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ochen Flebbe는 “Feasts in John”에서 헬라어 ἑορτή의 용례를 근거로, 가나 혼인 잔치를 요한의 절기에 포함시킨다(자세한 용례는 109쪽의 표를 보라). 그는 가나 혼인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으로서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특히, 115쪽).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묶어서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견고하지 못하다. 그가 제시한 표를 보면 가나 혼인 잔치와 다른 절기에 ἑορτή가 획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근거도 없다. 그 다음으로, 요한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함께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으로 묶었다면, 그 의미는 종말론적 구원과 거리가 멀다. 나는 그 사건의 의미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무리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본다.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앞서 요한은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대중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1: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실제로 세례 요한의 선포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1:35-51).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요한은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예수의 사역과 유대 절기를 통해 그의 정체성과 사역의 의미를 정밀하게 선포한다.

Flebbe, Jochen. “Feasts in John.” Pages 107–24. in Feasts and Festivals. CBET 53. ed. Christopher Tuckett. Leuven: Peeter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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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유대인의 명절’(5:1)을 부림절로 보는 해석자들이 대세라고 한다. John Bowman의 “Identity and Date of Unnamed Feast”는 그 중 하나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절기를 ‘익명의 절기’라고 하는데, 저자가 특정 절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갖는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중/독자로 하여금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총 여섯 차례나 절기를 언급하는데, 예외적으로 이 명절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청중/독자가 그 절기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절기의 특성을 연상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요한이 절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요한은 굳이 절기를 언급한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의도하는 두 번째 효과라고 불수 있다. 요한은 청중/독자이 어떤 절기인지 바로 알 수 없어도, 절기라는 시기를 염두케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명절의 특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요한이 반드시 서술하고 싶은 사건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대로 저 절기가 부림절이라고 한다면, 요한에게 부림절이라는 다른 절기에 비해 큰 비중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중에 일어난 베네스다 사건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은 절기와 그에 맞닿은 사건이 아주 중요한 해석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요한은 절기의 의미를 살려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유월절, 초막절, 수전절), 반대로 절기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유대인의 명절). 현재 이 부분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고, 일부 내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되겠지만, 세부 사항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난 이후 진행될 연구 과제로 넘길 예정이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정책로부터 구제된 민족적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만약 요한이 이 절기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면, 5장은 민족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5장은 베네스다의 행각 중 한 곳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볼 때 요한의 절기 사용 중 절기의 유래와 의미와 동떨어진 사건 진술은 이 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부림절이란 절기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은 그 자체로 은혜롭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어 서른여덟 해 동안 고통받은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긍휼하심은 분명 기억될 만하지만, 요한의 절기 사용과는 이질감이 있다.

오히려 요한은 이 치유 사건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강조하신다. 예수는 안식일을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접하는 청중/독자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절기를 준수하시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 절기를 준수하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은 안식일이라는 규범은 그에게 족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5-10장이 재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데(634-662쪽),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과 안식일 논쟁은 연속되는 이야기이며, 각각 베네스 치유사건은 유대인의 명절,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이라는 유대인들의 규범과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절기 사용과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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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절기가 바로 '유대인의 명절'(5:1)이다. 요한은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본문에서는 절기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절기의 이름은 청중/독자들로 하여금 그 절기의 특성과 규례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절기의 이름을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그 명절의 특징과 의식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거하셨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4장에서 중요한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 

청중/독자들은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절기를 알고 있지만, 그 명칭을 통해서 연상되는 대상이나 의식 등은 애매모호하다. 그에 비해 요한복음은 베데스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안식일 논쟁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의도를 통해 요한은 명절은 아니지만, 그만큼 실생활에서 지켜지고 있던 안식일이라는 규범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법 (참조.  출 20:8-11; 35:1-3)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법 (참조. 레 24:1-8)이다.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을 하셨고,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17-47절). 후일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하게 되는 그 답변 중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 그의 대리인으로서 일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구속사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식일의 제약을 뛰어넘으신다.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한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대 절기를 성취하신 분으로 예수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특정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하며 안식일 논쟁을 주요 사건으로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익명의 절기'라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유대인'을 강조하는 특성은 사라지겠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는 절기라는 특성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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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제출된 박사 학위 논문이다. 요한복음의 유대 절기는 오랫 동안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관심을 받아온 주제이다.

The relation of the festivals of the Jewish calendar year to the structure of the Fourth Gospel
https://era.ed.ac.uk/handle/1842/3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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