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뉴스앤조이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1)"


"기독교의 신 관념은 나에게는 악마의 관념입니다. … 천사나 인간을 창조하여 밤낮으로 영구히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신일까요?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그리고 야만적인 허영심을 가진 전제 군주자의 모습이지요."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 관념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기존의 신 이해에서 새로운 신 이해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 새로운 신 개념에 대한 가장 큰 알레르기 반응은 절대적 초월자, 전지전능한 하나님, 초자연적인 신이라는 고정 관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예컨대,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그걸 해결 못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한 해결 능력이 있으심에도 단지 미천한 우리에게 당신의 더 크신 뜻을 알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신은 자비하지 않은 존재다. 적어도 세계 안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그냥 죽고 마는 현실이 있잖은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야만 했던 어린아이와 여자들도 무수히 죽어 갔던 현실은 부지기수다. 인류사의 비극에 속하는 전쟁 및 인종 대학살이나 최근의 아이티 참사 같은 고통과 비극의 사건들은 지구 역사 이래로 그렇게 드물었던 사건도 아니다. 전쟁과 폭력과 재해로 인한 삶의 고통과 비극들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부터 국가 사회와 전 세계 지구 역사 도처에 널려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라면 세계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해결했어야만 했는가? 결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미천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죄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돌려 버리기 일쑤다. 즉, 마침내 설명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는 압박이 가해지는 실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지(不可知)라고 해도 끊임없이 모색해 보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탐구 자체마저 봉쇄시켜선 안 될 것이다. 어차피 보수 근본주의자들이든, 온건 복음주의자들이든, 진보 기독교인들이든 간에 모두 다 저마다의 한계 인식들 가운데서 제각기 모색해 나가는 현실인 것이다. 흔히 말하길, 하나님한테 사람의 잣대를 적용시켜선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교인들 역시 그 같은 명제의 적용에서 결코 예외일 순 없다고 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직 하나님만 홀로 영광 받으소서"의 실체가 결국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지만, 현실에서 정작 영광 받고 있는 분들은 알고 보면 교회 계급 종사자들일 따름이다).

찰스 하츠온 및 그의 종교 철학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과정 신학자들은 말하길, 현실 세계 안의 악과 고통의 문제와,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하다는 관념은 애초부터가 서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혹은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신정론>[이문출판사, 2007] 참조) 이미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논제를 놓고서 이에 대해 억지스럽게 집착해 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길, 신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은 신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식의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독교 신앙의 체계로는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소통과 기능을 아예 무시하는 점들이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쓰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표현하는 성서 구절도, 실은 그 시대적 상황의 한계가 반영된 것과 더불어 사실의 차원보다는 고백의 의미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옛날에는 고백의 차원도 그 자신한테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그 옛날의 고대인들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자명한 이치인지라,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해서도 또다시 새롭게 말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무신론자의 주장들

얼마 전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이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무신론적 상황에 공감하고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존의 유신론이 너무나 낡아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기존 유신론자들의 신 관념은 전적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완전자로서의 신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에 대해 <만들어진 신>에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도킨슨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무신론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들을 거리낌 없이 무신론자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살육과 폐단과 미신적 행위들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들을 해 대고 있다. 인류사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부정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온건한 보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반론이랍시고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짧은 반론서를 펴냈지만, 내가 볼 땐 제대로 반박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이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맥그라스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유신론적 신관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 그리고 도킨스가 공격한 기존 유신론이 어떤 유형의 유신론이었는지를 제대로 분석해 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인 도킨스의 글이야말로 훨씬 더 훌륭했을뿐더러 솔직한 만큼이나 매우 힘 있는 명문들로 즐비했다고 본다.

나는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미리 말한다면, '전(前) 이성'의 차원에 있는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는 좀 더 이성적인 무신론 진영이야말로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적어도 비교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신은 있다'와 '신은 없다'라는 점에 대해 논증적으로 직면할 수 있고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신학자든, 목사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비껴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이 뭔가? 바로 기존의 기독교 유신론을 폐기 처분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가!

2,000년 동안 전통화한 습관은 무섭도록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가족들과 교회 환경 및 사회 문화까지 지배함으로써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유신론 사상에 미련을 두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제발 원컨대 미련 없이 폐기 처분해 버려라!

기존의 유신론, 신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폐기 처분하라!

기존 유신론의 신 관념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정복적이고도 조잡스런 신 관념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는 성서 안에도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 여자와 아이와 유아들까지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들을 깡그리 말살하라는 성경 구절들(신 2:31-35 ; 수 6:16-21, 10:39-40, 11:11-15 ; 삼상 15:1-3 등등)에 대해 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고 제대로 솔직하게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거의 없다. 성경에 그토록 나오는데도 그 같은 구절들은 차마 피하고 싶은 껄끄러운 구절들일 따름이다. 어차피 성경 구절들도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잖은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저 할 수 있는 구차한 얘기라곤 결과적으로는 천국의 보상을 위한 시련과 연단의 의미일 뿐이라는 식의 별로 현실성 없는 자조적 위안으로써만 얘기해 줄 따름이다. (물론 그런 식의 자위도 어떨 땐 필요하다곤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입에서나 정당화할 수 있을 뿐, 지구 역사 이래로 이 땅에 무수히 그리고 무참히 죽어 갔던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의 생명들 앞에선 한낱 기만적이고 사치스런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한다. 신이 전능하다고 보는 건 분명한 '망상(delusion)'이다. 혹은 신은 자비하다는 쪽이 망상이거나.

고대로부터 형성된 신 관념은 다신론, 유일신론 등등 이러한 유형으로도 나뉠 수 있긴 하지만 이른바 '신(God)'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 어떤 절대자, 완전자, 초월자로 이해하는 관념 역시 서구 기독교 사상사 안에 깃들어 왔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고대 히브리 역사의 이해에서 출발하였으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그 보편적 해석의 체계를 쌓아 가면서 그리스 철학의 이론을 통한 해석학적 토대와 그 기준들을 마련해 갔다.

이러한 신론 확립의 과정에서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노스의 '일자(the One)' 개념을 나름대로 받아들여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을 세웠다. 이를 기독교의 신 관념에 적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직 신학적 신론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를 체계화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신학적 작업에 속했다. 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의 창조자이자 가장 궁극적인 원인자이면서 그 자신만큼은 완전무결하여 현실 세계의 인과적 영향들에 대해선 초월적이고 독립적인 자존자로서 정식화한 것이다. 무례하게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잖은가.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이 표현에 대한 다른 히브리어 해석을 참조하려면 김이곤, <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pp.52~56을 보라)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 변증가들이나 교부들 및 중세 철학자들은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들을 해석하였고 서구 교회의 신앙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같은 조직 신학적 신 관념들은 루터와 칼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구 교회와 한국교회 현장에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에 대한 지배적인 고정 관념으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다. 적어도 기독교 주류는 이 같은 조직 신학적 신론의 하나님 이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성경 공부 교재를 통해 배우고 있는 하나님 이해는 바로 이러한 신 관념들에 맞춰져 있다.

