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Yfriday <Universal>과 예수전도단 캠퍼스 워십 5집 <Wonderful Love & Miracle>, 어노인팅 7집에 수록된 "새 힘 얻으리"의 원곡. 동영상 순서는  Brenton Brown, Paul Baloche & Brenton Brown, Life Wide Open, Flatirons Community Church이다.

저자인 Brenton Brown의 홈페이지 주소를 적어둘테니, 관심 있으시면 방문해보시길.
http://brentonbrownmusic.com/











<New Song Cafe> Vickey Beeching과 Brenton Brown


<New Song Cafe> Chris Tomlin과 Brenton Brown



"Everlasting God"

Strength will rise as we wait upon the Lord
Wait upon the Lord, we will wait upon the Lord

Our God, You reign forever
Our hope, our strong deliverer

You are the everlasting God
The everlasting God
You do not faint, You won't grow weary
You're the defender of the weak
You comfort those in need
You lift us up on wings like ea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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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음역은 qal wa-chomer 또는 qal wahomer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는 "from the less important to the more important"이다. 즉, "덜 중요함에서 더욱 중요함"으로 점차 강조하는 용법이다. 라틴어로 a minori ad maius 와 a fortiori 라고도 한다. 신현우 교수는 "더더구나" 논법이라고 하며, 이외의 대역어로는 "점증적 논법", "점강논법" 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본래 의미를 잘 담고 있는 "더더구나" 논법을 택했다.


The qal wahomer principle is used to argue that if A is true (as proven by the Bible), being more difficult than B, then B can also be inferred to be true with all the more reason (as in John 10:35-36)[각주:1] 

"더더구나" 논법은 A가 진실(성경에 의해 증명되었기 때문에)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용되며, B 보다 더 어려워서, B는 더욱 더 진실을 의미하게 된다(요한복음 10장 35-36절에서처럼

더 구체적인 설명은 ELEVENTH SUNDAY OF THE YEAR의 일부를 읽어보도록 한다.
Christ’s blood had the power to justify (vs. 9), i.e. to set humankind in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nd provided the basis for the believers hope for salvation. Paul underscored the certainty of this hope (vss. 9-10) by using a style of argumentation popular among Jewish scholars. Known as qal wahomer (Hebrew), this “how much more then” argument exemplifies the first exegetical rule of Rabbi Hillel. A contemporary of Jesus, the Babylonian born Rabbi Hillel had an academy (House of Hillel) in Israel and at one time was the leader of the Sanhedrin (Jewish high court). His first rule of exegesis, the qal wahomer was an a fortiori logical assertion which proceeded as follows: If A is true, then how much more does B. follow. Paul’s A-statement, “now that we have been justified by his blood” (vs. 9a) finds its logical conclusion in his B-statement: “It is all the more certain that we shall be saved by him” (vs. 9b).

그리스도의 보혈은 의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인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을 향한 신자들의 소망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을 유대 학자들 가운데 유명한 논증 형식을 사용하게 확실하게 드러냈다. qal wahomer(히브리어)로 알려진, 이 "더더구나[각주:2]" 논법은  랍비 힐렐의 첫번째 해석 규칙을 예시한다. 예수 당시, 바벨론에서 태어난 랍비 힐렐은 이스라엘에서 학파(힐렐 파)를 이루고 있었고, 동시에 산헤드린(유대 고등법원)의 지도자였다. 그의 첫번째 해석 규칙, qal wahomer은 다음처럼 처리되는 a fortiori 논리적인 주장이다. 만약 A가 진실이면, B는 더욱 더 그렇다. 바울의 A 진술,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9a)은 그의 B 진술에서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b)라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다.


:: 추가자료
Talmudical Hermeneutics
http://en.wikipedia.org/wiki/Talmudical_hermeneutics


  1. http://www.nazarenekabbalah.net/lesson7.pdf [본문으로]
  2. how much more then은 "하물며", "더욱더"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더더구나"가 그 의미를 더욱 잘 나타내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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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dusha

성서신학/용어정리 2007. 10. 4. 00:19
하루에 세 번 드리는 기도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읽어보라.
http://en.wikipedia.org/wiki/Kedus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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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3절에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룩하다"가 세 번 반복되는데, 이를 전문용어로 trisagion이라고 한다. 대역어로는 대체로 '삼성송(三聖頌)'이 쓰이고 있으며, 한철하 박사의 「고대기독교사상」에서는  '삼위성가'으로 번역했다.

