루던 중 래리 허타도 (Larry W. Hurtado) 박사가 영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관련 기사를 찾다가 도저히 못 찾아서 답답하다. 이왕 잠을 청하기는 글렀다 싶고 이참에 글이나 하나 쓴다. 그래 봐야 잡설이지만.

 

괴테가 "스승은 운명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내 경험에 비춰봐도 학생에게 선생은 운명만큼이나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나는 웨신 시절 과묵하게 공부밖에 할 줄 몰랐던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학문과 영성의 본을 보여준 교수님들을 만났고, 칼빈신학교(CTS)에서도 좋은 교수님들을 만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처지는 아니지만, 박사 진학 과정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는 "평생 스승으로 남을 지도 교수를 만나게 해주세요"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학문의 세계에 홀로서기를 하기 전, 내 잠재력을 끌어내 다듬어줄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원할 학교를 결정하기 이전에 학교별 교수진을 검색해서 박사 지도 여부를 문의하는 과정에서 많이 고민했고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왜냐하면 신학계의 거인이라 할만한 교수들이 전부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 학교에 가면 누구한테 지도받으면 되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휴...

 

현재 신약학계에서 웬만한 신학도라면 알 만한 거인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제법 넓은 범위를 수용하고 있는 연구 제안서를 가지고 있어도 평생 스승으로 삼을 거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신약학계를 뜨겁게 달구는 뛰어난 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관심사와 내 연구 주제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면 옥스퍼드대학교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신약학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최소한 지도해줄 수 있는, 그런 거인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분간 하워드 마샬 박사를 찾아 애버딘대학교에 가던 시절, 톰 라이트 박사를 찾아 세인트앤드류스를 가던 시절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 이 시점에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사람은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누가 앞으로 거인이 될 것인가?'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명의 박사는 수백 명의 학자들과 맞서 싸워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도 교수와 함께한다. 무엇보다 학생의 재능이 중요하지만, 그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지도 교수의 지원 사격도 중요하다.

 

지난주 지원 1순위 학교 합격 소식을 접하고, 수업을 마치자마자 게리 버지 교수 사무실로 찾아갔다. 내 합격 소식을 듣고 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네가 박사 지원을 시작할 무렵 얼마나 긴 학교 목록을 내게 가지고 왔지?"

 

감사하게도 지금 나에게 좋은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여러 고민이 있지만, 여전히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누가 내 인생에 남을 스승이 되어줄 것인가?'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영국 박사 과정 중 언젠가는 한 번쯤 만나 볼 거라고 기대했던 허타도 박사가 이 세상을 떠났다.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지만, 거인들이 떠난 그 자리에 누가 다시 우뚝 설 것인지 기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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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글을 쓰려면 대상 독자층을 정밀하게 선정하라는 원칙이 있다. 학생의 경우 채점자인 담당 과목 교수를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지원자의 입장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면, 위원회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그 학교 인재상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줘야 한다. 

모교에 지원하지 않는 이상 실제 위원회 구성원을 파악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다행히 학교마다 홈페이지에 교수진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원자는 교수진의 이력을 통해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반대로 잠정 지도 교수가 지원자에게 관심이 있고 합격할 확률이 높지만, 위원회 내부 사정이 만만하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수정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감사하게도 내가 지금 후자에 해당한다. 한동안 유독 까다롭게 구는 이유를 몰랐었는데, 현재 그 학교에 있는 몇몇 교수들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이건 정말 꿀팁이다.

Graduate School Personal Statement
https://mitcommlab.mit.edu/broad/commkit/graduate-school-personal-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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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신뢰성

성찰 2019. 11. 13. 07:27

1. 예언서
예언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예언자의 발화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예언자의 의미 해석과 청중을 향한 전달 방식을 고민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신탁을 받은 예언자는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자신의 신학과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통찰을 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언자의 해석을 거쳐 원 의미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더 하는 동시에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언자의 발화와 행위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청중의 상황에 따라 이해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예언은 후대 예언자에게 계승되기도 한다. 이때 후대 예언자들은 전 예언자들의 신학과 선포의 성취 여부 등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선포한다.