종교 철학자 찰스 하츠온은 전지전능으로서의 신, 절대적 군주자로서의 신, 완전 불변의 신 개념들은 오류가 있는 개념이기에 폐기되어야 할 신 관념으로 꼽고 있다. 마찬가지로 과정 신학 진영의 경우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심판의 주제자이자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개념 및 가부장적 유형으로서의 남성적 신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들은 하나같이 신에 대한 구멍 뚫린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특히 종교의 경우에 있어선 이론적 오류라는 사태가 결국은 폭력의 자행이라는 실천적 사태로 손쉽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종교라는 것이 우리네 삶의 전반을 가장 강력하고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는 기제이기 때문에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의 경우 신앙을 지배하는 이론적 신념들이 그저 이론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의 생활 전반에 깊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에 속한다. 게다가 종교라는 분야는 초창기 성립된 이론이나 정식화한 교리에 대해선 웬만해선 이론적 수정을 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리하여 이론적 반성과 수정이 안 될 경우 그로 인한 비극적인 폭력 사건들은 반복적으로 되풀이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사는 기독교 폭력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어디 한번 살펴보자. (다음에 계속됩니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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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제중에서 세 가지를 택하여 작성한후 제출하시요.



1.
종교개혁적 Sola Scriptura

 

2. 종교개혁적 이신칭의

 

종교개혁적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유명한 구호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이라는 말은 칭의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칭의론은 우리가 가진 교리 가장 중심적인 교리, , , 교회의 이라고 루터는 표현한다. 1537 논쟁에서 칭의에 관한 조항은 선생이요, 영주요, 주요, 인도자요, 모든 교회 교리가 증명하고, 유도하며, 우리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교리를 판단하는 심판자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에 대한 언급 앞에 놓인 지평이 바로 임박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루터에게는 어떻게 인간이 심판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다. “칭의에 관한 조항은 옳게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칭의 조항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과 나뉘어져서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전개하는 것만이 칭의론을 바르게 다루는 것이다.

신앙은 오히려 모든 자신의 행위와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파하는 것이며,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가능하다. 칭의는 신앙으로, 다시 말해서 신앙의 형태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존하시고 신앙은 보물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에서 그리스도는 현존한다. 이것이 칭의를 결정짓는 내용이요 인간의 중생의 근거이다.

루터는 칭의가 죄로부터의 무죄 선고이며 동시에 갱신이라는 둘의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특별히, 빌프리트 요에스트는 루터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진술들은 있는 그대로를 서로 불가분리의 연관성 속에서 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전체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죄인이요, 동시에 의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찬가지로 신적인 칭의와 의롭게 함을 얻었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의인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 인간에게 행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함을 언제나 주장했다. 여기서는 오직 믿음만이 칭의를 얻기에 타당한 것이다.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루터는 행위의 필연성 확신했다. 행위는 구원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루터에게는 행위의 의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칭의와 연관된다면 행위를 강조해서는 된다.

사실 루터는 행위가 없다는 것은 신앙이 죽은 것임을 말한다고 가끔 설명한다. “믿음에 대하여라는 논쟁에서 그는 만약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으며, 단지 죽은 믿음임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칭의론에서는 참된 신응은 게으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와 뒤따르는 것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확인하고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가끔 루터는 가지 칭의를 구분하고 있다. 팔라디우스와 틸레만의 박사학위 논쟁에서 성경은 가지 칭의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요, 다른 하나는 행위를 통한 세상 앞에서의 칭의이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루터는 전적으로 바울 그리고 바울적인 의미로 해석된 복음서를 인용하여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이라는 칭의를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여기서 제쳐두고 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위들은 신앙 또는 불신양의 표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우위가 확보되고 있다. 루터가 칭의론에서 목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외식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 신학은 우리를 우리 밖에 세우기 때문에 확실하다. 나는 나의 양심을 의지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속일 없는 진리를 의지해야만 한다.”

 

루터의 말대로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비추는 거룩한 태양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학은 칭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고, 십자가 신학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만큼 칭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행위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없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그의 전적인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해야 마땅하다.

3. 칼빈의 율법 이해

 

4. 칼빈의 교회론

 

5. 종교개혁적 교회와 사회/국가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과 모든 인류를 그룹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룹이며, 둘째는 세상 나라에 속한 그룹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신자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정부도 법도 필요치 않다. 만약 세상 전체가 참된 그리스도인 , 참된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주, , 통치자, 정부, 혹은 법으로부터 받을 아무런 도움이 없다.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은 세상 나라와 세속법 아래 있다. 그곳에는 참된 신자란 거의 없으며, 악에 저항하고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동떨어진 다른 하나의 정부를 주셨고, 인간이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연약한 점을 대처할 없기에 인간을 아래 살게 하셨다라고 루터는 말했다. 루터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나누어 생각했는데, 이는 바르트에 의해 왕국론이라 불려지기 시작했다. 루터는 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의를 만들어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평화를 가져오며 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세상에서 충분치 않다. 어떤 정부도 독자적으로 수행 없는데, 세속적인 정부만 있을 경우엔, 사람을 경건케 하는 성령이 마음 속에 없을 것이며, 영적인 정부만 있다면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악이 횡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속 정부에 통치권과 권력을 부여하셨으며, 영적 정부에는 봉사와 직임이 있다. 왕국과 정부를 구분하는 의미는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 있는 인간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며, 그들의 상호간계와 차이점에서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명백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부 또는 국가만이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을 보존하고 계속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해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분과 일치한다.

 

칼빈은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시민적 질서는 완전히 상이하다고 했다. 상이성은 영역의 서로 다른 임무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이 생각하기로 마지스트라(magistrat)’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초대하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도록 보존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외적인 수단이요, 보조 기관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통치 질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한 봉사자요, 중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는 보편적인 교회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이다.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새로 지으시는 권능이 확장되는 , 그것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가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릇된 교회임에 틀림 없다. 참된 교회는 자체의 말을 하거나 자체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며, 또한 세상의 어떠한 지배자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라는 성경을 기구이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이 말씀을 중심하는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말씀은 또한 직분자를 통하여 선포된다. 영역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근거에 두고 있으며, 자의 역할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한다든가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된다. 때문에 칼빈은 정부가 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이와 반대로 정부가 교회에 간섭하려 때에는 망설임 없이 저항하였다.

