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마이클 고힌(Michael W. Goheen)의 READING THE BIBLE AS ONE STORY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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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미스 림몸-케난(Shlomith Rimmon-Kenan)의 The Story of “I”: Illness and Narrative Identity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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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붐머샤인(Thomas E. Boomershine)의 A HISTORY OF BIBLICAL NARRATION이란 글이다.




톰에 대한 정보와 그가 쓴 들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라.
http://www.united.edu/directory/boomershine.shtml
http://www.tomboomershine.org/pages/writing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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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W. 리스 로버츠(W. Rhys Roberts)에 의해 번역 되어 MIT에 올라와있다.


Rhetoric By Aristotle

http://classics.mit.edu//Aristotle/rhetori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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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의 개념에 대해 슬로미스 림몸-케난(Shlomith Rimmon-Kenan)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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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Poetic Justice)

“Poetic justice was coined by Thomas Rymer, in the later seventeenth century, to denote his claim that a narrative or drama should, at the end, distribute rewards and punishments in proportion to the virtues and vices of each character.”

즉 ‘시적 정의’란 어떤 문학작품의 등장 인물이 결국 그간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합당한 결과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으로, 시나 소설 속에 드러나는 권선징악 혹은 인과응보의 사상을 말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읽어보라.


Poetic Justice
http://en.wikipedia.org/wiki/Poetic_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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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명기 6 4-5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BHS 6:4-5

`dx'(a, Ÿhw"ïhy> WnyheÞl{a/ hw"ïhy> lae_r"f.yI [m;Þv.

.`^d<)aom.-lk'b.W ^ßv.p.n:-lk'b.W ^ïb.b'l.-lk'B. ^yh,_l{a/ hw"åhy> taeÞ T'êb.h;a'äw

 

 

개역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매일마다 이 말씀을 암송한데다가, 70인경을 성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들으라”는 표현은 매우 익숙했다.

 

o` e;cwn w=ta avkou,ein avkoue,tw ( 있는 자는 들으라)

ΒΝΤ 8:8

a;koue Israhl (이스라엘아 들으라)

LXT 6:4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까?

 

이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야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15).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구원 받지는 않는다. 믿음은 실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이 무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믿었으나 배교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 말씀을 인내로 실천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르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으로써, 마음(bb'l)을 다하고 성품(vp,n<)을 다하고 힘(daom)을 다하여 믿음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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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추천도서 2008. 4. 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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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와 한국교회>에서 '십자군'을 주제로 발표하게 되어 읽은 책이다. '의로운 전쟁이란 가능한가?'란 질문이 매력적이기도 했거니와, 십자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한 주제였으나, 내 지식의 얄팍함을 여지 없이 드러내주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십자군에 대한 기존 지식들을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십자군이란 무엇인가?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1095~1270)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Britannica)


대부분 브리태니커의 정의대로 알고 있다. 하 · 지 · 만 이렇게도 간단하게 정의될 만한 사건이 아니다.
십자군은 이슬람의 지하드로 인해 기독교 국가의 영토가 정복되면서 피어나기 시작한 개념이다. 이 당시 기독교엔 성전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지하드로 인해  기독교 국가의 영토가 정복 당하기 시작했고, 성지인 예루살렘 마저 이교도들의 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지하드로 인해 기독교 세계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데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고 활동하신 예루살렘이 이교도에게 넘어갔으니, 이젠 전쟁에 의한 재탈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의 최대 과제는 "예루살렘 탈환"이 되었다.

