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에서 초막절 단락(7:1-10:21)의 기능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이 글의 내용은 대체로 내 분석에 근거하며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학위 논문에 포함될 예정이다. 

초막절 단락이 시작하기 앞서 저자는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을 다룬다 (6:66-71). 이 단락에서 저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한다 (vv.70-71). 이어 예수의 활동 무대는 갈릴리로 옮기시고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이 명시된다 (7:1).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이 언급되고 (v.2), 명절의 중간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기 시작한다 (v. 14). 여기서 초막절과 성전이 연결된다.

7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성령에 관한 가르침이다 (v. 37-39). 나는 이 단락의 기원을 스가랴 14장과 연결한다. 선행 연구에서는 초막절의 헌수 의식(water libation ceremony)에 초점을 맞추지만, 초막절의 기원은 출애굽의 구원이며, 점차 농사를 위한 비와 관련지어져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감사하는 절기로 정착된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v.37),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v. 38)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 이러한 초막절의 배경을 근거로 한다.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은 예수께서 생수의 강을 성령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v. 39).

이어 그리스도 논쟁 (7:41-42)을 위치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요한은 초막절 단락에서 그리스도/다윗 기독론의 절정을 의도하고 있다.

8장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33-59). 예수의 정체는 아브라함을 능가한다.

9장의 핵심은 모세의 제자와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28-41). 예수의 정체는 모세를 능가한다.

10장의 핵심은 선한 목자로서 예수께서 목자-양 유비를 사용해 자기 죽음과 부활을 가장 극명하게 가르치는 장면이다 (vv.1-18).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v.18).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구속 사역과 그의 권위를 통해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목자-양 유비는 왕권 사상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스가랴 14장에서 여호와의 날 이후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고 이방 나라에 초막절을 명령하시는데, 이 명령은 열방 국가의 통치자에 대한 순종, 여호와의 열방 통치를 상징한다. 요한이 선한 목자 담론을 통해 예수의 사역과 권위를 드러냈기 때문에, 이 담론의 배경인 초막절을 고려해 스가랴 14장을 적용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요한복음은 초막절 단락에서 예수의 왕권을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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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chen Flebbe는 “Feasts in John”에서 헬라어 ἑορτή의 용례를 근거로, 가나 혼인 잔치를 요한의 절기에 포함시킨다(자세한 용례는 109쪽의 표를 보라). 그는 가나 혼인 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으로서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한다(특히, 115쪽).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무엇보다,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묶어서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견고하지 못하다. 그가 제시한 표를 보면 가나 혼인 잔치와 다른 절기에 ἑορτή가 획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근거도 없다. 그 다음으로, 요한이 가나 혼인 잔치를 유대 절기와 함께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으로 묶었다면, 그 의미는 종말론적 구원과 거리가 멀다. 나는 그 사건의 의미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무리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본다.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앞서 요한은 예수의 존재와 사역을 대중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1:4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실제로 세례 요한의 선포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체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다(1:35-51).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요한은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예수의 사역과 유대 절기를 통해 그의 정체성과 사역의 의미를 정밀하게 선포한다.

Flebbe, Jochen. “Feasts in John.” Pages 107–24. in Feasts and Festivals. CBET 53. ed. Christopher Tuckett. Leuven: Peeter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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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절기 사용을 분석하다 보면, 안식일이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5장에서 '유대인의 명절'(혹은 '익명의 절기', 1절)에 언급된, 베네스다 치유 사건 이후 안식일 논쟁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요한이 유월절을 중심으로 절기 순서를 배열하고, 자신의 신학을 녹여내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같은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에스겔 45장 17절이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행하는 날에 명절과 안식일이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이같은 유대 관습에 주목하는 동시에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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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를 적대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 전통을 어길 뿐 아니라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유대 메시아 사상이라는 렌즈를 통해 예수를 모세와 같은 기적의 선지자, 다윗과 같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 등으로 믿기도 했다. 오늘날 사도로 불리는 예수의 제자들 역시 예수의 십자가 도상과 부활, 승천 이후에야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동시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관례가 아니었고, 그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예수의 공생애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요한은 예수의 구속사를 설파하기 위해 유대 절기와 안식일와 같은 유대 규례와 전통을 사용했다. 유대인들의 선지식을 사용해 각각의 의미를 떠오르게 하고, 예수의 구속사를 통해 의미의 재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정체성을 규정해야 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흔히 '로고스 기독론'이라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예수의 선재성와 정체를 선포하며 시작한다. 예수의 구속사적 사역은 유대 관습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의 사역의 핵심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입을 빌어 그의 사역을 세상에 드러낸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 메시아 사상 가운데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전무하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이 그러했기 때문에 요한은 유대 절기 가운데 유월절을 밀착시킨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섯 번의 절기 가운데 세 번이 유월절(2:13; 6:4; 11:55)이다. 나머지 세 번은 익명의 절기(5:1), 초막절 (7:2), 수전절 (10:22)이다.

