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4Q504에 관한 첫 글이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미래 지향적 해석"이었는데, 후속 글이 견해를 뒤집는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의 과거 지향적 해석이다.

4Q504 1-2 frag. Col.Ⅳ를 읽으면, 다소 우세한 입장대로 다윗 언약을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뒷부분인 Col.Ⅴ를 읽으면 다윗 언약은 과거 사실의 역사적 진술이 된다. Col.Ⅴ는 생명수 샘 (Source of living water)의 파괴를 말하는데, 이곳은 Col.Ⅳ에서는 시온이다.

Col.Ⅳ에서 다윗 언약과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을 다루었다면, Col.Ⅴ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기를 다룬다. 다윗 언약은 역사적 진술의 일부에 해당하며, 따라서 미래 지향적 해석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내 관점에서 생명수 샘은 목자 은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서 이 부분을 유심히 읽었는데, 덕분에 다윗 언약에 관한 해석의 기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참고 자료는 앞뒤로 잘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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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는 고대 크레타 섬을 통치했던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된다.

저는 그곳에서 제우스의 빛나는 아들, 미노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앉아서 황금 지팡이를 쥔 채 망자들에게 법도를 알려주고 있었고,
그들은 문도 넓은 하데스의 집에서 그를 둘러싼 채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판결을 구하고 있었답니다. (11.568-57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준석 역, 아카넷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11권에서 주인공 오뒷세이아는 하데스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지인들을 만나고, 주변을 둘러보니 미노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라본 미노스는 하데스에서 망자들에게 법도를 알려주고 판결을 내려주고 있었다. 이런 역할은 그의 왕의 지위와 그가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묘사한다. 또한 "제우스의 빛나는 아들"이라는 설명은 그가 갖는 위상을 드러내며, "황금 지팡이"는 그의 왕위를 드러낸다.

플라톤의 『미노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왕은 사람의 영혼에 법을 제공하는 사람이며, 미노스를 이상적인 왕이라고 평가한다.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생애에 300~400년의 시간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미노스에 대한 인식은 동일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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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 아닌 파편으로 남아 있는 쿰란 문서 해석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은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4Q504는 기도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혹자는 4Q504가 기원전 2세기 작품으로는 드물게 패턴화된 기도문이라고 한다. 기도라는 장르는 본문 해석의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 즉 본문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해석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4Q504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단순히 과거 사실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의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 목자, 백성의 왕자가 되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진술한다. 또한 열방은 그의 영광을 본다.

이 진술만 보면 역사 진술(과거)로 해석할 수 있지만, 기도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윗 목자의 도래를 간구하는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다윗 목자를 왕자라는 단서와 함께 고려하여 에스겔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다수인데, 차후에 특이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대세를 따라도 무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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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brey E. Buster, "6 - Words of the Luminaries (4Q504–506)," in Remembering the Story of Israel: Historical Summaries and Memory Formation in Second Temple Juda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250-299. 

6 - Words of the Luminaries (4Q504–506)
https://www.cambridge.org/core/books/remembering-the-story-of-israel/words-of-the-luminaries-4q504506/B35F4084536DF8B13D9885D1589028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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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al Regev, "Sin, Atonement, and Israelite Identity in the Words of the Luminaries in Relation to 1 Enoch's Animal Apocalypse," Hebrew Union College Annual, Vol. 84-85 (2013-2014), pp. 1-23.

Sin, Atonement, and Israelite Identity in the Words of the Luminaries in Relation to 1 Enoch's Animal Apocalypse
https://www.jstor.org/stable/10.15650/hebruniocollannu.8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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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자로서 구약에 미약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관련 논쟁은 제외하고, 내 연구 주제인 목자-양 은유로 접근할 때 이사야서는 최소 1~2차례 급진적인 신학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를 고대한다 (예를 들어, 37:35). 하지만 역사는 그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히 이방 왕 고레스는 다윗 후손의 과업 중 하나인 예루살렘 재건을 실시한다 (44:28). 이러한 과업은 이방 국가와 왕을 우상 숭배와 침략으로 정죄하던 관례와 달리 고레스에게는 "내 목자"(44:28)와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45:1)라는 칭호를 적용하도록 만든다. 

또한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52~53장)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특히, 53:4)에서 민족의 죄악을 담당한 의로운 종(53:11)로 달리 생각하게 된다.