목자-왕 전승의 경우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의 용례가 전부 다르다. 셋 모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지만, 그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심판에 대한 견해도 다 다르다. 그 차이는 시대 변화에 맞추어 예언자들의 해석이 달라졌거나 계시의 점진성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려면, 역사적 배경과 기록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2. 복음서 
복음서 분야에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에 관한 연구로 Q의 존재를 가정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증언자들의 구두 전승은 공통 자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복음서가 기록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복음서가 예수의 사후 최소 40~5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전제로 인해, 인간의 기억력에 관한 연구로 유대 구두 전승의 신뢰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이 회의론자들에게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지만, 유대인에게 구두 전승을 암송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복음서의 신뢰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동일한 사건이지만 다른 기록의 존재는 저자의 신학이 원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원론을 주장하는데, 역사 기록 자체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복음서라는 장르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역사 그 자체를 기록한 게 아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복음서는 역사적 기록인 동시에 저자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3. 발화자와 기록자에 대한 이해
예언서와 복음서에 제기되는 문제는 대체로 발화자와 기록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출발한다. 해석자의 전제로 예언서와 복음서를 투영해서 분석하기 때문에 원래 의도에서 벗어난 문제 제기를 하게 된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시대착오(anachronism)라고 할거다.

4. 바트 어만(Bart D. Ehrman)
내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내가 볼때 어만은 사본의 변이를 추적하다가 길을 헤매어 회의주의자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상당히 경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복음서의 신뢰성을 주장하는 토론 상대에게 "당신은 근본주의자이며, 그러한 태도는 역사가로서 부적합하다"라던가 "잘못된 믿음에서 회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만이 많은 지식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설익은 상태라는 느낌을 받는다. 

[전승의 신뢰성]

1. 예언서
예언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예언자의 발화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예언자의 의미 해석과 청중을 향한 전달 방식을 고민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신탁을 받은 예언자는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 자신의 신학과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통찰을 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언자의 해석을 거쳐 원 의미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더 하는 동시에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언자의 발화와 행위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청중의 상황에 따라 이해는 또 달라질 수 있다.

예언은 후대 예언자에게 계승되기도 한다. 이때 후대 예언자들은 전 예언자들의 신학과 선포의 성취 여부 등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선포한다.

목자-왕 전승의 경우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의 용례가 전부 다르다. 셋 모두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지만, 그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심판에 대한 견해도 다 다르다. 그 차이는 시대 변화에 맞추어 예언자들의 해석이 달라졌거나 계시의 점진성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려면, 역사적 배경과 기록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2. 복음서 
복음서 분야에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에 관한 연구로 Q의 존재를 가정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최근에는 증언자들의 구두 전승은 공통 자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복음서가 기록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복음서가 예수의 사후 최소 40~5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전제로 인해, 인간의 기억력에 관한 연구로 유대 구두 전승의 신뢰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이 회의론자들에게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지만, 유대인에게 구두 전승을 암송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한다면, 복음서의 신뢰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동일한 사건이지만 다른 기록의 존재는 저자의 신학이 원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원론을 주장하는데, 역사 기록 자체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복음서라는 장르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역사 그 자체를 기록한 게 아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복음서는 역사적 기록인 동시에 저자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3. 발화자와 기록자에 대한 이해
예언서와 복음서에 제기되는 문제는 대체로 발화자와 기록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출발한다. 해석자의 전제로 예언서와 복음서를 투영해서 분석하기 때문에 원래 의도에서 벗어난 문제 제기를 하게 된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시대착오(anachronism)라고 할거다.

4. 바트 어만(Bart D. Ehrman)
내가 쉽게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지만, 내가 볼때 어만은 사본의 변이를 추적하다가 길을 헤매어 회의주의자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상당히 경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복음서의 신뢰성을 주장하는 토론 상대에게 "당신은 근본주의자이며, 그러한 태도는 역사가로서 부적합하다"라던가 "잘못된 믿음에서 회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만이 많은 지식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설익은 상태라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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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법 많다. 내 연구 범위에 한정해도, 에스겔의 예언을 스가랴가 발전시킨 흔적들이 발견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스가랴 1-8장이 에스겔 40-48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9-14장의 묵시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가랴 9-14장이 에스겔 34-37장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스가라가 에스겔 전통을 계승한 이유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모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는데,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이 은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 여러 면에서 이사야의 독자적인 위치가 눈에 뛴다.

현재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의 역할이다. 분명 요한은 이사야를 잘 알았고 그의 복음서에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견해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목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나 역시 연구제안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이사야 53장이 아닌 스가랴 9-14장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 나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 자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 희생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와 마태의 사례를 통해 그 같은 주장을 개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차후 이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복음 10장이 어느 본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히려면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를 다루면서 세 선지서 중에서 누가 요한복음과 가장 밀접한지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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