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4Q504에 관한 첫 글이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미래 지향적 해석"이었는데, 후속 글이 견해를 뒤집는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과거 지향적 해석이다.

4Q504 1-2 frag. Col.Ⅳ를 읽으면, 다소 우세한 입장대로 다윗 언약을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뒷부분인 Col.Ⅴ를 읽으면 다윗 언약은 과거 사실의 역사적 진술이 된다. Col.Ⅴ는 생명수 샘 (Source of living water)의 파괴를 말하는데, 이곳은 Col.Ⅳ에서는 시온이다.

Col.Ⅳ에서 다윗 언약과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을 다루었다면, Col.Ⅴ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를 다룬다. 다윗 언약은 역사적 진술의 일부에 해당하며, 따라서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 관점에서 생명수 샘은 목자 은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서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는데, 덕분에 다윗 언약에 관한 해석의 기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참고 자료는 앞뒤로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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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 아닌 파편으로 남아 있는 쿰란 문서 해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은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4Q504는 기도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혹자는 4Q504가 기원전 2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패턴화된 기도문이라고 한다. 기도라는 장르는 본문 해석의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 즉 본문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해석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단순히 과거 사실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 목자, 백성의 왕자가 되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진술한다. 또한 열방은 그의 영광을 본다.

이 진술만 보면 역사 진술(과거)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도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윗 목자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다윗 목자를 왕자라는 단서와 함께 고려하여 에스겔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다수인데, 차후에 특이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대세를 따라도 무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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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미가의 기도(8-20절)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14-17절)가 나타난다.

미가의 기도는 대적을 향한 심판으로 시작한다 (8-13절).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논쟁과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광명에 이르는 길이요 공의의 실현이다 (11절).

성벽 건축은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11절).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온다 (12절).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머물렀던 타지는 심판으로 인해 황폐하다 (13절).

이제 미가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목자 은유가 시작된다.

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주의 백성은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와 같다. 

갈멜은 풍요로운 지역의 상징으로, 목자들에게는 최상의 목초지로 여겨졌다. 이 사실은 갈멜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했던 한 사람의 예에서 명백해진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심판 선포에서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훔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암 1: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사 33: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반대로 회복 선포에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 역시 그 지역이 갖는 풍요로움이라는 상징성 때문으로 보인다.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또한 양 떼가 홀로 갈멜에 있는 이유는 그 지역이 안전지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암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미가의 기도에서 갈멜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예레미야의 선포를 인용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렘 50: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갈멜은 양 떼에게 최상의 목초지이자 안전지대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삼림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즉 양 떼에게는 목자가 없다. 그래서 미가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라고 간청한다.

미가는 이 양 떼를 "주의 기업의 양 떼"라고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시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다. "옛날 같이"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미가는 목자 은유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간청하고 있다.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의 또 다른 특징은 출애굽 모티프와 결합에 있다.

15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목자 은유와 출애굽 모티프의 결합은 목자의 '인도'와 '보호'라는 역할과 출애굽의 '구원'이라는 상징이 잘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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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일리아스』에서 '목자'의 용례는 세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전투 장면(과 관련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문자 그대로 목자와 관련된 진술이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사용한 목자의 용례 중 첫 번째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호메로스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백성들의 목자'라는 칭호를 빈번히 사용한다. 이 칭호는 총 39회 사용되고, 총 19명에게 적용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과 관련된 내용이라 생략한다.

호메로스의 '백성들의 목자'라는 칭호가 중요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 왕을 목자로 비유하는 사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용례를 통해 고대 그리스 사회에 목자-양 비유 혹은 목자-왕 전승이 존재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호메로스는 전투 현장을 생생히 묘사할 때 목자-양 비유를 사용한다. 다음은 그 사례 중 일부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 주목하라.

튀데우스의 아들은 다시 한번 선두 대열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안 그래도 그는 트로이아인들과 싸우고자 진작부터 기세가 올라 있었는데, 이제는 무려 세 배의 기운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들판에서 털복숭이 양 떼 곁에 있던 목자가, 울타리를 뛰어남은 사자에게 생채기만 입힐 뿐, 제압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사자의 힘만 돋워놓은 채 막아내지는 못하고, 우리 안으로 숨어들어 가니, 버려진 양 떼는 겁에 질려 도망친다. 양들은 서로를 향해 무더기로 쓰러지고 달아오른 사자는 마당 깊숙한 곳에서 부터 뛰쳐나온다. 꼭 그런 모습으로, 강력한 디오메데스는 작정하고 트로이아인들에게로 섞여 들어갔다. 5. 134-143

그가 이렇게 말하자 빛나는 눈의 아테네는 디오메데스에게 기운을 불어넣었고 그는 닥치는 대로 살육하기 시작했다. 칼에 맞은 자들에게서는 지독한 절규가 치솟았고,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목자 없는 염소 떼나 양 떼에게 사자 한 마리가 독기를 품고 다가와 뛰어오르듯이, 튀데우스의 아들은 트라케인들에게 다가와 열두 명을 쳐 죽였다. 10.482-488

세 번째로, 호메로스는 실제로 목자 혹은 양과 관련된 사건을 서술하기도 한다.