 

 

6. 종교개혁적 신학이 초교파신학의 기초하는 주장에 대해

 

서병용 교수는 초교파신학 강의에서 종교개혁적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파주의는 핵심적인 공통성보다 부차적인 차이성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교파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문제다. 성경적 사고방식은 탈중심적이며, 초교파를 지향한다고 해서 교파를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학행위의 주체자는 초교파적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있으며, 초교파란 종말론적인 존재로서의 교회의 기본 관심이요 삶의 지평이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복음주의적 신학의 초점과 결정적인 표준으로서 복음적 초교파신학의 출발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발견하고 이를 성경적 기초 위에 두고 조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칼빈은 이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이해하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이야 말로 개신교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학이라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칼빈신학이 정통교리라고 믿는다. 흔히 그리스도교 3 신학자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꼽는데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교리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이며,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종교개혁적 신학의 기초를 다졌고,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루터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 루터, 칼빈 신학은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로 인정해야 함과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아 들여야 신학이다. 정리하자면,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고, 둘은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서병용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신학이 종교개혁적 신학이며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이다. 나아간다면 그리스도교 정통교리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학부시절에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받아들이는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므로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데 적극 동의한다. 나아가 모든 교파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자신의 교파의 핵심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온갖 논쟁을 통해 정립되어 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근본이라 해도 무방하며, 점차적으로 더욱 모순에 빠져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부시절을 보낸 성결대학교만 하더라도 칼빈신학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전통교리로 검증되지도 않은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삼으면서도 자신들이 정통이며 복음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 주장이 당위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동의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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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피디아 "Felix culpa"


Felix culpa is a Latin phrase that literally translated means a "blessed fault" or "fortunate fall". As a religious term it refers to Adam and Eve's fall and the loss of the Garden of Eden, known theologically as the source of original sin. "O felix culpa!" wrote medieval theologian Thomas Aquinas, meaning that this loss of innocence was a fortunate fall because of the good that would come from it: Christ's Second Coming, Judgement Day and the eventual hope of Heaven. In the traditional Latin Mass and during the Exultet of the Easter Vigil the priest says at one point: "O felix culpa quae talem et tantum meruit habere redemptorem," "O blessed fault that earned us so good and great a Redeemer."

In a literary context, the term "felix culpa" can be used to describe how a series of miserable events will eventually lead to a happier outcome.

The theological concept is one of the underlying themes of Raphael Carter's science fiction novel The Fortunate Fall; the novel's title is explicitly derived from the Latin phrase.



중요한 부분만 사역(私譯) 해보면 다음과 같다.

행복한 죄는 "축복된 결함" 혹은 "운 좋은 타락"을 의미하는 문자 그대로 번역된 라틴 용어이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그리고 에덴 동산의 상실을 가리키는 종교용어로, 신학적으로는 원죄의 근원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 행복한 죄!"라고 썼는데,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재림, 심판의 날 그리고 하늘의 궁극적인 희망이 다가온다는 장점 때문에 결백의 상실은 운 좋은 타락을 의미한다.

문학적인 문맥에서는, 용어 "행복한 죄"는 결국에는 더 행복한 결과로 이끄는 비참한 사건의 연속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행복한 죄", "축복된 결함", "운 좋은 타락" 이 모두 역설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용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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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총회신학교 신학연구자료실 "벨직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1561)

제1장.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오직 그 분만이 유일한 절대자요, 영적인 존재자이심과 또한 그 분은 영원하시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분이시며 불가시적이며 불변하신 분이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그 지혜는 완전하시고 의롭고 선하신 분이시며 모든 선의 넘치는 근원이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바이다.


제2장. 인간이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방법

다음의 두 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첫째로는 그 분의 창조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그 분의 온 우주를 다스리심에 의해서인데, 이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때 크고 작은 온갖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훌륭한 지침서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는 것인데, 마치 사도 바울이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라고 함과 같다(일반계시). 모든 만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충분히 깨달아 알게 해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그 분의 성스럽고 거룩하신 말씀을 통하여, 즉 이 세상에서 그의 영광스러우심과 인간을 위한 구원에 관하여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쓰여진 그 말씀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고 충만하게 그 분을 알 수 있다.


제3장.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뜻에 의해 나온 것이거나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벧후1:21) 쓰여진 것임을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은총으로 인하여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을 명하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쓰여졌음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십계명을 기록하셨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들을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바이다.


제4장. 정경(正經)인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정경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구약은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비롯해서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도, 그리고 욥기,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세 책 즉 잠언, 전도서, 아가 그리고 대선지자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열두 명의 소선지자인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신약은 사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비롯해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 바울의 열 네 서신 즉, 로마서, 고리도전서.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후서, 디모데전서.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히브리서이며, 그 외에 다른 사도들의 일곱 서신, 즉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이다.


제5장. 하나님의 말씀의 신성과 권위의 근거

우리는 이 모든 성경을 우리의 믿음을 규정하며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또한 믿음을 확증시키는 성스러운 정경으로 믿는다. 이 쓰여진 모든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은 교회가 이를 받아들였거나 승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며, 성경이 그 스스로 증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예언된 말씀이 성취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6장. 정경과 외경 또는 위경(僞經)의 차이점

우리는 다음의 책들, 즉 에스드라 제 삼. 사권, 토비트, 유디드서, 지혜서, 벤 시락의 지혜, 바룩서, 에스더서의 부록, 불구덩이 속의 세 소년 찬미서, 수산나의 역사서,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의 두 책 등 소위 외경이라고 부른 것과 정경을 구별하는 바이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정경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하는 한계 내에서만 읽혀질 수 있고 교훈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면이라도 확증을 줄 수 있는 능력이나 효능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이 책들로 인해 정경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7장.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듯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그 속에서 지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태도가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말씀 외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은 모든 면에서 성경의 말씀이 완전하고 충분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글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세상의 관습이나 고대의 제도, 대중의 태도 그리고 사람들 또는 그들의 판결 혹은 규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바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모든 것 위에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영이라도 배격하는 바인데, 이는 사도 요한이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10)


제8장.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심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제9장. 한 분 하나님의 삼위 인격 되심에 관한 전장의 증거

위에서 언급한 모든 사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서 깨닫는 바 그 증거가 주는 힘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우리고 하여금 성(聖) 삼위일체를 믿도록 가르치는 성경의 증거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모든 구절들을 열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창1:26-27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으며, 창3:22에도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라는 말속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그 속에 한 분 이상의 또다른 분들이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으나, 구약에서 불분명한 이 문제가 신약에 와서 매우 분명하게 보여짐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성자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강림하셨던 것이다. 이 모습은 또한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것인데, 이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도 천사 가브리엘은 주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라고 했으며 "하늘에서 증거하는 자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니, 이 셋은 하나이니라"라고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신 세 인격이 계심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가르침이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을 믿으며, 장차 이 온전한 가르침을 깨닫고 하늘나라에서 이로 인해 즐거워할 것을 믿는 바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 삼위의 특별한 직위와 그 행하심이 우리 인간을 향하고 계심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성부는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며, 성자는 그의 피로써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주가 되시며, 성령은 그가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여 늘 확증되었고 주장되어 왔으며 이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또한 마르키온파, 마니교,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나테누스, 아리우스등 정통 교부들에 의하여 거짓 기독교로 또는 이단들이라고 정죄 받은 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꺼이 세 신경, 즉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받아들이는 바이며, 이것은 고대 교부들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일치하는 것이다.