요한은 유대 달력과 달리 자신의 의도대로 유월절을 세 번 배치하고 있으며, 특히 절기 시작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가르침과 연결하고 있고, 세 번째 유월절은 수난 사화와 연결하고 있다.

'어린 양' (1:29)의 정체에 관해서는 유월절과 연결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여러 근거 중에서 19:31–36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 19: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유월절 규례와 관련된 구절들이 떠오르게 된다.

출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민 9: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특히, 민 9:11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1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어쩌면 세례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월절 어린 양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수와 유월절 어린 양 사이에 존재하는 변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린 양' (1:29)과 이사야의 네 번째 노래에 등장하는 '고난받는 종'(52:13-53:12)을 연결하는 해석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선 나는 '하나님의 어린 양'과 '고난받는 종'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고난받는 종'과 유월절 희생양과 연결짓는 해석에는 반대한다.

Paul M. Hoskins는 “Deliverance from Death by the True Passover Lamb: A Significant Aspect of the Fulfillment of the Passover in the Gospel of John”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1:29)과 유월절을 연결짓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요한복음에서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밀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이같은 접근은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그는 유대 절기의 기능에 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말하게 연결되는 이유는 당연히 예수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유대 전통에서 유월절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구별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11:5–7; 12:1–15). 초막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므로, 초막절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후대에 초막절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기념하는 절기가 된다 (특히, 슥 14:16–21).

이러한 유대 전통이 예수에게 새로운 의미로 적용된다.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1:29). 이러한 선포에서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 양과 갖는 공통점과 차별점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 요한은 유월절을 통해 예수의 대속 사역을 강조한다. 또한 초막절, 특히 스가랴 14장과 연결해 종말론적 회복을 선포한다. 유대 메시아 사상은 이스라엘의 영토 회복 이후 왕이 등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도상과 부활을 통해 세상 죄를 무르시고 인류에게 종말론적 회복을 가져오신다. 유대 전통에서 유월절과 초막절이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듯이 요한복음에서도 대속을 통해 두 절기가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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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유대인의 명절’(5:1)을 부림절로 보는 해석자들이 대세라고 한다. John Bowman의 “Identity and Date of Unnamed Feast”는 그 중 하나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절기를 ‘익명의 절기’라고 하는데, 저자가 특정 절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갖는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중/독자로 하여금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총 여섯 차례나 절기를 언급하는데, 예외적으로 이 명절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청중/독자가 그 절기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절기의 특성을 연상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요한이 절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요한은 굳이 절기를 언급한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의도하는 두 번째 효과라고 불수 있다. 요한은 청중/독자이 어떤 절기인지 바로 알 수 없어도, 절기라는 시기를 염두케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명절의 특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요한이 반드시 서술하고 싶은 사건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대로 저 절기가 부림절이라고 한다면, 요한에게 부림절이라는 다른 절기에 비해 큰 비중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중에 일어난 베네스다 사건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은 절기와 그에 맞닿은 사건이 아주 중요한 해석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요한은 절기의 의미를 살려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유월절, 초막절, 수전절), 반대로 절기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유대인의 명절). 현재 이 부분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고, 일부 내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되겠지만, 세부 사항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난 이후 진행될 연구 과제로 넘길 예정이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정책로부터 구제된 민족적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만약 요한이 이 절기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면, 5장은 민족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5장은 베네스다의 행각 중 한 곳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볼 때 요한의 절기 사용 중 절기의 유래와 의미와 동떨어진 사건 진술은 이 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부림절이란 절기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은 그 자체로 은혜롭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어 서른여덟 해 동안 고통받은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긍휼하심은 분명 기억될 만하지만, 요한의 절기 사용과는 이질감이 있다.

