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국민학생 시절 변신 자동차처럼 어린이가 볼만한 주제를 다룬 과학 잡지를 구독하고, 피아노 학원과 글짓기학원에 다닌 기억이 있다. 분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머니의 교육열이 작용했다고 본다. 직접 물어 본 적은 없지만, 주위에서 창의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교육 과정에서는 암기력과 임기응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내 세대는 누가 더 많이 문제집을 풀었느냐로 대학이 결정되고, 선배로부터 족보를 확보했느냐로 학점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창의력'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신대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 3년을 거치는 동안 빡빡한 학점 이수로 버거운데, 교회 사역을 병행하노라면 공부와 친해질 기회를 얻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신대원을 마치고 교회에서 3년 정도 사역하다가 석사 과정에 진학하는 이유는 대부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서이다. 좀 더 도전해서 유학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영국 박사 과정 진학을 준비한 경험과 3년 동안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독창적 사고란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말하면, 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박사 과정을 진행하고 있어서,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당면한 과제이기도 해서 독창적 사고법을 고민하고 있다.

독창적인 사고의 시작, 지식 축적

독창적인 사고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학습자는 교수의 강의, 논문이나 글, 대화나 사색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 독서만큼 타인의 지식을 빨리 흡수하는 방법은 없다. 학문의 세계에서 주장과 반박의 근거는 자료인데, 자료 분석이 곧 독서 행위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독창적인 사고는 선행 연구 분석, 특히 연구 역사와 현재 논의 파악에서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독창적 사고의 기반은 다독(多讀)이라 할 수 있다. 독서량이 많다고 자연스럽게 독창적인 사고 능력을 갖추게 되지는 않는다. 독서량에 비례해 저장된 정보는 많겠지만, 정작 중요한 해석 능력은 별개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많다'는 의미를 독서량으로 한정하지 말고, 폭넓음을 가미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이 토대 위에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삼박자가 이뤄지면 적정 시점에 빛을 보는 때가 온다.

내 전공인 신약학(New Testament Studies)에서는 진영과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주석 시리즈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시리즈로는 Anchor Yale Bible (AYB), Hermeneia (HERM),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NIGTC),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PNTC), Word Biblical Commentary (WBC) 등이 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어느 주석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신학적 성향을 판가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에서 AYB와 HERM는 자유주의 진영에서나 보는 책으로 여겼다. 지금은 모든 자료를 공평하게 대하는 추세가 확산하고 있어서, 예전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내 경우 목회학 석사 시절부터 잡식으로 자료를 접하려고 노력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AYB와 HERM는 종종 까끌까끌한 느낌을 받는다. 둘 다 언어학적 분석과 역사 비평 등 방법론으로 풍부한 배경 자료와 색다른 본문 해석을 제시해 주지만, 가끔 저자의 전제와 주장에 내가 반감을 들게 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료 분석 과정에서 폭넓은 관점을 접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내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이질감으로 인한 반감이 반강제적으로 내 사고의 폭을 넓히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신학이란 학문과 신앙이 결부된 영역이라 순전히 특정 주장에 동조 혹은 거부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자료를 분석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기존 자료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학계 기여도는 기존 연구의 허점을 연구자가 제시하는 주장의 세밀함과 보완의 범위에 따라 결정되므로, 나는 내적 갈등을 글로 표현하여 학계의 빈틈을 메워주면 된다. 만약 내가 불편한 감정으로 인해 그 자료들을 덮어버렸다면, 나는 교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소지가 다분하고, 나만의 논리를 만드는 실력을 배양하지 못한 채 특정 진영에 갇힌 신학자로 성장했을지 모른다. 아, 아직 난 학생이다.

독창적 사고를 위해 필요한 지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답해 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발견되기도 하고, 제아무리 깊게 파도 아이디어조차 떠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아이디어를 발견해도 그 가치를 파악하지 못해 놓쳐 버리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검증해 줄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다. 내 경우 목회학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지도 교수의 강의에서 포착했고, 신학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고 그랜트 오스본(Grant Osborne) 박사의 BECNT 요한계시록 주석을 읽다가 발견했다. 내가 여러 선택지를 가지고 교수와 상담을 요청했으나, 나는 각 주제의 가치를 가늠하지 못했으며, 둘 다 지도 교수와 대화를 거쳐 최종 주제가 결정되었다.