제10장.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본질에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심과 영원부터 계시되 피조되거나 창조함 받은 분이 아니시며(왜냐하면 창조받으신 분이라면 피조물이 되시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을 따라 성부와 함께 그 본질에 있어서나 영원에 있어서, 또한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은 그가 우리를 만드신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증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대로 영원 전부터 되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며, 사도 요한은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 그 말씀에 의하여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인하여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증거하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될 당시에도 계셨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는 (미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으며, 사도는 (히7:3)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했다. 따라서 그 분은 우리가 바라고 예배하며 섬겨야 할 참되고 영원하신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제11장. 성령은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

또한 우리는 성령이 영원 전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발출)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따라서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함을 받은 것이나 생겨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것임을 믿는다. 순서에 있어서 성령은 성 삼위일체의 제 삼위에 해당하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한 본질과 위엄과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며,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 해 주는 대로 참되시며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제12장. 만물의 창조, 특히 천사들의 창조에 관하여

우리는 성부께서 그 말씀, 즉 그 아들로 말미암아 무(無)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온갖 피조물들을 만드셨으며, 이 모든 것이 창조시에는 성부께 좋게 보였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 존재나 모습 또는 형태 그리고 그 직위에 있어서 창조주를 섬기도록 되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섭리와 그 무한한 능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되,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심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천사들을 선하게 지으셨고 자신의 전달자가 되어 그의 택하신 자를 섬기도록 만드셨다. 그런데 천사 중의 얼마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높은 지위에서 영원한 파멸로 떨어졌으며, 그 밖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그 자리를 지킴으로 처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악마와 귀신의 영들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선한 일에 원수가 되었고, 극도로 타락하여 살인자로서 교회와 신자들을 파괴시키고자 하며, 그 악한 궤계로써 모든 것을 멸망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그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 날마다 무서운 고통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한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거부하며 이를 배격하는 바이다. 또한 악마들은 그들 스스로의 구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악마들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본성상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의 잘못됨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13장.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을 주관하심.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을 내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뜻대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심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음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생하는 그 어떤 죄에 대한 책임자가 될 수 없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하심은 너무나 위대하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사단과 사악한 인간들이 불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는 가장 놀랍고도 의로운 태도로써 자신의 사역을 명하시고 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3중 방식).[각주:1]

또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를 넘어 있는 그 놀라우신 뜻을 호기심으로 감히 찾아 알 수는 없으며, 다만 지극한 겸손과 경외함으로 우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따를 뿐이며,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여준 그 사실만을 배울 뿐 그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어남을 이 교훈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마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하심같이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능력으로 감싸고 계신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뜻이나 허락 없이는 사단이나 온갖 악의 세력이라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은 그 어떤 것도 돌보시지 않고 다만 만물을 우연에 방치하셨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루스 학파의 거짓된 주장을 철저히 배격한다.


제14장.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흙으로 지으셨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즉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또한 거룩한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영광된 위치에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스스로 사악한 죄악에 내던져 결국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죽음과 저주의 상태에 빠졌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받았던 생명의 계명들을 범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따라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으로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악해지고 잘못되어 부패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 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만 남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변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속에 비친 빛이 어두움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인데,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인간을 어두움으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이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을 배격하는 바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수"(요3:27)없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자랑할 수 있으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임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 그 누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 왜냐하면 성경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조차도 감히 우리 것으로 내놓을 수 없는데, 이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후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한 바를 확실하게 붙잡고 나가야 할 것이다. 주께서 (요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외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제15장. 원죄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내려졌음을 믿는다. 이것은 전적인 부패와 유전적인 질병으로서 심지어 모태에 있는 아이에게까지도 전염되어 온갖 종류의 죄악을 낳게 함으로 죄의 온상이 되었고 따라서 이 모든 죄악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천하고 혐오할 만한 것이라 모든 인간이 저주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모든 죄를 없앤다거나 멸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세례를 받는 일로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죄란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이 이 비참한 근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이 죄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진노를 받기에까지 전가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악 속에서도 안일하게 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 타락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이 사망의 육신 세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죄란 단지 모방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 학파의 잘못을 배격하는 바이다.


제16장. 영원한 선택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 그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해서 타락되어 멸망에 빠졌다는 것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 모습,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셨음을 믿는다. 자비롭다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신 계획 속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모든 사람들을 이 파멸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보존하시기 때문이요, 공의롭다 함은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타락과 파멸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심에 있다.


제17장. 탁락한 인간의 회복

우리는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놀라우신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간이 육체적이며 영적인 사망에 빠져들어가 전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시고 그 아들(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로 하여금 그 보좌를 떠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아들을 복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범죄한 인간일지라도 그를 기뻐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이심을 믿는다.


제18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르시되,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참되신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는 없으신 채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심을 믿는다. 인간이 되신 것을 사람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은총을 입은 처녀 마리아이 몸을 통하여 이뤄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에 있어서만 참 인간의 성품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도 그러하셨으므로 그는 참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인간이 육신만 범죄하여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타락하였으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 두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육신과 영혼의 두 면을 모두 취해야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그리스도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재침례파의 이단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신과 혈통을 취하시되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의 씨에서 난자요, 여인에게서 난 자로서 마리아의 태의 열매요, 다윗의 가지요,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요, 유다 자손에게서 생겨난 자요, 육신으로는 유다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씨이심을 믿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게 하시고, 죄는 없으시되 모든 면에서 그 형제들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갖게 하신 것은 그 분이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 되심,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음을 믿는다.


제19장.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두 성품의 연합과 구별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인간의 성품과 구별될 수 없도록 연합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 뜻은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다는 것과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성품이 한 사람 속에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요, 여전히 그 성품은 그 자체의 구별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신의 성품이 태초부터 우주에 충만했을 뿐,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도 그 성품을 잃지 않고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지닌 채 참 인간의 모습으로 계셨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취하셨다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그 실재가 변화한 것이 아닌데, 이는 마치 그의 육신의 실재를 따라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이뤄질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본성들은 한 인격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합하여서,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 의해서도 두 본성이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긴 것은 그가 육신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참 인간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신의 본성은 심지어 그가 무덤에 있었을 때 조차라도 인간의 본성과 항상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늘 그의 마음 속에서 계셨던 것처럼, 비록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늘 그 속에서 함께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께서 순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순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순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죽음을 이기신 그의 능력에 의해서의며, 순전한 인간이라 함은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제20장. 하나님께서는 그리스 안에서 그의 공의와 자비를 나타내심

우리는 완전한 자비와 공의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한 죄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죄의 대가로서 받는 가장 쓰라린 고통과 죽음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시되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으며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을 쏟아 주시되 그 아들로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그를 일으키셨음을 믿으며, 바로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게 됨을 믿는 바이다.


