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지만 관습은 사람에게서 나왔다.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의 정신이 담겨져 있지만, 인간에게 그 심오함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지나친 현실적 적용은 율법을 수 많은 가지로 뻗어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헬라 유대인들은 "유대 법을 '관습'(Jewish laws as 'customs')으로 묘사했다."[각주:1]

  1. S. G. Wilson, Luke and the Law, 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 Monograph Series 5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10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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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 15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개역)라고 말씀하셨다. 원하고 원하였노라(evpiqumi,a| evpequ,mhsa)는 동일한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강조하였으므로 그 의미를 살려 열렬히 갈망해왔다고 해야 한다.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이토록 강렬하게 원하셨을까?

단순히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사랑하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저녁식사 가운데 행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으시기에 그토록 열렬히 갈망해 오셨다. 그 일이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찬식 규례 제정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규례를 지키심과 동시에 새로운 규례, 즉 성찬식을 제정하신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기에 치러야만 하는 아픔과 그 아픔만큼이나 우리를 사랑하심을 드러내시는 십자가. 그렇기에 이 땅에 온 목적이자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고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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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도한 이유는 떠오른다. 여러가지 기도제목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간구와 감사였다. 원하는 걸 구했고, 응답되면 감사했다. 점차 신앙이 자라면서는 구하는 기도는 줄어들었고, 원대로 되지 않아도 감사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얼마전부터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만한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과 가족, 친척과 가족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들과 조국을 위해 일일이 기도한다면 그만큼 유익이 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만 못하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복음 6장 3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한지를 아신다(31-32절). 하지만 이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그러면 이 모든 걸 더해주신다고 하셨다(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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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명기 6 4-5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BHS 6:4-5

`dx'(a, Ÿhw"ïhy> WnyheÞl{a/ hw"ïhy> lae_r"f.yI [m;Þv.

.`^d<)aom.-lk'b.W ^ßv.p.n:-lk'b.W ^ïb.b'l.-lk'B. ^yh,_l{a/ hw"åhy> taeÞ T'êb.h;a'äw

 

 

개역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매일마다 이 말씀을 암송한데다가, 70인경을 성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들으라”는 표현은 매우 익숙했다.

 

o` e;cwn w=ta avkou,ein avkoue,tw ( 있는 자는 들으라)

ΒΝΤ 8:8

a;koue Israhl (이스라엘아 들으라)

LXT 6:4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까?

 

이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야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15).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구원 받지는 않는다. 믿음은 실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이 무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믿었으나 배교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 말씀을 인내로 실천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르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으로써, 마음(bb'l)을 다하고 성품(vp,n<)을 다하고 힘(daom)을 다하여 믿음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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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서울: 이레서원, 2006) 중심으로 하고, 책을 인용할 경우에는 각주를 달지 않았다.

 

 

8

*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셨을 하늘에서 어린양의 주변에 있었던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앞에 엎드린다. 구절은 다음처럼 번역이 가능하다.

 

그가 책을 취하시자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어린 앞에 엎드렸으니, 향은 성도들의 기도이다 (사역)

 

*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생물과 이십사 장로 모두인가? 아니면 중하나인가? 답은 이십사 장로이다. 9절의 노래 성도들의 기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이십사 장로들이다.[각주:1] 이러한 이십사 장로들의 역할은 부분적으로 역대상 25 6-31절에서 언급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화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던이십사 레위인들을 반영한다.[각주:2]

 

* 향을 성도의 기도라 함은 시편 141 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각주:3] 누가복음 1 9-10절에서는 제사장이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 모든 백성이 밖에서 기도 드린다고 되어 있다.[각주:4]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향이 하늘로 올라가듯이 자신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여겼음을 있다.

- 문맥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언급되는 이유는 6 9-11절과 8 3-4절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본문은 인을 떼는 과정에서 소개되는 성도들의 기도이다. 기도들은 부분적으로 심판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반응으로 인이 때어짐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있다.

요한은 책의 인을 땜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성취되고 현상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보는 동시에,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다고 해석한다. 여기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정황과 관련시킨다면 기도는 고난의 상황에서 올려지는 기도라고 있다.

- 출애굽 사건은 40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요셉을 통해 구체적으로 준비되었던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다. 그러나 사건이 촉발되게 매우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출애굽기 2 23-25절에 나타난 대로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다.

 

9-10

*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노래에는 어린 양이 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이유를 담고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속제물이 되셨다(9). , 언약의 중개자가 되셨기 때문이다.[각주:5]

- 구원 받은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10).