삼성송 가사는 이렇다.

Αγιος ο Θεός, άγιος ισχυρός, άγιος αθάνατος, ελέησον ημάς


더 자세한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Sanctus를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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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ecism

고대언어/헬라어 2007. 9. 11. 21:23
단순한 불일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문법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Solecism은 순전히 실수에서 비롯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BDF §136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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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coluthon

고대언어/헬라어 2007. 9. 11. 21:06

파격문장은 신약성서를 주해하는데 중요하므로 숙지하도록 한다. 아직 적절한 대용어가 없어 파격문장(anacoluthon)으로 번역했다.


파격문장은 간단히 말해 문장 내에서 구문 변화로 정의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파격문장 (혹은 "anacolutha")은 문장이 하나의 구조에서 또 다른 구조로 갑자기 변경될 때 만들어진다. 문법적으로, 파격문장은 오류이지만,  수사학적으로는 흥미, 당황, 혹은 게으름을 보여주는 변칙적인 기법이다. 시학(poetics)에서는 때때로 극적인 독백과 시극(verse drama)에서 사용된다. 산문에서 파격문장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처럼 종종 의식의 흐름을 쓰는데 사용되는데, 이는 격식을 따지지 않는 인간의 생각의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대부분 제한적인 의미에서, 파격문장은 적절한 목적어 혹은 보어가 부족한 문장의 서두 요소(introductory element)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문장의 시작 부분에서 주어와 동사를 위치시키고나서, 직접 목적어가 주어지지 않도록 문장의 구조를 바꾸면 파격문장이 된다. 본래, 파격문장은 진술된 표현에서 내재된 표현으로 주어 혹은 동사를 변경시켜야 한다. 그 문장은 반드시 "완전하지 않은채로"("파격문장"이라는 문자 그대로) 있어야 한다. 문장은 주요어가 부족하여. 주어 없이 보어 혹은 목적어가 대신 보충한다면 파격절(anapodoton)이다.

변칙적인 기법으로 파격문장은 변칙적인 기법이기 때문에 직접 구문 자체로 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특히 시학에서, 의미의 목적어 보다는 의미의 구조에 흥미를 집중시키도록 한다. 그래서, 때론 시에서 거리를 두는 기법이기도 하다.[각주:1]


파격문장은 문법을 어긴 문장이다. 문법에 서툴러서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하지만, 고위적인 문학적 기법이기도 하다. 신현우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 가능하다.

주어(A), 주어(b) + 목적어/보어(C)

A와 C는 동일한 대상이며, C는 목적격, 여격, 소유격이 온다. 파격문장은 A를 강조하기 위한 고위적인 문법파괴이다.



독일어로 설명된 글은 여기를 읽어보라. BDF §466-470 참조.


업데이트 2008년 4월 14일
  1.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 http://en.wikipedia.org/wiki/Anacoluthon를 읽어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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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간 가장 자주 듣는 찬양으로, 반복해서 들어도 은혜롭다. 가수는 Bon Jovi, Kate Voegele, Rufus Wainwright, K.D. Lang 순이다.














"Hallelujah"

Now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It goes like this
The fourth, the fifth
The minor fall, the major lift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ou
She tied you
To a kitchen chair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You say I took the name in vain
I don't even know the name
But if I did, well really, what's it to you?
There's a blaze of light
In every word
It doesn't matter which you heard
The holy or the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I did my best, it wasn't much
I couldn't feel, so I tried to touch
I've told the truth, I didn't come to fool you
And even though
It all went wrong
I'll stand before the Lord of Song
With nothing on my tongue but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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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를 읽다가, '인클루지오'라는 낯선 용어를 보았다. 이 단어는 inclusio의 음역으로, 신학에서는 수미상관[각주:1]구조 혹은 포위구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래는 수미상관법에 대한 설명이다.