제21장.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음을 믿는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7)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12)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비록 처음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무죄한 분으로 판결 받았으나 결국은 행악자로 정죄를 받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형벌을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짊어지신 채 불의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의로우신 그 분께서 보혈을 땅에 흘리심으로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이렇게 고초를 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는 고백을 마땅히 하는 바인데, 바로 그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온갖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단번에 희생이 되심으로 영원토록 온전케 된 바 바로 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이나 길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하나님의 천사에 의하여 "예수", 즉 구세주라고 불림을 받았는데, 이는 (마1:21)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제22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칭의

우리는 이 놀라운 비밀스런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올바른 믿음을 밝히 보여주심을 믿는데, 이 믿음은 그가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바 그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며 그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음의 둘 중의 하나, 즉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든지, 또는 만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음을 믿든지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그 외에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엄청난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절반의 구원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또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말을 마땅히 하는 바이다. 그러나 좀더 분명히 말해서, 믿음이란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단지 하나의 방편일 뿐이요, 이 방편이 되는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거룩한 사역들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그의 모든 공로 안에서 우리를 그와 교통하도록 해주는 도구인데 우리가 이 모든 공로를 받아들일 때에 이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멀리해 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23장.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조건.

우리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셨음으로 되어짐을 믿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행위와는 관계없이 의를 심어 주셨다고 선언함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 앞에서 낮추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늘 인식하며 이 은혜의 기초를 항상 굳게 붙잡고 나갈 것인데,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서는 그 어떤 신뢰할 만한 요소라든지 자랑거리가 없고, 다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의지하고 따르면서 그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고자 하는 힘을 주기에 충분하며,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당황하여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감추려고 했던 사실과는 달리 두려움이나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이나 보잘 것 없는 다른 피조물들을 의지한 채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마땅히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시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제24장. 인간의 성화와 선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게 된 이 참된 신앙이 인간을 중생케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하여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다 창함을 받은 이 믿음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 태만해져도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생활태도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나 형벌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이 거룩한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컫는"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인간에게 명하신 실천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선한 일들은 마치 좋은 믿음의 뿌리에서 선한 열매가 나오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착한 행위들로서,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이 선행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기 전일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선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 자체가 우선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결코 그것으로 공적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무엇으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겠는가?).


25장. 의식법의 폐기

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율법의 참 진리와 그 실체는 이 모든 것의 완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되, 이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필요 없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율법의 제3용법).


26장. 그리스도의 중보자되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고, 다만 중보자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음을 믿는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成肉)하심으로 한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분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 이 분이야말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접근하도록 해주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성부께서 그와 인간 사이에 세워 주신 중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그의 위엄으로써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거나 우리 멋대로 다른 것을 찾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범사에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를 사랑하여 가까이 나아오고자 하는 분을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심지어 그에게 원수되었을 때라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분 외에 어떤 다른 존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능력과 권위를 지니신 분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이 외에 그 누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뿐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르쳐 준 바를 행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기록한 말씀의 경계를 계속 거부하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불신앙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공적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심과 그 보배로우심에 근거하여 드리는 것이며,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이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두려움,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해서 인간의 불신앙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7-18)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께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또한 사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25).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중보자로서 주신 것을 기뻐하셨다면,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얻고자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른 중보자를 구한다거나, 그를 발견할 수 없다 하여 다른 중보자를 찾음으로 참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실 때 우리가 죄인되었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하심을 따라서, 마치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이 오직 한 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27장.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회는 순간적으로 비록 작아 보이고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치 아합왕의 시대와 같은 위급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 두셨던 것같이, 이 악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를 받으며 유지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특정한 사람에 한정되거나 경계를 이루는, 또는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요, 동시에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일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을 모두어 하나로 뭉쳐야만 된다는 것이다.


28장.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 교회와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공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요, 그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태나 조건 속에 있든지 간에 이 거룩한 모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 스스로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공회에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원리와 그 가르침에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서로가 동일한 몸의 지체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이 국가의 행정 명령이나 칙령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서 스스로 그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들을 교회에서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마땅히 행할바이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 내에서 신자들 사이에 구별을 한다는 것이나 또한 신자들끼리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29장.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 비록 외형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선한 성도들과 함께 존재하면서 실상은 참 교회의 요소가 아닌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회의 하나됨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로 인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 죄를 멀리 하며, 의를 따라 살고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참으면서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허물이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령을 힘입어 모든 죄악과 싸워나가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를 사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으심, 그리고 고난당하심과 순종하심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거짓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


30장. 교회 행정과 그 직무에 대해서

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 받고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믿음 있는 성도들이 뽑히게 될 때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선한 순서와 질서를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31장.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교회 직원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가 주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 주는 질서 속에서 교회의 정당한 선택에 의해 그 각자의 직무에 따라 뽑혀져야만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처신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또한 택함 받은 소명에 대해 증거를 갖고, 이것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신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목사는,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유일한 목자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과 같이 동일한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파괴되거나 경솔히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 맡은 일을 위하여 높이 존경할 자로 여기고, 불평과 다툼과 논쟁이 없이 가능한 한 그들과 화평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32장. 교회의 질서와 가르침

우리는 비록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교회를 질서있게 움직이기 위하여 만든 규칙과 질서들이 쓸모있고 유익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인간의 양심을 묶어 버리며 강요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가르치며 돌봄으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길만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주는 모든 가르침을 따라 징계하거나 다스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33장. 성례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성례를 제정하셔서 그의 약속하심에 이르기까지 인을 쳐주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함과 은혜로 약속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일으켜 주시며 강하게 해 주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되, 두 가지 측면에서 즉 그의 기록된 말씀의 선언하심을 따라 그리고 그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을 따라 좋을 것을 주시는데,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구원을 확증토록 하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외적인 징표들인데,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징표들은 우리를 기만하기 위한 속임수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참된 주인이시오, 그가 없이는 일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다음의 두 성례에 만족하는데,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성찬인 것이다.


34장. 세례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을 흘리시되 인간이 죄에 대한 속죄나 보상으로 마땅히 드려야 되는 그 피를 대신 흘려주심으로 모든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그가 피흘려 주심으로 할례를 폐기하시고 그 대신에 세례를 규정하셨음을 믿는 바이다. 이 세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앎으로 다른 모든 사람이나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그를 영원토록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이시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주께서는 물론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서 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물뿌림의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가 그 영혼을 내적으로 깨끗케 하여 죄를 씻어줌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중생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물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받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탄과 같은 바로의 폭정을 모면하기 위하여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홍해와 같은 것인데, 이로써 우리가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 직무에 따라 주께서 의미를 부여하신 이 가시적(可視的)인 성례를 행하는 것인데, 이는 은사요 눈에 보이는 은혜로써, 세례를 통하여 죄를 씻고 깨끗케 함으로 우리 영혼의 추하고 불의한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모든 위로로 우리 마음을 채우며,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며, 새 사람으로 옷입어 과거의 모든 행위와 더불어 옛 사람을 벗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일단 세례를 받은 사람은 또 받을 필요가 없는데, 이는 우리가 두 번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세례는 물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우리가 이를 받는 순간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를 통하여 효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의 잘못을 배격한다. 그들은 한 번 받은 세례에 만족하지 않고 더구나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내려진 동일한 약속에 근거하여 할례를 받았듯이 계약의 징표로서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죄씻음을 위해서도 그의 보혈을 흘려주셨던 것이다.