 

* ‘ 노래 종말론적 성격

노래 시편 33:3; 40:3; 96:1; 98:1; 144:9; 149:1; 이사야 42:10 나온다.

- 시편에 나오는 노래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영감을 받아 표현한 노래로, 하나님의 주권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송축하고 있다.

- 42:10(“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거민들아 여호와께 노래로 노래하며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에서, “ 노래 종말론적이고 여호와의 나타나심과 관련 있다.

 

* ‘ 노래 창조

또한, ‘ 노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창조의 시작과 관련 있으며, 근거는 다음과 같다.[각주:6]

 

1)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4:11에서 언급

2) 5:12-13 찬양은 4:11 평행

3) ‘’(kainh.n) 21 1-2, 5절에 나오는 창조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4) 유대문헌(Midr. Rab. Num 15:11; Midr. Tanhuma Gen. 1:32; b. Arakhin 13b; Midr. Rab. Exo. 23:11 노래를 말하는 98:1 65:16 창조 본문에서 약속하는 메시아 시대에 적용)에서 노래는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 ‘ 창조 울려 퍼지게 되는 시점은 구속과 창조가 만나는 종말적 상황이 전개되는 순간이다.

 

*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일곱 사용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우주적 성격을 가진다(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326). 여기에서 로부터’(evk)라는 전치사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구속의 결과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 ‘사다’(hvgo,rasaj > avgora,zw)라는 동사는 값을 지불하고 어떤 사람에 대한 권리를 확보한다 의미를 가진다(BDAG). 이러한 측면에서 동사는 전쟁 포로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상업적 은유법으로 사용되었다(Fiorenza, 1985, 73-7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종으로 속박되었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확보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이유이다.

 

* 10절은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과 관련 있다.[각주:7] 시내산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으며,[각주:8] 대상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

 

* ‘ 노릇 한다 의미는 2:26-28에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철장으로 다스리는 권세혹은 새벽별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2:26-28에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는다는 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적 약속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높은 위치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며, 높아진 위치의 모델은 바로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이다.

 

11-12

* 많은 천사들의 노래로, 이들은 어린 양을 예배하고 있다. 하나님 외에 어린 양을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예수는 계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각주:9] 말은, 예수 역시 하나님과 동등한 예배의 대상임을 의미한다.[각주:10]

 

13

* 모든 만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을 찬양한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께 돌려져야 영광에 참여하시는 으로 여긴다.[각주:11]

* 이런 사건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늘 위에와 위에와 아래와 바다 위에와 가운데 모든 만물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천상적 관점에서 바라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과 구속의 계획과 그것을 이루시는 어린양 예수의 죽으심에 대한 우주적 반응이 어떠함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런 우주적 반응이 중요한 이유는, 책의 인을 떼시는 어린양의 구속 사건의 성취는 창조의 회복을 가져 오기 때문에 썩어짐에 복종하며 탄식하던 모든 피조물이(참조. 8:22) 이제 모든 짐을 벗고 온전한 조화 가운데 존재할 있는 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4

* 생물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아멘 용례는 다음과 같으며, 여기에서는 (1) 해당한다.[각주:12]

(1) 다른 이들에 말에 동감한다는 응답(5:14; 22:20)

(2) 찬양을 맺을 (1:6-7;7:12;19:4)

(3) 기도를 맺을 (22:21)

(4) 예수(3:14)

 

* 생물과 이십사 장로, 많은 천사들, 모든 만물 가운데 가장 감격스럽게 전심과 열정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무리는 누구겠는가? 그는 바로 이십사 장로, 어린 양의 구속사역으로 구원 받은 교회공동체이다(참조. 누가복음 7 40-43).[각주:13] 이십사 장로들이 침묵하긴 하지만, 그들은 엎드려 경배한다. 생물은 아멘으로 동감을 표현할 따름이지만,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한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기에 노래를 부를 아니라(9), 다른 무리들의 찬양으로 인해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14). 이런 경배는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드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에서는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예배를 그리고 있음이 분명하다.[각주:14]

