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약 17번 정도 사용하였는데, 이 빈도는 성경에서 가장 많은 활용이고, 그 용례는 다양하게 적용된다.

예레미야는 '목자'라는 칭호를 이스라엘 왕 혹은 지도자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도 사용한다. 목자의 '선함'과 '악함'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심판이란 주제도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지만, 바벨론을 향해서는 철저한 심판을 선포한다. 대표적으로 23:1-8은 전자에 속하고, 50장은 후자에 속한다. 흥미롭게도 목자-양 비유의 빈도는 후자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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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이스라엘에 팽배한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또한 우상숭배는 공의의 부재를 낳는다. 역설적이지만 우상숭배가 팽배하고 부정이 만연한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절기,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행위를 역겨워하셨다 (1:11–15).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정의라고 외친다 (1:16–17).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정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에서 출발하며 의로운 행실을 가져오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한다.

에스겔은 이사야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는 악인과 의인의 대가가 생명/영혼과 관련이 있다고 선포한다 (2:18–21 등). 또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해야 한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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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nant Motif in the Context of Judgment and Salvation in the Book of Jeremiah by Dr. Kenneth D. Mulzac

https://digitalcommons.andrews.edu/dissertations/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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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2장 12-13절은 원래 4장 7절 이후에 위치했으나 언젠가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2장 12-13절이 심판 선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며,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회복에 대한 소망을 선포하지 않았고 오로지 심판만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선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학자는 선지자들의 이같은 예언이 논리적 연속성을 내포하지 않는다고 본다.


this passage concludes a major section of the book having the general pattern: doom, then grace, it must still be acknowledged that there is no logical or natural continuity with the foregoing.

- Delbert R. Hillers, Micah, Hermeneia: 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39.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대본 작가들은 비극 보다는 희망적인 결말로 이야기를 완성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영화 관람객들이 해피 엔딩을 기대하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비관적인 결말 보다는 희망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결국 삶의 원동력은 절망이 아닌 희망에 달려 있기 떄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인 회복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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