그런 고로 어린아이들도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주께서 명하신 대로, 마치 희생 제물이 되는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표적과 성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행해졌듯이 세례는 우리 자손들에게 행해져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던 것이다.


35장. 성만찬

우리는 이미 중생함을 얻고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을 기르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다음의 두 가지의 생활면을 갖게 되는데, 첫째는 육신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갖는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둘째로는 영적이며 영원한 것인데 이는 중생할 때 갖게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효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에게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와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데 이것은 생활 그 자체로서 누구에게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지녀야 되는 영적이며 영원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를 취할 때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고 힘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영접할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영적이며 신령한 양식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가시적인 제도를 세우셨는데,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그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예식을 잘 행하되 육신의 손과 입을 통하여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공급을 받듯이,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를 취함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령의 역사가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깨닫기 어렵듯이, 이 성례의 참 의미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깨닫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례를 헛되이 행치 않도록 명령하셨다. 그는 우리 속에서 이 거룩한 징표들을 통하여 그의 사역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몸과 피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가 취하는 수단은 육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영에 의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기는 하지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 예식은 영적인 식탁에서 이뤄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은혜로써 우리와 교통하시며 그를 즐거워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또한 기꺼이 얻도록 하신다. 이것은 그의 살을 취함으로써 영양을 공급받고 든든해져서 우리의 가련하고 쓸쓸한 영혼이 위로를 받도록 함이요,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고 새롭게 함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성례식이 비록 의미 심장한 일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예식을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는 없다. 진실로 경건치 않은 이들은 이 예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 성례식의 참 진리를 받을 수 없는데, 이는 마치 유다와 마술사 시몬이 이 예식을 좇아 행하기는 했으나 이 예식의 참 의미가 되시며 모든 믿는 자와 하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것과 같다.

끝으로 우리가 성례식을 성도가 모인 곳에서 행하되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우리 구세주인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엄숙히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를 잘 살피지 않고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스스로 심판에 이르게 될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할 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례식에 있어 인간이 조작하여 덧붙인 모든 조잡하고 그릇된 생각들을 불경건한 것으로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예식의 규정에 만족하며, 그들이 말한 바로 즉 그 방식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이다.


36장.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왕과 군주와 행정 장관을 세우셨음을 믿는데, 이는 세상이 특정한 법과 정책에 의해 다스려짐으로 인간의 방종이 제어되고 만사가 선한 질서와 순서에 따라 움직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직무는 국가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뤄나가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신성한 직무를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디서나 복음서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옹호해야 하는데, 이럼으로써 주께서 말씀 가운데에 명하신 대로 누구나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각주:2]

더 나아가 형편과 자격 또는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어진 의무이다. 세금을 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지 않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높이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그 모든 길에 있어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이러므로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자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공의를 무시하며 재산의 공유를 내세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선한 질서와 순서를 깨뜨리는 재세례파와 그 외의 거짓을 선동하는 자들을 철저히 배격하는 바이다.


37장. 최후심판에 대해서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약속하신 때가 이르고 구원받은 수가 차게 되면,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하늘로 승천하셨듯이, 놀라운 영광과 위엄으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강림하시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또한 옛 세상을 불과 화염으로 사르셔서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을 믿는다.

그 때에는 모든 개개인, 즉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의해 놀라운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아 그 영혼과 몸이 연합되어 예전에 살던 모습으로 되어질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 관해 볼 때, 그들은 죽은 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썩이질 모습에서 썩지 않을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때에 죽은 자들이 이 땅위에서 선악간에 행한 그들의 행위를 따라 책들이 펴지고 책들이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진실로 모든 이들은 그들이 말한 무익한 말들, 즉 오락의 말이나 농담조차 판단을 받게 될 것이며, 인간의 말한 것이나 위선조차 밝히 드러내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심판은 악하고 불경건한 이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것이며 택함받은 의인들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때에야 의로운 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이 이뤄지며 그들이 수고한 모든 노력과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무죄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질 것이요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될 것인데, 이 사악한 자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 무죄한 자들을 박해하고 억누르고 괴롭힌 사람들로서, 그들의 양심의 증거를 따라 심판을 받고 죽지는 아니하되 악한 자들과 악한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선택된 신실한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임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그 택함받은 천사들 앞에서 성도들의 이름을 밝히게 되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기움을 받고, 이 세상에서 있을 때 많은 재판관과 통치자들에 의해 이단이요 불경스럽다고 정죄받은 성도들의 주장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주장으로 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은혜의 선물로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볼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을 성도들에게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위하여 이 놀라운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하는 바이다. 아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1.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의 각각의 사역하는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탄과 인간보더 더 높은 방식으로 일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본 항목은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직무는 국가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 신성한 직무를 지켜 나가야 하는데, 즉 모든 우상과 거짓된 예배를 배격함으로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멸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뤄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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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앤조이 "신자유주의가 신학적으로 문제인 까닭"


신자유주의란 간략히 말해 케인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소생시키고 부흥시키려는 1970년대 이후의 현대 경제사상운동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경제 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장은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되었을 때 근대민족국가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자유 시장경제 이론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란 시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시장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신앙’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시장 근본주의 종교의 교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의 사회철학에서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아담 스미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철학자’라 불린 하이에크는 마르크스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였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게도 마르크스와 똑같이 독일어권에서 영국으로 이주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대영 박물관에서 보내며 자본을 주제로 연구에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마르크스는 오른쪽 귀가 먹었던 반면 (때문에 ‘우파’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하이에크는 왼쪽 귀가 먹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파’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이에크는 단순한 이론적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상의 힘으로 세계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은 열정적 선동가였다. 그의 사상의 가장 독창적인 주장은 ‘사회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였다. 그에 의하면 사회정의는 ‘신기루,’ ‘미신’, 혹은 ‘사교’(邪敎)에 불과하며, 개인의 자유(liberty)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선의(善意)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면 사용하기를 부끄러워해야 할 싸구려 저널리즘’에 불과하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과거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던 부족사회에 주어진 원시적 윤리이며, 따라서 이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부족 사회의 윤리를 열린사회에 강요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렇듯 하이에크가 꿈꾼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부정을 의미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이상을 조화시키려 애쓰던, 그와 가까운 자유주의 사상가들조차 그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사상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낳았는가?

하이에크 사상의 핵심 요소

하이에크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첫 번째 핵심 요소는,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부인하는 철저한 ‘반이성주의’(anti-rationalism)다. 하이에크는 서구 사회가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와 같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로 나아가게 된 문제의 뿌리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물론 이성의 역할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사회를 설계하거나 변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치명적 자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사상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모든 인간의 질서는 철두철미 사회적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라는 ‘사회적 진화주의’(societal evolutionism)다. 생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하이에크는 생물학적 진화 이론을 사회 질서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질서는 경쟁적 시장에 의해 창조되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다. 아무도 그것을 설계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이 어디로 갈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질서를 만들고 명령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간 사회는 사회 진화 덕분에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더 훌륭한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이에크 사상의 세 번째 핵심 요소는 모든 초월의 세계를 부정하는 철저한 ‘자연주의’(naturalism)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힘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 감각의 질서 외에는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추론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철저한 칸트주의자였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모든 의미의 세계는 내면의 정신세계로 귀속되며, 따라서 인간의 경험과 이해관계와 감각의 질서에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어떤 순수한 외부적 혹은 초월적 관점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하이에크는 ‘궁극적인 것’ 혹은 ‘초월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회의론자였던 것이다.