아랍을 평정한 후에도 마호메트는 이슬람교의 확장을 꾀했다. 실제로 이슬람의 세계관에서 세력 확장은 지하드와 결부되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슬람의 전통적 사고에서 세계는 다르 알 이슬람(Dar al-Islam), 즉 ‘이슬람의 세계’와 다르 알 하르브(Dar al-Harb), 즉 ‘전쟁의 세계’ 둘로 나뉘었다.
다르 알 이슬람은 이슬람이 직접 통치하며 이슬람의 법률에 구속되는 모든 땅을 말했다. 한편 다르 알 하르브는 이슬람교도들이 불신자들을 상대로 지하드를 벌여 영토를 장악하고 민족들을 정복해야 하는 곳으로, 이중에는 기독교 세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를 통해 다르 알 하르브를 점점 줄이고 다르 알 이슬람을 점점 늘려나가 마침내 전 세계를 차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p.28-29

기독교의 성전 개념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곳은 서유럽이었다.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국가들을 휩쓴 이슬람 정복자들은 지브룰터(Gibraltar)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8세기에는 이슬람 원정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가톨릭 교 유럽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그러나 732년에 저 유명한 투르(Tours)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는 프랑크 왕국의 지도자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에게 패하고 다시 스페인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기독교 영토였고, 유럽 사람들은 그곳에 이슬람 세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된 땅이었으므로, 이교도들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고, 하물며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었다. 그러니 불신자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기독교도는 명백히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처럼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대하는 과정에서 서부 유럽의 군인들과 신학자들은 처음으로 성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다. ‘재정복’을 뜻하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는 십자군 전쟁의 신학적, 도덕적 정당화를 위한 연습인 셈이었다. 훗날 발생할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레콘키스타는 군사 원정과 성지 순레를 결합시켰다. p.30

그러므로 십자군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포함되어야만 한다.

  • 교황의 권위에 대한 복종
  • 기독교세계의 조화
  • 면죄부의 영적인 혜택


하지만, 이런 주요 개념을 포괄하는 정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이 책에서만이 십자군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해준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군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십자군에서 이끌어 내야 할 교훈의 중요성 때문이다. 십자군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사건이지만, 선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선교는 '정복'이 아니다. 선교란 "복음의 능력으로 감동 감화 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사역"이다. 선교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부디 이 책을 읽어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교가 무엇인지를.
 
 
업데이트 200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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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타주 기법에 대해 알아보자.

그러면 몽타주 기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볼츠와 라이엔의 책을 참조해보자: "몽타주를 통한 명료성의 고양은 순전히 가시적인 것들을 구성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진 몽타주는 본질적으로 무엇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재가 더이상 지각에 의해 포착될 수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사람들은 실재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였다. 전혀 가필되지 않고 도식화되지 않은 실재가 몽타주를 규정하는 '차단의 원리(Prinzip der Unterbrechung)'에 의해서만 구성된 것이었다. 벤야민에 있어 이 몽타주 기법은 '인용부호를 쓰지 않는 인용기법', 즉 과거의 '잃어버린 형식'으로부터 '현재의 형식을 독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브레히트는 이 차단에 의한 조직 과정을 '소외화(Verfremdung)'라고 불렀다."

몽타주 방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내용의 드러냄, 즉 사실 진상을 밝히는 비평(criticism)이 아닌 진리 내용을 보여주는 비판(Kritik)에 있다. 그것은 드러냄이면서 동시에 봄, 즉 관조이다. 거기에서는 '보는 것', '보는 자', '보여지는 자'가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동시에 '보는 과정'까지도 통합되어 있다.[각주:1]




몽타주 기법 (1)
http://adpia.dmc.ac.kr/bbs/view.php?id=frame&no=55

몽타주 기법 (2)
http://adpia.dmc.ac.kr/bbs/view.php?id=frame&no=56

몽타주 기법 (3)
http://adpia.dmc.ac.kr/bbs/view.php?id=frame&no=57

몽타주 기법 (4)
http://adpia.dmc.ac.kr/bbs/view.php?id=frame&no=58


몽타주의 종류
http://my.dreamwiz.com/longsora/lecture2_2.htm


영화 속 또 다른 의미 Montage
http://www.hy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1791
  1. http://armarius.net/ex_libris/archives/000167.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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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논리.


Post hoc ergo propter hoc
http://en.wikipedia.org/wiki/Post_hoc_ergo_propter_hoc

상식의 오류(fallacy of common sense)
http://www.sun4in.com/?mid=nonsul_sa&document_srl=5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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