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역사비평을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신학자들은 미가서 2장 12-13절이 산헤드립의 북이스라엘 침공이 이미 시작되어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상황을 목격한 직후에 적합하다고 해석하며, 복음주의 신학자들 조차도 예언과 역사를 끼워 맞추려다 보니 가끔씩 역사비평가들의 해석을 수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가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장래의 일을 미리 예측했다고 봐도 해석적 장애가 전혀 없다. 만약 장래에 주변 국가와 전쟁이 발생한다면, 현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있다면, 대략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중 어느 왕국이 먼저 침략 당할지 알수 있다. 당시 북이스라엘이 먼저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황이라면, 해당 지역 거주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중에서도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피난민들이 대거 모일 여지는 크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시온신학에 대한 간절함으로 투영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미가서의 언어가 애매모호하다고 지적한다. 내가 몇 달 동안 미가서를 읽고 분석해도 그의 기록은 불투명한 구석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애매모호함이 미가서가 사건 후 예언(vaticinium ex eventu, “prophecy after the fact”)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미가서에 사건 후 예언이 반영되어 있다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보존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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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앵커는 조성진에게 천재라는 정경화 교수가 당신을 천재라고 평가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조성진은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창조물의 연주자라고 답한다. 이 대답에는 독창적인 창조물을 만든 사람이 천재이며, 자신이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고 해도 창조물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는듯 하다.  


성서학 분야에는 뛰어난 해석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저마다 참신한 해석적 가능성을 제시하여 해석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하더라 결코 성경저자들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성경저자들은 저마다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증거하기 위해 치열한 내적 외적 갈등을 겪었고 그 결과물이 현재 성경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제 아무리 탁월한 해석자라고 한들, 저자를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노고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쇼팽의 곡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연주하는 조성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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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 창세기 49장 23-24절


Appealing though this image is, there is no intimation in Genesis of Joseph’s agile verbal self-defense against false accusation. Rather, he appears as the sufferer whose appeals go unheeded. 

- Gordon Wenham, Genesis 16–50,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2 (Dallas: Word, 2002), 485.


[번역] 이같은 심상이 매력적이지만, 창세기에는 잘못된 비난에 대한 요셉의 기만한 언어적 자기 방어에 대한 암시는 없다. 오히려, 그는 호소가 무시 당하는 피해자처럼 보인다.


적대자의 공격에 요셉의 반응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문맥상 요셉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힘이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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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를 읽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특이점들이 있다. 아직 내 견해를 뒷받침해줄 자료는 찾지 못해서,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한다. 비록 분열왕국 시대를 살고 있지만, 두 왕국은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인식이 있다.


2. 남왕국의 정통성을 전제하고 있다. 미가 자신이 유다 지역 출신이라서 그런지 예루살렘 중심적 사고가 나타난다.


3.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비록 미가는 다윗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다윗 왕조의 회복된다고 선포한다.


4.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할 때 보통 기도자는 언약에 기대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미가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름을 언급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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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예언의 의미

성찰 2018. 9. 13. 14:33

학계에 '사후예언'이란 용어가 존재한다. 이 용어는 예언서 연구 자료에 주로 등장한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과 그의 정의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술된 자료를 보지 못했다. 독일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걸 보아 독일 학자가 처음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문자 그대로 따져보면, "예언자의 죽음 이후에 선포된 예언"이라는 의미이다. 생각해보자. 예언자의 죽음 이후에 예언이 선포될 수 있나? 답은 자명하다. 없다. 그렇다면 이 용어를 통해 무슨 말장난을 하고 있는가? 이 용어는 후대 편집자를 가정하고 있다. 예언자의 죽음 이후 그의 예언을 편집했을 후대 편집자 말이다. 이 편집자는 예언자와 생애를 함께 하며 그의 예언을 자신의 머릿 속에 기억으로 담아두었거나 아니면 그의 죽음 이후에 발언들을 수집했을 수도 있다. 어떤 가정을 거쳐 예언자들의 선포를 모았을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어도 후대에 편집한 익명의 인물들이 있다고 가정한다. 바로 이들, 개인 혹은 집단으로 존재했을  편집자가 예언자의 죽음 이후에 예언을 삽입했다는 주장이 바로 사후예언이란 용어에 담긴 의미이다.