오히려 요한은 이 치유 사건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강조하신다. 예수는 안식일을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접하는 청중/독자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절기를 준수하시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 절기를 준수하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은 안식일이라는 규범은 그에게 족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5-10장이 재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데(634-662쪽),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과 안식일 논쟁은 연속되는 이야기이며, 각각 베네스 치유사건은 유대인의 명절,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이라는 유대인들의 규범과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절기 사용과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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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절기가 바로 '유대인의 명절'(5:1)이다. 요한은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본문에서는 절기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절기의 이름은 청중/독자들로 하여금 그 절기의 특성과 규례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절기의 이름을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그 명절의 특징과 의식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거하셨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4장에서 중요한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 

청중/독자들은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절기를 알고 있지만, 그 명칭을 통해서 연상되는 대상이나 의식 등은 애매모호하다. 그에 비해 요한복음은 베데스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안식일 논쟁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의도를 통해 요한은 명절은 아니지만, 그만큼 실생활에서 지켜지고 있던 안식일이라는 규범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법 (참조.  출 20:8-11; 35:1-3)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법 (참조. 레 24:1-8)이다.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을 하셨고,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17-47절). 후일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하게 되는 그 답변 중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 그의 대리인으로서 일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구속사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식일의 제약을 뛰어넘으신다.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한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대 절기를 성취하신 분으로 예수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특정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하며 안식일 논쟁을 주요 사건으로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익명의 절기'라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유대인'을 강조하는 특성은 사라지겠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는 절기라는 특성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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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첫 번째 유월절(2:13)과 세 번째 유월절(11:55)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하지만 두 번째 유월절(6:4)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없다. 이 시기에 예수께서 활동하신 무대는 갈릴리(6:1)와 가버나움(6:24)이다. 이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시기는 초막절(7:2, 10)이다.

유월절은 순례 절기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두 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으셨으므로, 이 유월절은 연례 절기(annual feasts)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Daise).

이 주장은 추후 검토하겠지만, 현재 내 질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첫 번째,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갈릴리와 가버나움에 계셨나? 두 번째,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다(22-59절).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적의 배경인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1절)에 위치한 산(3절)은 광야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49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해답과 연관되어, 광야 시절 만나 사건과 대비하여 예수의 사역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다(50-51절).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성취자로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 그 성취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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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절기가 갖는 기능을 분석하고 있다. 지난 번에 "요한복음에 언급된 절기의 기능과 의문점들"이란 글을 남겼는데,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의문점이 더 쌓여간다.
 

요한복음에 언급된 절기의 기능과 의문점들

 
그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면, 요한이 유대 전통에 따른 절기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창조적으로 변형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나열된 절기는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유월절(the first Passover)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2:13)
 
2. 유대인의 명절(a feast of the Jews)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1)
 
3. 두 번째 유월절(the second Passover)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6:4)
 
4. 초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7:2)
 
5.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0:22)
 
6. 세 번째 유월절(the third Passover)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11:55)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요한복음의 절기 순서가 유대 달력과 맞지 않는다는 의문이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유월절, 칠질절, 초막절 순서로 나열되어야 한다. 참고로, 이 세 절기는 유대 3대 절기이다(신 16:1-17). 하지만, 두 번째 유월절의 위치는 요한이 예수의 공생애를 1년 주기로 기록했는지 2년 주기로 서술했는지 다루도록 한다.
 
그 다음은 절기의 기능이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지만, 요한복음 2장에서는 성전청결이 주요 사건으로 배열된다.
 