이사야는 여전히 다윗 계열의 메시아사상을 유지하지만, 메시아의 과업이 성취되는 방식에 신학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런 변혁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과 후대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재진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사상의 변천 과정에서 중요한 본문이고, 예언 전통과 신학의 확장성이라는 주제에서도 깊이 있게 다뤄볼 만한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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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구약(혹은 히브리 성경) 사용은 신약의 구약 사용 분야에서 어려운 주제 중 하나이다. 요한은 인용 공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요한이 선지자의 이름을 밝히더라도 그 선지자와 무관한 내용인 사례도 있으며, 여러 선지자 중 이사야를 대표적으로 밝히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든 요한복음이 이사야를 언급하므로, 이사야서와 요한복음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나는 선행연구의 주류와 달리 스가랴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7:37-39는 스가랴 14장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사 학위 논문의 주요 본문인 10장 선한 목자 담론은 스가랴서 9-14장과 연결해서 해석할 예정이다.

요한복음 7:37-39에서 37절은 이사야 55:1, 38절은 에스겔 47:1이 요한이 인용했다고 주장되는 대표적인 본문이지만, 나는 스가랴 14장으로 두 구절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 입장에서는 스가랴 14장이 요한이 생각한/의도한 본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혹여나 주류의 견해대로 요한이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스가랴 14장을 통해 읽어야 본문의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는 입장이다.

아직 가정 관계이지만, 혹시나 요한이 이사야서를 사용했다면 그의 의도는 실제로 그의 신학이 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아직 배제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독법에 익숙한 청중들을 고려한 요한의 의도적 사용일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즉 요한은 대다수의 이해를 고려하여 대중적 읽기를 사용하지만, 그의 진의는 스가랴서를 통해 밝혀진다는 전제이다.

내 주장은 극소수의 입장이라 앞으로 학회나 저술 등을 통해 반박 과정을 거쳐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학자로서는 확실한 독자성을 갖게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운 길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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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미가의 기도(8-20절)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14-17절)가 나타난다.

미가의 기도는 대적을 향한 심판으로 시작한다 (8-13절).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논쟁과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광명에 이르는 길이요 공의의 실현이다 (11절).

성벽 건축은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 (11절).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온다 (12절).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머물렀던 타지는 심판으로 인해 황폐하다 (13절).

이제 미가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목자 은유가 시작된다.

14 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주의 백성은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와 같다. 

갈멜은 풍요로운 지역의 상징으로, 목자들에게는 최상의 목초지로 여겨졌다. 이 사실은 갈멜에서 목축을 생업으로 했던 한 사람의 예에서 명백해진다.

삼상 25: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심판 선포에서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훔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암 1: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사 33: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반대로 회복 선포에 갈멜이 등장하는 이유 역시 그 지역이 갖는 풍요로움이라는 상징성 때문으로 보인다.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또한 양 떼가 홀로 갈멜에 있는 이유는 그 지역이 안전지대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암 9: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미가의 기도에서 갈멜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예레미야의 선포를 인용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렘 50: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갈멜은 양 떼에게 최상의 목초지이자 안전지대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삼림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즉 양 떼에게는 목자가 없다. 그래서 미가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라고 간청한다.

미가는 이 양 떼를 "주의 기업의 양 떼"라고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시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이다. "옛날 같이"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미가는 목자 은유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간청하고 있다.

미가의 네 번째 목자 은유의 또 다른 특징은 출애굽 모티프와 결합에 있다.

15 이르시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이적을 보이리라 하셨느니라

목자 은유와 출애굽 모티프의 결합은 목자의 '인도'와 '보호'라는 역할과 출애굽의 '구원'이라는 상징이 잘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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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일리아스』에서 '목자'의 용례는 세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전투 장면(과 관련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문자 그대로 목자와 관련된 진술이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사용한 목자의 용례 중 첫 번째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호메로스는 왕(혹은 지휘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백성들의 목자'라는 칭호를 빈번히 사용한다. 이 칭호는 총 39회 사용되고, 총 19명에게 적용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과 관련된 내용이라 생략한다.

호메로스의 '백성들의 목자'라는 칭호가 중요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 왕을 목자로 비유하는 사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용례를 통해 고대 그리스 사회에 목자-양 비유 혹은 목자-왕 전승이 존재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호메로스는 전투 현장을 생생히 묘사할 때 목자-양 비유를 사용한다. 다음은 그 사례 중 일부이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 주목하라.