미켈슨(Mickelsen)은 두 가지 관련된 이슈를 논의한다(1963:289~294). 첫째, 예언은 단지 사건 후(자유주의자)나 사건 전(복음주의자)에 기록된 역사가 아니다. 사건 후 기록은 반(反) 초자연주의의 산물이며, 사건 전 기록은 과장의 산물이다. 두 가지 모두는 미래 사건에 대해 세부 사항을 계시하지만 많은 부분을 의문스럽게 남겨 두는, 예언의 기묘한 성격이라는 난관에 봉착한다. 구약과 신약 예언은 모두 모호하며, 실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면서 전체를 계시하지 않는다. 해석자는 신중하게 성취 이슈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 사건이 아니라 본문이 해석을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 그랜트 오즈번, 성경해석학 총론, 372-3.


분명 사후예언은 초자연주의를 부정하는 반(反) 초자연주의의 산물이다. 흔히 자유주의자로 지칭되는 이들은 예언자가 공표할 수 있는 미래상에는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에는 해석자들의 편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해석자들은 이미 완성된 형태의 성경을 보고 있으며, 문헌이나 고고학 등을 통해 풍부한 역사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때로는 해석자들의 지식,  추론능력, 성향 등에 따라 예언을 분석하기 때문에 실제 예언자가 의도한 바를 놓치기도 한다. 내가 볼 때 사후예언은 해석자의 한계를 드러 낼 뿐이지 예언의 한계를 드러내는 용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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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학자들의 등장 이후 본문 위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여러 비평 이론을 기반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주장되어 왔지만, 본문을 재배치해야 할 만큼 설득력을 가진 문제제기는 없었다. 오히려 독자들이 본문에 담긴 저자의 의도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뛰어난 학자들이 기존 해석들이 제시하지 못한 의미를 발견했는데, 그 덕분에 평이한 문장 배열 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결론내릴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이해가 한계에 부딪힌다면, 혹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해석적 한계를 벗어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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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2장 12-13절은 원래 4장 7절 이후에 위치했으나 언젠가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2장 12-13절이 심판 선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며,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회복에 대한 소망을 선포하지 않았고 오로지 심판만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선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학자는 선지자들의 이같은 예언이 논리적 연속성을 내포하지 않는다고 본다.


this passage concludes a major section of the book having the general pattern: doom, then grace, it must still be acknowledged that there is no logical or natural continuity with the foregoing.

- Delbert R. Hillers, Micah, Hermeneia: 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39.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대본 작가들은 비극 보다는 희망적인 결말로 이야기를 완성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영화 관람객들이 해피 엔딩을 기대하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비관적인 결말 보다는 희망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결국 삶의 원동력은 절망이 아닌 희망에 달려 있기 떄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인 회복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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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블렌킨소프(Joseph Blenkinsopp)는 『David Remembered』 128–30쪽에서 미가서를 다룬다. 주된 내용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이스라엘의 지도자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선한 목자 은유"와 비슷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지적한다. 아쉽게도 내 관심사인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의 등장"과 "목자 은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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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을 예고한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유래 없는 처첨한 멸망을 예언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이 곧 왕조 체제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윗과 같은 왕의 부재가 왕국의 멸망을 가져 왔다고 생각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 통치이념으로 사용했을 다윗 왕조 사상(Davidic royal ideology)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간주할 수 있고, 후대 사가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다. 하지만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탁월한 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그를 역대 왕들의 행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 왕들의 이상향이자 지향점이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거점으로 사역했으므로, 그들이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a new Davidic king)의 등장을 선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달리 미가는 남유다에서 예언사역을 했기에 다윗의 후손이 다시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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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와 호세아, 미가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이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예언 사역을 감당했으며, 미가는 남유다를 주활동무대로 삼았다. 세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구원 등 비슷한 내용을 선포했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윗 계열의 왕의 등장이다.


The themes of remnant, a good shepherd gathering a scattered flock, salvation from exile, and divine kingship find expression in the other prophets (Amos 9:11–15; hos 1:11; 3:1–5). But Micah's contemporary to the south develops more fully this sketch of Micah. Following a description of a new Davidic king who is a peace-bringer, there is the following prophecy:


(이하 생략)


- Stephen G. Dempster, Micah, The Two Horizons Old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7), 105–6.


이러한 차이점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지만, 그는 이스라엘 왕국을 상징하는 왕이다.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리를 겪게 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윗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진다. 남유다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부각한 반면 북이스라엘은 그러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모스와 호세아는 새로운 다윗 계열의 왕이 등장을 선포할 수 없었다. 반면 미가는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다윗 왕조의 부활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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