독서량에 관한 내 경험을 말하자면, 한때 연간 100권 이상의 책을 읽던 시기가 있었다. 한창 절정일 때 3년 동안 40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는데, 분야는 자기계발, 경영, 경제, 신학 등 다양했다. 글쓰기 연습 겸 생각 정리를 위해 글을 쓰고 여러 경로에 공유하기도 했다. 독자의 반응이 괜찮았는지 몇몇 전문 기관으로부터 기고 요청을 받기도 했다. 이때가 20대 중반이었다. 그 무렵 서평단 활동도 열심히 했었다. 출판사의 요구대로 서평이나 후기를 남기기도 했고, 그와 별개로 기록 차원에서 글로 남긴 것도 많다. 신대원 과정에서 수업 자료 이외에 많은 자료를 읽었으나, 독서량이 성적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떤 과목은 재치를 발휘해 짧은 시간을 들이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고, 어떤 과목은 학기 중 상당 시간을 할애해도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개인은 노력과 성적을 통해 적정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감을 잡아야 한다. 이게 정말 어려운데... 달리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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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은 훈련으로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알고 있다. 독창성 계발을 위한 방법은 다양하지만, 신학 전공으로 이 주제를 접할 기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경우 논문 작성법이란 과목 이외에 독창성이란 주제를 다룬 수업은 없었다. 신학교가 교단을 모태로 한다는 특수성을 가져서 그런지, 교단과 교수의 입장을 얼마나 잘 계승/답습하느냐로 평가하는 분야가 신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설령 독창성을 중요시해도 학습자가 습득해야 할 기초 지식이 방대해서 박사 과정 학생도 끊임없이 선행 연구와 씨름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이 인정하더라도,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문화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온다.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문화

웨신은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모태가 교단이 아니다. 게다가 대학원대학이라는 형태를 갖고 있어서,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는 생존을 위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성경 주해를 주력 분야로 내세웠고, 교수들은 교리나 특정 신학을 강조하지 않고 학생의 창의력을 권면하는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래도 교수진이 합동, 합신, 고신 등 보수 교단 출신이라 암묵적 동의라는 게 존재했다. 비록 교수와 학생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다 해도 논리적 설득력이 있다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최신 연구 방법론에 능숙한 교수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목회학 석사 과정에서 본문비평, 내러티브, 텍스트 언어학 등을 배운 덕에, 박사 과정 지원을 위한 연구 제안서를 준비할 때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당시에는 겁 없는 도전이라 고생을 꽤 했다. 최근 연구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읽다 보면, 가끔 신대원 시절 교재였거나 과제였던 자료를 다시 보게 된다. 당시에는 열심을 냈으나 교수들의 수준 높은 강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놓친 부분이 많았음을 깨닫고 있다.

 

문화라는 측면에서, 나는 특혜를 받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대다수가 그렇듯이, 나는 독창성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국 신대원 석사 과정 시절부터 평소 궁금증을 연구 주제로 발전시키기보다는, 글을 읽으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를 연구 과제로 선택했었다. 간단히 말하면 평소 궁금한 게 없었다는 말이다. 더구나 애초에 성경 본문에 충실한 설교자가 되려고 공부에 매진했기에, 독창적인 사고보다는 바른 해석을 숙지하는 데 힘썼다. 강의나 글을 이해 못 하면 바로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내 머리 탓을 하며 혼자 골몰해서 답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옛말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웨신에서 5년가량 공부하면서 그 문화에 젖어 한국 사회, 특히 교단 신학교의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만난 타 교단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내가 예외적인 환경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나와 대화를 나눈 유학생들은 한결같이 연구 주제 선정과 자기주장을 힘겨워했다. 신학 분야에서는 보통 목회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유학길에 오르는데, 교단 사역자가 되기 위해 3년 동안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한국 교육 자체가 주입식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최소 19년!). 현지 생활 적응부터 쉽지 않은데 과목마다 교수가 "내 생각이 뭐냐?"고 물어대니 한인 유학생들은 벙찌게 된다. 교수의 질문은 학생에게 생각의 지평을 넓히도록 자극을 주지만, 이러한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한인 유학생은 맨땅에 헤딩하듯이 새로운 학습법을 익혀야 한다. 한국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대처했는데, 그들도 한국에서는 바닥부터 기어 올라와서 요령이 생긴 것일 뿐 처음부터 남다른 비법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만 해도 웨신에서 공부하는 5년 동안 매 학기 맨땅에 헤딩했다. 독창성을 중요시하는 학교의 문화는 혜택인 동시에 치열한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미국 유학 생활이 수월했냐고? 요령껏 대처했을 뿐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처음 알게 된 제도인데, 미국 학교에는 "independent study" 제도가 있다. 이와 관련해 Calvin College(현 Calvin University) 재학생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대학에도 해당 제도가 있다고 한다. 보통 4학년이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나 대학원 진학 준비로 선택하는데, 학점 이수가 쉽지 않아서 수업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이 제도의 혜택을 많이 봤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수업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짐작건대 미흡한 영어 실력이 큰 몫을 했다. 교수의 말은 제아무리 집중해도 20%가량 들리는데, 나머지는 소리의 파장이 귀 주변에서 맴돌며 상상력을 자극할 뿐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 교수가 느닷없이 질문할까 긴장하다가 당황하며 반응한 적도 있다. 다행히 성적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수를 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교수의 강의안을 외워서 시험을 치른 경험은 대학원 과정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했다. 전략상 미국 석사 학위 취득 후 영국 박사 과정에 진학하려고 했기에, 샘플 페이퍼와 연구 제안서를 준비하려고 independent study를 선택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연구 주제 선정부터 페이퍼 제출까지 전 과정을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만큼 성과가 컸다. 강의를 듣지 않으니 수업료가 아깝지 않냐고 하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이 있었는데, 단언컨대 독창성을 훈련하고 내 학술적 역량을 극대화하는데 independent study만큼 유용한 제도가 없다고 할 만큼 후회가 없다.