수미상관법[각주:2]이란 처음(머리:首)과 끝(고리:尾)이 서로관계가 있게 하는 문학적 '구성방법'으로 주로 詩에서 많이 쓰나 소설, 수필, 음악, 영화 등 모든 장르에서 활용되고 있는 구성방법입니다.

예를들면 '유치환'의에서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라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되어 마지막 행에서 다시'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다시 다짐하며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시는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수미상관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소월詩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나 '모란이 피기까지는...'조지훈의 중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등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특히 최근들어 수필(隨筆)에서 주제감과 문학성을 위하여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암시(暗示)를 주고 끝마무리를 할 때는 앞의 암시와 관계가 있는 끝맺음(결론)으로 문학성을 추구하는 구성방법을 말합니다.


출처 : 유미자님의 문학서재 "
수미상관법이란"


개인적으로는 '포위구조'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위키피디아 설명은 다음 링크를 읽어보면 되겠다. http://en.wikipedia.org/wiki/Inclusio

  1. '수미상응', '수미쌍관'란 동의어도 있다. [본문으로]
  2. 수미일치법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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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문화원에 영문번역 자원봉사로 제공한 글입니다.

출처 : 이스라엘문화원  "랍비가 들려주는 Torah 말씀 민수기 22장2절-25장9절"


미디안의 위대한 마법사 빌람이 "이 어리석은 암나귀!"라고 외쳤다.    
"이런 몹쓸 짓을 한 게 벌써 세 번째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겠다." 지팡이로 암나귀를 세차게 때리며 소리쳤다.
한편, 빌람을 안내하던 모압의 위대한 왕 발락의 사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빌람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은 이 암나귀를 평소에 타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말을 잠시 못 타게 되어, 최근에 이 나귀를 타기 시작했는데 가끔 문제를 일으키곤합니다”

갑자기, 뜻밖에도, 나귀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당신은 나를 세 번씩이나 때립니까?"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기적이로다! 당나귀가 말을 하다니!"
빌람은 녹음 메시지에 대답하듯이 암나귀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나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 손에 칼이 있었다면, 지금 내가 너를 죽였을 것이다!"  나귀가 빌람에게 말했다. "말해보세요, 빌람. 나는 당신이 오늘날까지 탄 당신의 나귀가 아닙니까?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빌람은 진리를 수용하도록 강요받았다. 그가 말했다. “없었다!” 그는 암나귀와의 논쟁에 졌다! (미드라쉬 – 민수기 22:28)

이 주의 내용은, 위대한 마법사 빌람이 유대 민족을 저주하는 대신 그들을 축복하는 모압 땅의 장면이다.

* * *
선지자 빌람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비유대인을 주셨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실패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마침내 빌람은 그 무렵 이미 음란했던 백성들로 하여금 더욱 음란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놀랍게도, 빌람은 유대 선지자들이 했던 것보다 더 유대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였다! 사실, 유대인이 회당에 들어가면서 암송하는 첫 번째 기도인 "마 토브(Ma Tovu)"는 다름 아닌 빌람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역주] 마토브 : 아침에 회당에 들어가며 읊조리는 회당에 대한 존경의 기도

* * *
발락 왕

토라에서 후에 발락이라 이름 지어진 파라샤의 구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의 가치(유대인들을 저주하도록 의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의 빼어난 후손(모압인 룻과 결국에는 다윗 왕까지)들의 가치는 그를 잘 나타낸다.
발락은 백성의 두려움과 백성들이 왕을 신뢰하지 않음을 보았기에, 그 자신이 행동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청년기의 모세를 알고 있는 미디안의 장로들의 충고대로  "모세의 힘은 그의 입에 있다." (영성 의미)라고  발락은 공언했다. "이번 경우에는 불에는 불로 맞서 싸워야만 하고, 그와 견줄 만한 영적인 사람을 찾아야 한다."
모압과 위대한 왕 시혼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서 “빌람의 저주”는 시혼을 전쟁에서 이기게 만들고 빌람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발락은 빌람에게 전갈을 보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 민족(유대인들)을 저주하고 그들로 중동 지역에서 떠나게 하라."