  1. G. K. Beal, The Book of Revelation,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9), 357. [본문으로]
  2. Beal, The Book of Revelation, 357. [본문으로]
  3. Beal, The Book of Revelation, 358. Stephen S. Smalley, The Revelation to John (Downers Grove, Ind.: IVP, 2005), 135. 스몰리는 Justin, Dial. 118.2; Origen, Contra Celsum 8.17 참조하라고 한다. [본문으로]
  4. Beal, The Book of Revelation, 358. [본문으로]
  5. Smalley, The Revelation to John, 136. [본문으로]
  6. Beal, The Book of Revelation, 358. [본문으로]
  7. Beal, The Book of Revelation, 361; Smalley, The Revelation to John, 137. [본문으로]
  8. Smalley, The Revelation to John, 137. [본문으로]
  9. Richard Bauckham, 요한계시록 신학, 이필찬 (서울: 한들출판사, 2006), 95. [본문으로]
  10. Bauckham, 요한계시록 신학, 95. [본문으로]
  11. Bauckham, 요한계시록 신학, 96. [본문으로]
  12. Smalley, The Revelation to John, 141. [본문으로]
  13. 구절의 상황은 다르지만,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주는 사람을 사랑하듯이, 어린 양을 통해 구원 받은 교회공동체가 다른 무리 보다 주를 예배해야 이유가 가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더욱 감격스럽고, 전심과 열정을 다할 것이다. [본문으로]
  14. Bauckham, 요한계시록 신학, 9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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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2월 12일 최종 수정판


1. 원문의 진정성[각주:1]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2] 외증(외적 증거) 내증(내적 증거)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구절을 원문으로 없는 외적 증거가 여럿 있는데, 근거들은 크게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1)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2)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3)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내적 증거 역시 원문의 진정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1) 요한 문체가 아니다.

(2) 7:52에서 8:12로 이어지는 연결이 보다 자연스럽다.

 

(1) 문체가 요한 보다는 공관복음의 저자들, 특히 누가에 가깝다.[각주:3] 공관복음이 유사하긴 하지만, 누가는 특히 가난한 , 억압받는 ,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여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각주:4] parege,neto(그가 들어갔다) 누가가 2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뿐이다.[각주:5] pa/j o` lao.j(많은 사람들) 누가는 7 사용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다.[각주:6] 게다가, 공관복음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같이 언급되지만, 요한의 원문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각주:7]감람산”(to. o;roj tw/n evlaiw/n, 8:1)이라는 장소는 공관복음에서 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서만 언급된다.[각주:8] kate,krinen(정죄하다) avpo. tou/ nu/n(다시는) 역시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각주:9] 더욱이,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생”(8:4) 아닌 랍비”(참조 1:38) 규정한다.[각주:10]

 (2) 7:53-8:11 인해 앞뒤 문맥이 부자연스럽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각주:11] 오히려, 단락은 누가복음 21 38절과 근접하다.[각주:12] 그래서,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한 사본들이 발생했을 것이다.[각주:13]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셨던 상황에 어울린다.[각주:14]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8:2-6a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15]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간음이 혼자 짓는 죄가 아님에도, 여자와 함께 남자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각주:16] 추측해보면 범죄현장이 발각되었을 남자 혼자 재빨리 도망쳤다거나, 현장에서 잡아들일 있었는데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각주:17] 이러한 불공정한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녀는 죄인이다.[각주:18] 어쨌든 간에, 고소자들은 공정한 판결 보다는 예수를 딜레마에 빠뜨리는데 관심을 두고 있음은 틀림없다.[각주:19] 죽음으로 죄값을 치러야 하는 죄인이라 하지만, 회당에 끌려와야 했으며(2-3), 한낱 고소거리로 전략해버렸다(6a).

 

간음은 여자가 유부녀이거나 약혼한 처녀일 때에 간음이 성립하며(22:22-24),[각주:20] 고소자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했으니, 여인은 약혼한 처녀일 가능성이 크다.[각주:21] 22-22-24 보면 유부녀는 죽이라고만 했으나, 약혼한 처녀인 경우에는 돌로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쉬나(Sanhedrin 7:4)에서는 유부녀일 경우에는 돌을 던져 죽이도록( 심각한 죄라고 보았기에), 약혼한 처녀일 경우에는 목을 졸라 죽이도록 하였지만, 예수 당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스럽다.[각주:22] 결과적으로, 여인은 약혼한 처녀에 해당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여인이 유부녀이든 약혼한 처녀이든 간에,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과 처벌로 죽임을 당한다는 점이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a).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6b-9

예수께서는 즉시 대답하는 대신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6b). 예수께서는 무엇을 쓰셨을까?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레미야 17 13절로 근거로 해석해왔다.[각주:23]

 

u`pomonh. Israhl ku,rie pa,ntej oi` katalipo,ntej se kataiscunqh,twsan avfesthko,tej evpi. th/j gh/j grafh,twsan o[ti evgkate,lipon phgh.n zwh/j to.n ku,rion ( 17:13)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야훼 당신을 버리는 모든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당신을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역)

 

구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땅에 기록하셨다. 이러한 해석은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기록한다고 해서 어떠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각주:24] 이와 다르게 죄명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각주:25] 당시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으며,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 죄명을 기록하다(κατὰ τούτων καταγέγραφέν σοι)라는 의미로 쓰인 사례가 있다.[각주:2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고소자들이 주위에 모여든 무리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자 반복적으로 묻는다(7).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다. 율법에 따르면 죄인들을 죽일 때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으나(참조 13:9; 17:7),[각주:27] 예수께서는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것이다.