 

게리 버지(Gary M. Burge) 교수와 인연은 내게 중요한 경험이다. 버지 교수는 타고난 강연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는 고 하워드 마샬(I. Howard Marshall) 박사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는 기독교계의 하버드로 불리는 휘튼대학(Wheaton College)에서 25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의도하지 않게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페이퍼를 두 번이나 제출했는데, 매번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면서 "A"를 주는 포용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격려와 강력한 추천서 덕분에 영국 대학교 박사 과정 진학 문의 과정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대부분의 학교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영국 학교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이곳이 학생의 '독창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입학 절차에서 의무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고, 지도 교수와 대화를 해봐도 학생에게 독창성을 요구한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문화의 힘은 크다. 독창성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독창성을 훈련하기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문화는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학점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면, 반강제적 요인이 있다고 쳐도 말이다. 혹여나 독창성을 훈련하고 싶으나 마땅한 환경을 갖추기 쉽지 않다면, 외부적으로 독창성을 자극하는 환경에 자주 노출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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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박사 과정 등록을 위해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과목 가운데 "Research Integrity Training"이 있다. 대학원 의무 교육이라고 하니, 석사 과정이나 박사 과정 신규 입학생은 모두 이수해야 한다. 이 과목은 표절, 저작권, 출판 등 연구 윤리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다. 핵심 요지는 연구자의 덕목은 독창성(originality)이며, 연구자로 성장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학생은 독창성을 저해하는 행위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박사 학위 과정을 시작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 학위가 학계/현장에 독창성으로 이바지했다고 인정될 때 주어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즉 박사 과정 학생에게 독창적인 주장은 숙명과 같다. 학위 취득 이후에는 자신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그전에는 독창성을 최우선 순위로 두어야 한다. 박사 학위 과정에서 독창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박사가 독립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독창성의 의미

여기서 다루는 주제인 '독창성'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넓은 뜻에서 독창성은 모방이나 파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성과 고유의 능력에 의해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술 분야를 비롯하여 인간의 정신문화 창조 전반에 적용되는 평가의 기준이다. 독창성의 의미는 이 용어를 좁은 뜻으로 사용할 때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협의의 차원에서 독창성이란 예술 창작의 모든 측면에 있어서 모방이나 표절 등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고유의 힘과 개성에 입각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성향이나 성질을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창성 [獨創性, Originality, Originalité]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국학자료원)

한 주제로 관련 논문이나 책을 읽어보면, 저자는 다른데 내용은 비슷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선행 연구 분석에서 그런 경험을 자주 하는데, '독창성'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짜깁기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하는 부류도 있으나, 저자 스스로 기존 자료를 분석해서 자신의 언어로 써도 엇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참고 자료가 비슷하면 그런 결과가 나올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도 여기서 저자가 직접 기존 자료를 분석하고 자신의 언어로 새로운 주장을 전개할 토대를 준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독창성이란 말에서 전일무이한 주장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의외로 독창성을 발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흔한 방식은 연구 방법론을 바꾸는 것이다. 연구자가 직접 창조하지 않아도, 다른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론을 자신의 영역에 적용하면 그 자체로 새길을 열었다고 인정받는다. 가령, 내 전공 분야인 신약학에서는 문학 이론을 적용하는 게 주요 흐름 중 하나이다. 아니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방법론을 채택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다듬어도 된다. 연구 방법론에 기여가 있다고 해서 학위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방법론은 결국 후속 연구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방법론을 강조하는 것이다.

독창적이라고 해서 모든 주장이 새로울 필요는 없다. 선행 연구와 다른 한 가지 주장을 내세울 수 있으면 그로 족하다. 당연히 그 한 가지 주장을 발견하고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는 작업 자체가 고역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많은 인재들이 박사 과정에서 좌초하는 이유가 대부분 여기에 있다. 여유롭게 남 말하듯 글 쓰는 거 아님...

지금은 누구나 '독창적 사고'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마냥 학습자를 탓할 수 없는 게,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암기력과 임기응변이 뛰어난 학생이 후한 평가를 받는다. 고등 교육으로 분류되는 대학교 역시 그렇다. 대학원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더 문제는 학생이 자신의 주장을 따르길 바라는 교수가 있다는 사실이고, 일부 학생은 그러한 교수의 입장을 거스를 생각이 없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라 '독창성'으로 글을 써보지만, 내가 남모를 특별한 비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작년에 대학원 동기 목사님과 연구 주제에 관해 대화하다가, 나는 "내가 어떻게 연구 주제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우연히 발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분의 반응은 "연구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우연이 아니더라."이었다. 그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모처럼 빛을 발할 순간에 내 기억력은 이 모양이다. 이 놈의 기억력...

그분의 말대로 연구 주제를 스스로 찾았다는 사람은 그 계기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그 우연이 반복된다면 일종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질문을 품으며 독창성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성과를 인정받으며 박사 과정까지 성공적으로 진학했다는 점에서 내 직·간접 경험을 통해 독창적 사고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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