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여전히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신칭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교회나 학계의 입장에서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바울을 그 근거로 사용한다면. 개인적으로는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차후라도 연구해 볼 생각이다. 작년에 잠시 연구하며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다만 최근 들어 이슈트래커로 지적 흥미거리를 찾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특히 논문을 써야하는 입장에선 최신 경향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성서학을 전공하는 본래 목적인 "교회를 위한 신학, 성도의 삶을 위한 말씀 연구"에는 부합하지 않다. 실제로 직장과 교회를 아울러야 하는 평신도들은 이슈트래커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경말씀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적용이라는 두 기둥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다. 복음은 불변하다. 물론 복음의 해석은 달라질수 있다. 엄밀히 말해 해석자들의 실수는 교정되어야 한다. 바울의 새 관점은 이러한 노력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에 정통하지 않은체, 새 관점을 파고 든다면 그 노력은 헛되다. 복음전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전통에 정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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