하이에크 사상에 대한 비판

이러한 하이에크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시장이 사회적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은 사실적으로 틀렸다. 경제학자 폴라니(Karl Polanyi)가 그의 역작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연적인 생성물이라는 생각은 허구적인 상상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자유 시장은 오히려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로 형성했다.

둘째로, 우리가 하이에크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윤리적 ‘규범’과 ‘당위성’을 상실한 극도의 사회적 보수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화론적 사회윤리는 이미 사회적으로 우세한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강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가 비판한대로 기독교의 이웃 사랑 윤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윤리가 되기에는 너무 순수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건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을 위한 궁극적 규범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 규범과 당위가 없는 하이에크의 저서들이 그래서 ‘도덕적 공허’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이에크의 사상에 신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인간 이성의 오용과 남용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하늘의 가능성’에 대해 닫혀 있는 철저한 자연주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인간의 문명이 그 안에 추가의 진화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자기 교정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와 같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한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반드시 주어진 가치의 틀 안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재적 비판’의 원칙을 내세우며 하이에크는 인간의 질서에 대한 모든 열려진 비판과 갱신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그는 ‘이미 주어진 것’ 이외의 것에 자신을 완전히 닫아버린 완고한 폐쇄주의자였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역사를 비판하고 갱신하는, 초월적인 희망의 원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폐적 세속주의’를 의미한다. 하이에크의 사상에는 우리의 조건과 관습을 넘어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없다. 이 세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거기에는 오직 자신을 스스로 성취해 나아간다는 시장의 무한한 진화 사슬밖에 없다.

시장은 자연 세계의 물과 바람과 같아서 인간이 통제할 수도 또 통제하려 해서도 안 되는, 어떤 신비하고 성스러운 존재라고 하이에크는 주장했다.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하려고 헛되이 노력하지 말고, 경쟁적 시장이 창조한 자생적 질서와 사회적 진화에 전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맡기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자생적 질서라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는 자연주의적 낙관주의의 오류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가 이미 지적했듯이, 초월의 영역을 현상의 진행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귀속시킴으로써 역사 안에서 절대적인 선이 출현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늘의 소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불신앙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모든 희망을 넘어선 희망’(hope against all hope, 롬 4:18)으로 우리의 이 불완전한 역사를 참회하고 갱신하려는 모든 종교적 이상과 노력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장을 전능한 구세주로 예배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주류 경제사상 신자유주의는 신학적으로도 동의할 수 없는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다.

장윤재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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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교파신학 과제로 제출한 글을 옮겨옴.


5

오직 십자가만이 신학의 규범이다: 십자가 신학의 등장

1514-19

 

십자가 신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진술은 명제 19 명제 20에서 발견된다:

 

19.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피조물 안에서 인식될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리어져서는 안된다.

 

20. 그러나 있는 하나님의 뒷모습을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보여진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신학자로 불려질 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참된 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중략) 십자가는 실제로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계시는 하나님의 뒷모습(posteria Dei) 대한 것이다. 있는 것이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는 바로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의 간접적인 계시로서 간주되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된 계시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나님은십자가의 겸손과 수치안에 계시되어 있다.

(1) 십자가 신학은 사변적인 것에 예리하게 대립하여 있는 계시의 신학이다.

(2) 계시는 간접적인 것이며 감추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중략) 계시가 오직 믿음의 눈에 의해서만 인식될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3) 계시는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이나 피조 질서 안에서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인식되어 있다.

(4) 그의 계시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믿음의 문제이다. (중략) 루터에게 있어서십자가의 신학자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의 현종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진술인참으로 당신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를 인지할 있는 사람이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개념이 십자가 신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어계심,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안에 살아간다.

(5) 하나님은 특별히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이지만, 하나의 깊은 영적인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십자가 신학의 근본적인 의도는 단지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알려진다는 사실(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건 아니면 개인의 고난이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중략) 어떤 사람이 의롭다 여겨질 있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그가 죄인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전에 그는 먼저 완전히 비하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비하시키기도 하시고 의롭게도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행동은 그의 본래의 본성에 속한 행동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신다.’ 낯선 행위는 본래적 행위의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이다. 고난의 중요성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해되던지 아니면 인간의 시험으로 이해되던지 간에,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그의 본래적 행위를 수행하는 낯선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인트커는 시험에 관한 중요한 연구에서 루터가 하나님 자신을 시험의 원천으로서 간주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를 의롭다하기 위해서 인간을 공격하신다. (중략) 마귀는 본래적 행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낯선 행위를 수행한다. 고난이나 악을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넌센스의 침입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의 신학자 그와 같은 고난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서 간주한다. 왜냐하면 살아 계셔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수행하시는 바로 하나님이 정확하게 바로 그와 같은 고난 안에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숨어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의 숨겨진 계시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그것은 그것을 마스터하고자 하는 이성의 시도를 좌절시킨다:십자가의 사변은 오늘날 매우 많이 신비 안에 감추어진 것들을 흘려버린다. (중략)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길들을 이해할 없으며, 따라서 그것 자체를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의 낯선 행위의 경험을 통하여, 죄인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안에서 완전히 흔들려진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선 사역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을 얻을 있다. 시험의즐거운 절망 경험함으로써 죄인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배우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루터가 언급한 바와 같이, 시험은그것이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남겨둔다: 그것이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으며, 실제로는 오히려 그분을 우리에게 가까이 데려온다. 참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문, 사망, 그리고 지옥의 겪어냄을 통하여서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사람이십자가의 신학자 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중략) ‘살아 있는 , 또는 오히려 죽은 것과 저주받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신학자를 만들지, 이해하거나 책을 읽거나 사변하는 것은 신학자를 만들지 못한다.’.

 

 

루터의하나님의 발견에 나타난 십자가 신학의 전조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본질(오직 의를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것으로 이해) 죄인 자신의 전적인 불의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불려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것을 저주하시고 인간이 저주한 것을 선택하심으로 인간의 심판에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졌다.

 

그리하여 1515 이후로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성의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데 역사하였던 방식을 이해할 없다는 그의 확신의 결과이며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러한 긴장은 분기점에 이르게 되고, 믿음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 사이에는 거의 영구적인 것에 가까운 분리가 결과로 생겨난다. 이성은 십자가에 의해 걸려 넘어진다: 믿음은 기쁨으로 그것을 끌어안는다.