칠칠절은 추수감사절이라고도 하며, 일년 농사의 열매를 거두는 시기에 하나님께 감사과 응답하는 절기이다. 하지만 5장에서 베데스다 사건 이후 안식일 논쟁이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두 번째 유월절은 본문의 위치부터 논쟁이 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릴 지역에 있었다는데서 또다른 논쟁거리가 된다. 또한 6장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모세의 만나 사건과 연결짓고 있다.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를 기념하는 절기이지만, 7장부터 유대인의 적대감과 모세의 율법에 관한 논쟁이 증폭되고 있다. '생수의 강'(7:38)은 초막절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전통 유대인들의 사고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된다. 내 관심사인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죽음은 전통적인 목자-왕 전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수전절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안티파네스와 마카비 항쟁을 연상시키는 절기로 성전성결과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한다. 하지만 11장에서는 선한 목자 담론에 대한 논쟁으로 번져 예수의 정체성을 다투고 있다.
 
세 번째 유월절은 나사로의 부활 이후에 위치하여 예수의 죽음을 향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 해석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요한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를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으며, 본인의 의도대로 유대 절기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요한의 유대 절기를 변형적으로 사용하여 해석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서 단순히 유대 절기의 역사를 조사하는 차원에서 선행연구가 끝나지 않는다. 요한이 이같은 구조를 사용한 의도를 파악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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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결정적인 논증은 유대 절기(Jewith festivals)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전히 선한 목자 담론(10장)을 주요 본문으로 설정하겠지만, 몇 가지 논의를 위해 목자-왕 전승의 중요성을 덜 부각시킬 예정이다.
* 이 글은 내 구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으므로 자세한 인용은 생략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절기는 총 여섯 가지이다.

1. 첫 번째 유월절(the first Passover)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2:13)

2. 유대인의 명절(a feast of the Jews)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1)

3. 두 번째 유월절(the second Passover)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6:4)

4. 초막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7:2)

5.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0:22)

6. 세 번째 유월절(the third Passover)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11:55)

유월절이 여섯 번의 절기 중 처음과 나중에 등장하고, 중간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유월절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저자가 유월절과 예수의 구속사를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요한복음은 유월절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조해야 한다.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대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의 죽음이 갖는 차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후에 펼쳐지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더욱 그렇다. 현재로서는 유월절의 기능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문제는 나머지 절기와 관련되어 있다. 첫 번째, 요한이 두 번째로 언급한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a feast of the Jews)이라고 일컫은 이유에 대한 의문이다. 선행연구에서는 이 명절을 '익명의 명절'(anonymous festival)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초막절과 수전절에 대한 언급이다. 앞서 '유대인의 명절'에서 명절의 이름을 고의로 생략했다면, 이번에는 특정 명절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두 절기가 선한 목자 담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두 절기와 선한 목자 담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글에서는 '유대인의 명절'(5:1)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초막절과 수전절, 그리고 선한 목자 담론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두 절기와 선한 목자 담론을 같이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한 목자 담론의 앞부분이 초막절(7:2-10:21)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고, 그 이후 발생한 예수의 선한 목자에 관한 가르침에 대한 논쟁은 수전절(10:22-39)과 관련이 있다.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시작된 절기이다. 절기의 의미는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통치를 기념하는데 있다.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광야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집 지붕에 천막을 치고 이 절기를 지켰다.

수전절은 마카비 가문을 필두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에피파네스가 모독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사건에서 시작된 절기이다. 이 절기는 성전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두 절기는 예루살렘 성전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는 절기적 기능을 한다.

여기서 요한이 예수의 성전 파괴와 회복에 관한 가르침을 2장에 배치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독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연결짓도록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앞으로 각 절기의 유래와 요한복음 내에서의 기능을 더 분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섯 절기는 모두 '순례'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는 건 분명하다. 각 구절마다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유대인들은 특정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구전되고 저술될 시기는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합의를 보고 있다. 여기서 다시 요한복음의 핵심 주장이 명백해진다. 즉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했던 유대인들에게,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독특성을 파악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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