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예레미야서는 역사적 기술 가운데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을 기록하여, 당시 삶의 현장에서 선포한 예언들의 성격과 예레미야의 차별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다. 내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갖는 인상들은 아래 글에 담겨 있다.

예언자의 현실 감각

예언자의 자질


이 글에서는 대다수 관료들과 예언자들과 달리 바벨론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예레미야의 현실 감각에 견주어 이사야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 진술로 서술된 예레미야서와 달리 이사야서는 예언이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사야의 역사적 단편은 부분적이며,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히스기야 왕과 관련이 있다.

내가 볼때 이사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가장 심하게 겪은 예언자이다. (차후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음) 많은 예언서들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이라는 주제가 이사야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후반부로 갈수록 이스라엘의 회복, 특히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 전문용어로 Davidic Messianism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유래 없는 진술들이 나온다. 그 중 하나는 고레스 왕에 대한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진술이다.

1. 하나님의 목자, 그의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 왕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목자는 대체로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기름부음은 왕과 제사장에 해당하는 특정 계급의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방 왕 고레스에게 전례 없이 이방 왕에게 "내 목자"와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 받은"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방인들을 하대했던 이스라엘의 문화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러한 이례성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 동안 다윗과 같은 메시아적 인물을 통해 성전 재건이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방 왕 고레스를 통해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전승과 믿음을 극복하여 고레스를 다윗과 같은 메시아적 왕에 견줄 만한 인물로 묘사한다.

2. 고난받는 종
선행연구에서 '고난받는 종'의 정체에 관한 견해가 갈린다. 나는 이 용어의 실제 대상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스룹바벨이라고 보고 있다. (차후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음)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러한 행적은 그로 하여금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이라는 유대 메시아 사상에 충족할 만하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성전 재건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 인물의 죽음에 감정 이입되어 시적 표현을 남겼다고 여겨진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는 급격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인물의 죽음 이후 다윗과 같은 메시아의 등장이라는 기대는 급격하게 누그러진다. 이사야 조차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귀환 공동체의 현실은 더욱 나빠졌다. 이전에는 번제를 열심히 드리는 행위라도 있었건만(1:10-13), 이제는 안식일 조차 지키지 않는다(56:1-7).

이러한 현실에서 이사야는 자력갱신의 가능성이 없는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현실을 지켜보고, 끝내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게 된다(66:22).

이 두 가지는 이사야가 유대 메시아 사상과 관련한 이상과 현실에서 겪은 생소함과 난이함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게 되고, 그 결과로 오직 이사야서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신학 사상을 도출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통해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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