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현실적 상황이 변하면 그에 맞추어 사고방식도 변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까지 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바꾸어야 할 대상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적용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현실적 상황에 따른 신앙의 변화를 지탄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사역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다. 교회성장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권력과 물질적 안정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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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소명을 통해 야훼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계획에 대한 고유한 지식을 갖게 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놓고 자신의 신앙과 지성의 전력을 다해 씨름하게 되고, 독특한 신앙관을 구축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소명은 예언자가 독특한 신앙관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선포는 시대정신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시대의 이단아로 낙인 찍히게 되고 처절한 고독을 경험해야 했다.

신학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목회자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건강한 교회'가 아닌 '성장하는 교회'에 열중한다. 궁극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성장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는 아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목회자가 공개적으로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나 상담 등을 통해 신자들이 신앙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려면 예언자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목회자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에는 예언자적 사명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예언자적 사고는 목회자의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에게서 예언자적 사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자신에게 예언자적 소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러한 의식의 부재는 예언자적 사고의 종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현실에서 예언자적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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