* * *
빌람의 비전

하나님이 빌람에게 나타나시고 물으셨다.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 이 말의 목적은 대화를 여는데 있으며, 하나님의 유명한 질문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또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와 유사하다. 빌람은 일신론자이지만, 여전히 주위로부터 우상 숭배의 영향을 받았고, 하나님이 인간적인 특징을 가졌다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다. "그는 모든 걸 알지 못한다. 그가 보지 않을 때 내가 그들을 저주할 수 있을거다.”라고  빌람은 생각했다. 빌람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크고 명백했다. "그 백성을 저주하지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민수기 22장 12절)

빌람이 정직했더라면, 그는 발락의 사절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저주하려 하거나 괴롭히려고 하지마시요. 그 반대로 그들을 환대하시요.” 하지만, 빌람은 그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 이것은 그 사절단들이 노력을 들일만큼 충분히 "높은 계급"이 아님을 내포한다.
발락이 그 다음에는 더 높은 계급의 사절단을 보냈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빌람에게 대답하시기를, "이번 모험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 이 말은 곧 "나는 네게 그들을 축복하라고 말한다."라는 의미이다.
빌람이 이 메시지를 전했더라면, 발락은 아마도 "그 모든 걸 잊어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빌람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호의를 위한 경쟁자로 보았으므로, 두려움으로 인해 동기가 주어진 발락 보다 더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빌람은 유대인들을 완전히 멸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했는데,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목적이었다.

* * *
천사와 마주하다

빌람은 일찍 일어나 자신의 나귀에 안장을 얹히고(나귀를 때린 아브라함과 경쟁), 말 없이 발락의 사람들과 떠나갔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바꾸신걸로 사절단은 잘못 간주하였다(몇몇 주요 종교에서 실수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공통적인 인류의 실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릇된 생각 때문에 자기의 길을 가는 빌람에게 진노하셨고(그에게 허락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멈추게 하기 위해 자비의 천사를 보내셨다.
당나귀는 천사를 알아봤지만, 빌람은 그렇지 못했다. 빌람은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기까지 당나귀를 때렸고, 나귀와의 논쟁에서 지고 나서야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마침내, 빌람은 그의 임무를 취소시키기 위해 준비된 천사를 보고 절했다. 천사가 깨닫게 하려고 물었다. "너는 왜 당나귀를 때렸느냐?"

질문: 빌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는차에, 그를 멈추게 하려고 보내진 천사는 빌람이 당나귀를 때린 것을 나무랍니다.
왜 그럴까요?

대답: 천사는 "네가 징조를 보았을 때 깨닫지 못하였느냐? 이 메시지는 전적으로 하늘에서 왔다. 만약 계속 가려고 억지를 부렸더라면, 너는 여전히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로 의도되어 있다. 현인들은 가르치기를 "삶의 길에서 사람이 선택하는 데로, 이끌림을 받는다!"라고 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찌니라."라고 말한 것을 염두에 두십시요. 또한 삶에서, 우리는 오직 당나귀만 인식하고 천사를 보는 데는 실패하는 상황에 처해지는 우리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랍비 Shlomo Wolbe)

주석자들은 당나귀 사건의 목적은 사람의 말(그리고 당나귀를 통한 말)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빌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빌람이 유대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 전능자의 대변인이 되려는 시점이라는 점이다. 그는 매우 자만심이 강하고 육체적인 쾌락(“호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은과 금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이뤄져 있다!)에 사로잡혀 있었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겸손이라는 주요덕목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나귀와의 논쟁에서 진 “비천한 경험”은 빌람에게는 결코 쉽게 잊지 못할 일이었다.


* * *
제단을 쌓다

빌람은 하나님께서 발락의 요청을 들어주시도록 제단을 쌓고 제물을 가져다 주도록 발락에게 요구했다. 제단의 수는 유대 족장들이 이전에 지었던 모든 제단 수와 같았다. 빌람은 그가 우리의 조상들과 경쟁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빌람이 신성한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할 때 갑작스럽게 하나님꼐서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세 번씩이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함으로써 발락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 * *
빌람의 축복