십자가 신학과하나님의 발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중략) 십자가 신학은 신학적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한 프로그램적인 비판을 나타낸다. 십자가 신학과 초기의 신학적 혁파 다에서 본질적인 특징인 역설 아래에 감추어진 것이라는 개념은 지금껏 알려진 신학적 담론에서 유비의 원리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을 나타내며, 그리고 적어도 점에 있어서 20세기 초의 변증법적 신학의 기원과 병행된다. (중략) 한편으로 루터가 모든 신학이 관계되어야만 하는 말씀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남아있게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Crux probat omnia!) 하나님에 대한 책임 있는 모든 기독교적 담론은 십자가에 기초되어야만 하고, 기초에 근거한 비판에 따라 주장되어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적 언어의 유비적 성격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은 사람이 어슴푸레한 반편의 진리인 신학적 여명 안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략) 십자가의 말슴은 선개념화된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며, 그리고 사람들에게 만약 그가십자가의 신학자 되고자 한다면 그의 선개념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그리고하나님의 영광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계시되었으나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

 

 

결과적으로 루터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어떤 통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허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찰들은 순전히 인식의 단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도움을 믿을 있는 어떤 동기유발도 제공하지 않는다. (중략) 루터가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단계에서 실존적인 단계에로의 이행은 오직 이성의 기초 위에서만은 이루어질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 보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지식 안에서 궁극적으로 근거지워진다. 하나님이 감추고 계신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알려진 어떠한 기질이나 신적인 표징들이 알려진 것이지, 하나님이 의지하시는 것에 대한 것은 아니다.

 

(1)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의 계시 안에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중략) 하나의 계시 사건에서 믿음의 눈은 계시되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거기서 감각적인 인식은 오직 숨어계신 하나님만을 발견할 뿐이다.

(2) 숨어계신 하나님은 그이 계시 뒤에 숨어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숨어 계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노예의지에 관하여」에서 루터의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점차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중략)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예정의 수수께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의 실재를 인정하도록 만든다. (중략) 우리의 연구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반트가최종적인 분석결과로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의 숨겨진 형태 외에 하나님의 다른 숨어계심은 없다 말한 것에 동의할 있다. (중략) 그의 딜레마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노예의지에하여」에서 그것을 해결하는 실패한 것은 자신의 원리를 포기한 것에 대한 고발이다.

경험적으로 인식되어질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뒷모습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인식될 있는 자체에 기초한 이성은 인식된 상황이 결코 선개념된 상황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현재할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발이 땅에 남아있지 않도록 십자가 위에 땅으로부터 세워진 것처럼 기독교인의 믿음도 경험 안에 어떤 발목 잡힘도 허락해서는 안된다. (중략) 루터의 믿음의 교리는 감각의 아래에 숨겨져 있는 숨겨진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법에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정수를 이루고 집중되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고찰들을 기초로 해서 기독교인의 삶이 믿음과 경험 사이의 끝없는 긴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터에게 있어서 계시된 진리는 그것의 역설적인 형태 아래에서만이 계시되기 때문에, 경험은 단지 믿음에 대립해서만 있을 있다. 경험된 지각과 숨겨진 게신 사이의 변증법은 불가피하게 일부의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그가 경험한 것과 화해시킬 없음을 발견함에 따라 근본적인 질문과 질문과 의심에로 이끌어간다. 루터 자신의 손으로부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긴장에 대한 최고의 토론은 우리의 연구에 의해 커버되어지는 마지막 시기에 시작되어진 Operationes in Psalmos에서 발견된다. 저작의 내용을 점검하기에 앞서 그것이 쓰여진 맥락의 특징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신학 때문에 죽음의 위협 아래에 있었으며, 그리고 바로 위협 안에서 그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리고 또한 기독교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숨어 계심의 패러다임을 보았다. (중략)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세계의 전적인 무력화는 루터가 그의 신학이 기초로 감고 있는 근거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루터가 시험을 개인의 전적인 주관적인 상태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중략) 시험을 평가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신비로운 사춘기가 이르러서 사라지게 되는 영적인 성장통의 어떤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계속 이어지는 진정한 특징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영적인 삶의 진보를 위하여 계속해서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그리고 이것은 계속되는 시험의 경험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 사이의 상관관계는 시험 당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보증되어지는데, 분은 시험의 필요성과 궁극적인 목적 다를 드러내신 분이다.

시험의 위기는 어떻게 해결되어지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해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는데,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바로 그와 동일한 시험으로 고난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다. (중략) 성육신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자신에게 감당시키셔서 우리가 그의 의로움을 소유할 있다는 사실 아래에 놓여있다: 우리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인식되어지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것의 힘이 사유되어질 있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에 대하여 상관을 맺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중략) 첫째로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드는 것이다. (중략) 둘째로 믿음은 신자들과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유대로서, 영적인 결혼 안에서 신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의 단순히 외적인 또는 법적인 책임전가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6

십자가 신학의 기원과 의미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연구가 세계대전직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략) 여기서 간과할 없는 문제란 문명의 파괴와 유기 가운데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갈보리의 유기 사건에 숨겨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루터의 선언과 십자가에 버려진 그리스도에 대한 루터의 선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없는 도처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함께 괴르델러에 의해 제기된 중심질문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리터가 주장한 것처럼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지금처럼 기독교회의 약함과 어리석음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신학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 성결대학교 재학시절 읽은 책이다. 줄곧 개혁신학을 토대로 하는 교회에서 성장해온 내가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에 기반한 신학(특히 조직신학) 배울 어려움을 제법 겪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다져진 기반이 있는데, 그에 상충하는 신학을 배우다 보니 왠지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었고, 머릿속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태로 얼마간을 보내다가 신학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런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는지 파악하고자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은, 칼빈과 웨슬리를 다룬 책들을 위주로 읽다가, 루터, 종교개혁, 쯔빙글리, 낙스 등으로 범위가 점차 넓어지게 되었고, 책들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의문들을 해소하고 붙들어야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었다. 물론 와중에도 웨슬리 신학도 소화해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보내는 가운데 결정적인 깨달음을 책이 바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다.

칼빈의 5 강령이 맞느냐 아니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웨슬리 신학이 맞느냐로 논쟁을 벌이느라 시간을 헛되이 보낼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고 신앙으로 고백하는 복음의 결정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집중하도록 해준 바로 책이다. 책을 통해 그간 얽매여 있었던 내가 자유를 얻었다! 이상 타협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소모적인 논쟁거리로 이상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어졌다! 진정으로 붙들어야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일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게 가지는 우리는 비교적 중요한 데에 많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자이든 웨슬리안이든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박혀 죽으셨다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다. 신학적 노선(혹은 신학적 견해) 따라 구원을 받는 아니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구원의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모든 부차적이라 있다. 물론, 어떠한 신학적 노선(혹은 신학적 견해) 갖고 있는지도 중요한 사항이 있지만, 복음과 구원에 비한다면야 비중은 새의 깃털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끝까지 붙들어야 진리이며,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다.

책을 통해 가장 중요한 무엇인지 알게 이후로는 루터가 깨달은 십자가 신학을 최우선시하게 되었고,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신학이든 간에 나에게는 십자가 신학 보다 우선 순위로 자리매김하지 하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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