양떼를 많이 둔 퉤에스테스 2.106

노토스(북풍)가 산꼭대기에 안개를 쏟아부으면, 목동에게야 좋을 리 없겠지만, 3.10-11

이 육중한 소리는 멀찍이 떨어진 산속 목자의 귀에도 들린다 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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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1권과 4권, 이렇게 단 두 곳에서 나타난다.

1권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위해 "양과 목자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에게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양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이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기술과 보수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며 양을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기서 목자-양의 관계가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4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목자를 언급하지만, 이곳에서는 목자-양 유비가 아니라 목자와 개의 관계를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불의한 일에 대해 목자가 개를 부르는 것은 이성적 추론을 통한 통치를 의미하며, 개가 목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국가의 보조자들이 통치자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자와 개는 통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목자와 개의 관계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변형이 있으나,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적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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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가 나타나는 본문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이다. 이 논쟁의 화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트라시마코스느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소크라테스는 "전문지식은 강자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약자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한다"는 말로 반박한다.

자신의 주장이 전복된 상황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양과 목자를 언급하며, 목자가 양을 목양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양 치는 기술은 그 대상인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을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감정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부분에 한정하면, 내가 볼 때 소크라테스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그는 그저 현실감각이 뒤처지는 논리 이상주의자라는 인상을 준다.

내 역할은 일차적으로 이 대화에 나타난 목자-양 유비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타난 플라톤의 저작이 가진 특징을 서술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유대 문헌과 비교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굳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할 필요가 없으니, 이 정도만 언급하고 내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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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미노스』에는 목자가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 용례는,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왕으로 미노스를 칭송하는 이유 중 하나로 호메로스가 훌륭한 장군을 "양 떼의 목자"라고 부른 용례를 제시한다. 두 번째 용례는, 배분자 혹은 적임자의 사례 중 하나로 목자를 언급한다. 양 떼를 가장 잘 양육하는 사람은 목자이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법은 왕이 적임자라고 말한다. 두 용례 모두 목자-양 유비를 왕 혹은 지도자와 연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저작에서 목자-양 유비를 예시로 사용되었을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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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via de Luise, “L’età dell’oro e il rovesciamento del mito del buon governo nel Politico di Platone. Una lezione sull’uso dei modelli,” Plato Journal 20 (2020): 21–37.

윗글은 이탈리아어로 작성되었다. 영문 제목은 "The Golden Age and the Reversal of the Myth of Good Government in Plato’s Statesman: A Lesson on the Use of Models"이고, 한국어로는 "플라톤의 정치가에 나타난 황금시대와 좋은 정부 신화의 전복: 모델 사용의 교훈" 정도가 되겠다. 이 논문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의 목적이 논문 요약이 아니라서 축약도는 떨어진다. 

저자는 크로노스 신화의 시대를 '황금기'(the golden age)에 비유한다. 그녀의 해석에 의하면, 호메로스의 왕권-목축 사회(kingship-pastoralism)은 구시대 제도(an archaic scheme)이며, 크로노스 신화의 신성한 목자 (divine shepherd)와 달리 현재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해야 하는 시대이다. 신화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드러내는 기교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훌륭한 국정운영(good governance)은 목양 기술(the art of shepherding)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국가론』의 철학자에 대한 논의하며, 『정치가』에서는 철학자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크로노스 신화가 헤시오도스 신화, 즉 『신들의 계보』 혹은 『신통기』와 비교되며, 플라톤의 독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녀의 해석에 의하면, 『정치가』에 진술된 신화 갱신은 헤시오도스의 사관(역사는 쇠퇴하는 방향으로 흐른다)과 플라톤의 사관(인류는 진보한다)의 대조를 보여준다. 기술은 신성한 재능 (divine gifts)이다. 

정치인은 신이 아니며 목자가 아니다. 왕과 정치가를 목자로 인식하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왕과 정치가는 목자가 아니다. 오늘날 시민은 신화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정운영은 목자의 먹임이 아닌 양육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양육자(caretaker)를 신화처럼 목자로 보면 폭군이 등장하게 된다.

그녀는 『국가론』과 『법률』를 토대로 『정치가』를 보면 크로노스 시대의 종말은 곧 신성한 목자 시대의 종말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녀는 패러다임 사용의 이점과 한계를 지적한다. 신화는 신성한 목자 모형에서 정치권력으로 이동한 현실을 반영한다. 

정치학의 패러다임은 직조(weaving)이다. 『정치가』는 정치학의 예술/기술에 집중해서 다룬다. 왕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질서정연한 체계에는 자율성이 요구된다. 오늘날 필요한 국정 운영 모형은 목자 모형이 아니라 기술 모형이다.

황금시대의 신성한 목자 신화는 부정성과 긍정성을 둘 다 갖고 있다. 부정적인 효과는 "왕족" 남성에 대해로 정치가를 명령의 위치에 있는 신의 위치로 올려놓게 된다.  긍정적인 효과는 무리의 이익을 지향하는 "돌봄"의 모형을 제시한다.