튀데우스의 아들은 다시 한번 선두 대열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안 그래도 그는 트로이아인들과 싸우고자 진작부터 기세가 올라 있었는데, 이제는 무려 세 배의 기운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들판에서 털복숭이 양 떼 곁에 있던 목자가, 울타리를 뛰어남은 사자에게 생채기만 입힐 뿐, 제압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사자의 힘만 돋워놓은 채 막아내지는 못하고, 우리 안으로 숨어들어 가니, 버려진 양 떼는 겁에 질려 도망친다. 양들은 서로를 향해 무더기로 쓰러지고 달아오른 사자는 마당 깊숙한 곳에서 부터 뛰쳐나온다. 꼭 그런 모습으로, 강력한 디오메데스는 작정하고 트로이아인들에게로 섞여 들어갔다. 5. 134-143

그가 이렇게 말하자 빛나는 눈의 아테네는 디오메데스에게 기운을 불어넣었고 그는 닥치는 대로 살육하기 시작했다. 칼에 맞은 자들에게서는 지독한 절규가 치솟았고, 대지는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목자 없는 염소 떼나 양 떼에게 사자 한 마리가 독기를 품고 다가와 뛰어오르듯이, 튀데우스의 아들은 트라케인들에게 다가와 열두 명을 쳐 죽였다. 10.482-488

세 번째로, 호메로스는 실제로 목자 혹은 양과 관련된 사건을 서술하기도 한다.

양떼를 많이 둔 퉤에스테스 2.106

노토스(북풍)가 산꼭대기에 안개를 쏟아부으면, 목동에게야 좋을 리 없겠지만, 3.10-11

이 육중한 소리는 멀찍이 떨어진 산속 목자의 귀에도 들린다 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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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1-2:26에서 '매년제'(the annual sacrifice)의 정체에 관한 글 중에서 초막절의 참여 대상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의 진영은 남자만 그 절기를 지켰다는 견해이고, 또 다른 진영은 여성도 참여했다는 견해이다. 난 이미 초막절의 역사와 관련해 구약과 제2성전기 문헌까지 유대 문헌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초안을 완성한 상황이다. 여기에서는 모세오경에 나타난 모세의 명령을 위주로 살펴본다.

첫 번째로, 초막절은 남자만 지켰다는 견해를 살펴보자. 이 견해를 지지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Menahem Haran의 글을 위주로 다룬다. 내가 참고한 글은 Menahem Haran, “Zebah Hayyamim,” VT 19 (1969) 11–22이다.  

Haran은 초막절을 남자만 지키는 절기라는 근거 구절로 출애굽기 23:17과 34:23을 제시한다.

출 23: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출 34: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하지만, 모세의 절기 준수 명령에 관한 다른 구절은 참여 대상을 남자로 제한하지 않는다. 그 근거 구절로는 레위기 23:2, 44와 민수기 29:40, 그리고 신명기 31:9-13을 제시할 수 있다.

먼저, 레위길 23:2, 44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의 절기를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 남자로 한정될 리 없다.

레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레 23:44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다음 민수기 29:40에도 여호와의 명령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남자로 한정될 리 없다.

민 29:40 모세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니라


가장 명확한 근거는 신명기 31:9-13을 꼽을 수 있다. 모세는 면제년의 초막절에 대한 명령을 추가하는데, 율법을 듣는 대상은 '온 이스라엘'이다 (11절). 이어서 '온 이스라엘'의 범위를 적시하고 있다 (12-13절).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성읍 안에 거주하는 타국인과 그의 자녀들까지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

신 31: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모세오경에서 출애굽기 23:17과 34:23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을 준수 대상으로 명령하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를 근거로 초막절이 남자가 준수하는 절기라고 주장할 수 없다.

반대로 Susan Ackerman는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절기라는 이유로 엘가나와 그의 가족이 드렸던 매년제가 초막절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참고한 저작은 Susan Ackerman, Women and the Religion of Ancient Israel, AYBR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2)이다.

초막절의 다른 특징은 '즐거움'이다.

레 23:3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사사기 21:19-23에서 '춤추는 여자'(21, 23절)는 초막절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초막절만이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절기이며 즐거움을 수반한 절기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 이유는 3대 연례 절기를 명령하는 본문 중 하나인 신명기 16장에 나타난다.

신명기 16장에서 유월절은 출애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이날의 특징 중 하나는 '고난'이라 할 수 있다 (참조. 3절)

신 16: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유월절과 달리 칠칠절과 초막절은 즐거움을 명령하는 절기이다.

먼저 칠칠절에 관한 명령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칠칠절에 참여하는 대상에 너 (아마도 남자)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까지 포함된다 (11절).

신 16: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다음 초막절에 관한 명령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초막절에 참여하는 대상 역시 칠칠절과 마찬가지로 너 (아마도 남자)와 네 자녀, 노비,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까지 포함된다 (14절).

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어 두 구절은 연례 절기의 참여 대상을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로 명령한다 (16절),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남자 이외에 참여 대상이 있으므로, 남자의 책임 아래 각 가정과 주변 이웃을 참여 대상으로 명령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따라서 초막절만이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절기이며 즐거움을 수반한 절기라고 주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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