(1) 저주하지 않음: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랴?" (민수기 23장 8절) 그들이 저주를 받을 만 할 때 조차도(야곱이 아버지를 속였을 때, 혹은 세겜의 모든 고을 사람들을 시몬과 레위가 죽인 것에 야곱이 격앙되었을 때처럼), 그들은 저주를 받지 않았다. 이삭은 "그 역시 축복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야곱은 단지 그들의 노여움을 저주했다.
빌람이 말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 (여족장들과 족장들을 암시),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판단됨), 그리고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들과 같기를 바라도다!" 빌람은 유대인 같이 죽기를 원했다 – 비록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2) 하나님은 완전하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도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유대인들이 거하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왕의 친밀함이 있으시도다. 그들은 마법사나 마술사들이 아니며, 다만 전능자와 활기찬 관계이로다. 그들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서 그들의 적들을 밟아 누르기 전까지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민수기 23장19절)
현인들은 유대인들이 아침에 일어나 “탈릿과 테필린”을 걸치고 기도하며, 저녁에는 침상에서 쉐마를 암송하는 이런 토라를 지키는 모습에서 적을 이기는 공덕을 보았다고 말한다.

[역주] 탈릿(Tallit):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서 어깨까지 두르는 찌찌트가 달려있는 보자기 모양의 쇼올
[역주] 테필린(Tefillin) : 기도할 때 이마와 팔에 두르는 가죽끈으로 된 작은 상자들을 가리키며 성물이다.

(3) 마지막 축복: 빌람은 오직 모세만 도달했던 예언의 단계에 도달하였고, 자신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금 송아지의 죄에서 그들을 일깨울 수단으로 유대인들의 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침내, 빌람은 유대인들의 조심성에 매우 감명을 받아서(모든 텐트의 문이 다른 방향으로 향해있어서 아무도 자신들의 이웃의 집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빌람은 그들이 자신들의 적들을 완전히 멸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마지막엔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 (민수기 24장 9절)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제 더 이상 빌람이 그들을 저주하지 않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발락은 미래를 예언하는데 응한 빌람을 매우 못마땅해 했고, 몇 가지 치명적인 충고도 들었다. 그 후에 빌람은 초라하게 떠났다.

질문: 왜 하나님께서는 비 유대인 선지자에 의해 유대인의 본질이 명확하게 표현되길 원하셨을까?
대답: 빌람의 예언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울려 퍼졌다. 유대선지자들은 유대인들이 더욱 고귀해지도록 하는데 돕기 위해 건설적인 비판을 자주하였고, 유대인들을 격려하는데 더 적은 시간을 보냈다. 빌람은 유대인들의 고귀함과 그들의 전능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만방에 영원히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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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반

성서신학/신약 2007. 7. 23. 22:23

* 배경연구 과제로 제출한 내용으로 업데이트.


제물
이란 의미의
!B"ßr>q 음역된 단어로, 70인역에는 dw/ron으로 번역되었다[각주:1]. 구약에서는 제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지만, 1 세기에는 서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각주:2] 마가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11), 예수 당시에는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 십계명에서 명한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는데 악용되고 있었다(11-12). , 특정 인물들이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고르반이 사용되었다[각주:3]. 더구나, 고르반 서원은 취소 가능한데, 장로들의 유전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2). 제사장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사람들을 위해 쓰려는 목적으로는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각주:4], 남자는 50 세겔, 여자는 30 세겔을 내면 취소 가능했으며, 너무 가난하여 지정된 금액을 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제사장이 적절한 금액을 정해주었다(Josephus, Ant. 4.73)[각주:5].

  1.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chigan:Eerdmans, 2002) 286. 직접 확인해 보니 !B"ßr>q 구약에서 28( 1:2;2:1,4,12,13;6:13;7:14;9:7, 15;17:4;23:14,27:9, 11; 7:17,23,29,35,41,47,53,59,65,71,77,83;9:7,13,31:50) 쓰였고, LXT에서 모두 dw/ron으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2. Robert A. Guelich, Mark 1-8:26 Word Biblical Commentary 34A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89), 368. [본문으로]
  3.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286. [본문으로]
  4.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2002) 210. [본문으로]
  5. 샌더스는 필로의 Hypothetica 7.5 근거로 하여 제사장이 봉헌된 재산을 거절하거나 대제사장이나 왕과 같이 권위가 높은 자가 봉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합법적으로 선언하여 서원을 무를 있다(E. P. Sanders, Jewish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 54) 하지만, 확인해본 결과 Hypothetica 7.5 고르반은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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