국정 운영은 기술적이며, 비신화적 요소의 쇠퇴를 요구한다. 시민의 신뢰와 협력이 요구된다. 시민은 신성한 목자의 인도에 기대어 자신의 의무를 무의식적으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 논문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플라톤이 신화를 사용한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저자의 본문 이해와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몇 가지는 재고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신성한 목자 모형에 관한 견해이다. 저자는 제족에 '전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학계의 대세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을 따라가 보면 과연 '전복'이란 단어가 적합한지 의아하다. 후반부에 신성한 목자 신화의 양면성을 지적하면서, 목자 모형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볼 때, 플라톤의 정치가에서 행인(the stranger)과 젊은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내 해석에 의하면, 플라톤은 신성한 목자에 관한 시민의 인식을 '전복'하지 않고, 교정 혹은 재정립하고 있다. 가령, 플라톤은 목자에게서 돌봄의 기술(the art of caring)을 토대로 정치가의 덕목을 유추해 낸다. 내가 볼 때, 저자는 이런 흐름을 인식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목자 모형이 '전복'된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는 이상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또한, 그녀의 의도대로 플라톤이 패러다임을 사용하는 이유와 그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플라톤이 목자 모형에서 직조 모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가 덧붙여지는데, 그 이유는 단일 모형으로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덕목을 진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신성한 목자 모형을 재인식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된 플라톤 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플라톤은 생전에 왕정(Monarchy)이 아닌 공화정(Republic)을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이 왕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정치가의 덕목에 집중하는 이유는 크로노스 신화와 같은 왕정 국가의 왕권 사상은 과거이며, 그의 현재는 공화정 체제에서 다수의 정치가가 활동하는 시대에 이상적인 국정 운영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상적인 정치가의 덕목을 진술하면서 시민의 역할도 강조한다. 이러한 국가 체제와 정치 기술의 변화에 따른 국정 운영 기술의 변화는 마땅히 시민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군데군데 『정치가』 내부가 아닌 『국가론』과 『법률』에서 논증을 가져온다. 내가 볼 때 플라톤의 저작이라 하더라도 필수적인 논증에 도움이 되는 활용은 아니다. 달리 말해  정치가의 논리로 서술할 수 있으며 내부적으로 불필요한 논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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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via de Luise, “L’età dell’oro e il rovesciamento del mito del buon governo nel Politico di Platone. Una lezione sull’uso dei modelli,” Plato Journal 20 (2020): 21–37.
https://impactum-journals.uc.pt/platojournal/article/view/2183-4105_20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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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앞서 내 관심사는 목장-양 비유이며, 플라톤의 『정치가』에서는 신적 목자(divine shepherd)와 관련된 부분에 해당하므로,  이 글에서 다룰 저작의 저자가 주목한 정치가의 역할은 최소한으로 다룬다.

Jeffrey J. Fisher는 자신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Jeffrey J. Fisher, “Statecraft and Self-Government: On the Task of the Statesman in Plato’s Statesman,” Ergo: An Open Access Journal of Philosophy 9/27 (2022): 702–726를 보라.

과거 크로노스의 시대는 신적 목자의 시대였으며,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목자를 따르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우스의 시대이며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급자족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정치가를 신적 목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치가들이 실패하고 있다. 인간은 무기력한 양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크로노스 신화의 결론은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을 마치 목자처럼 대하는 것이 실수라고 폭로한다. 정치가를 목자로 간주하는 사고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 사고였으며, 특히 호메로스의 저작에서 "shepherd of the people"이란 문구가 그 예이다. 신화를 우주를 모방하므로, 오늘 우리는 지금의 우주를 모방해야 한다. 즉, 크로노스 신화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이어 정치가는 법 제정을 통해 시민이 하나가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나는 그의 논리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만, 최소 두 가지는 동의할 수 없다. 첫 번째는 과연 플라톤이 목자 모형의 무용론을 주장했는가이고, 두 번째는 폭군에 대한 간과이다.

1. 플라톤이 목자 모형의 무용론을 주장했는가?
앞으로 내가 몇 번 더 플라톤의 『정치가』를 정독해야겠으나, 현 내 이해에 의하면 플라톤은 목자 모형의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목자 모형의 한계를 주장하며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행인은 목자의 역할에서 '먹임'(feeding)이 아니라 '돌봄'(care)에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신적 목자가 아닌 인간 돌보미(human caretatker)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크로노스 신화에서 드러나듯이 플라톤은 신적 목자를 긍정한다. 다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적 목자의 한계를 이상적인 정치가로 보완해야 할 뿐이다.

2. 두 번째는 폭군에 대한 간과 
저자는 정치의 실패가 시민이 정치가를 신적 목자로 간주하는 현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폭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가의 권력 남용이나 통치자의 한계를 지적하지만, 플라톤이 언급한 폭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저자는 결론부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를 언급해 『정치가』 이외의 외부 사료를 통해 실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볼 때, 폭군은 목자 모형을 넘어서 이상적인 정치가를 논의하는 주요한 동기이다. 폭군에 대한 논의 없이는 플라톤의 논의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크로노스와 제우스의 대비와 목자와 폭군의 대비는 플라톤의 논리 전개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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