 

율법

예수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율법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율법대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하시지 않고, “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답하셨을까? 13:9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꾀임에 넘어가지 않은 자요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자이다. 17:7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범죄현장을 목격한 목격자이다. 구절에서 먼저 돌을 던지는 자의 조건이 다르다고 있지만, 죄를 짓지 않았으며 해당 범죄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해석으로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답하셨다.[각주:28]

 

말을 마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다(8). 여전히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길이 없지만, 이러한 행위가 예수의 답변과 어우러져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나도록 했다(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없는 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어른부터 젊은이들까지 명씩 명씩 자리에서 떠나, 예수와 간음한 여인만 남았다!

 

10-11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만 남아 있음을 보시고, 여자에게 너를 고소하던 자들, 너를 정죄한 자들이 하나도 없느냐?” 물으셨다(10). 여인은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신다(11).

여기서 예수의 반응은 다소 의외다. 여인의 간음죄를 처벌하지 않으셨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율법에 대해 해석을 달리 하시긴 했지만)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대로 행하라고 답하셨다. 그럼에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을 던져 악을 제하여야 자들이 자리를 떠나버렸다(9). 그래서 여인을 처벌할 자가 없어졌다(그렇다고 해서 간음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심판자가 되셨다. 고소한 자들이 죄를 처벌하지 않고 모두 떠나버려, 여인을 남겨두고 같으니, 예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공의로운 심판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답변을 주의하자. 예수께서는 죄가 용서 받았다 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더욱이 앞으로 범죄하지 말라 하셨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앞으로는 죄를 반복하지 않고 회개한 자로써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인자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1.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ed.),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4), 188-190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BC (Dallas: Word, 2002), 143-144 읽어보라. [본문으로]
  2. Andrew T.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New York: Hendrickson, 2005) 비롯한 몇몇 주석에는 구절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3. Gerald L. Borchert, John 1-11,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1), ***; Charles H. Talbert , Reading John (Georgia: Smyth & Helwys Publishing, 2005), 152. 보르헤르트는 o;rqroj(아침)라는 단어가 8:2 이외에 Lk 24:1; Acts 5:21에서만 쓰였다고 지적했는데,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빈도수로 따지면, 누가 문체에 가깝다. [본문으로]
  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5.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Borchert, John 1-11, ***. 보르헤르트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8(5:20; 12:38; 23:2, 13, 15, 23, 27,29;참조 의심스러운 본문 7:5 순서가 반대인 15:1), 마가복음에서 1(2:16; 참조 순서가 반대인 7: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이라고 7:1), 누가복음에서 3(5:21; 6:7; 11:53; 참조 순서가 반대인 5:30; 15:2) 쓰였다고 한다. ** 각주 7 확인 필요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8.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9.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0.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1.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2.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3.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5.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Borchert, John 1-11, ***;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카슨이 언급한대로, 고소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여자에게 두는 배타적인 남성우월주의자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예수를 모함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와 달리 여성들에게 관대했던 예수에게 여자 혼자만 데려와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가능성이 크다.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유대인들은 약혼한 여인은 약혼자의 아내로 간주하였다(참조 22:23-24). [본문으로]
  21.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336. 카슨의 지적대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을 쓴다고 해서 여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본문으로]
  25. Ibid. T. W. Manson 처음으로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6. BDAG, 516. 전문은 다음 페이지를 읽어 보라. Zenon Papyri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5.0092&query=head%3D%23141 (검색일: 2007. 11. 1) [본문으로]
  2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13:9; 17:7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카슨은 간음죄도 동일하게 처벌했다고 보는 하다. [본문으로]
  28. 예수의 대답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있다. [본문으로]
,

1. 원문의 진정성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1]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 가능하다.[각주:2]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굳이 여기에 삽입된 이유로는 7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8 15(너희는 육체를 다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설명하려고 했거나, 유대인들의 사악함과 예수의 없으심을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각주:3]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4]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본문이 간음한 남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아 저자의 관심은 간음한 여인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추측컨데, 혼자 저지르지 않은 (간음은 혼자 지을 수가 없다) 혼자서 치러야 한다는 형평성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각주: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힌 여인은 하나님의 계명이 지킴으로써 공평과 정의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보다는 고소거리로 전략시켜버렸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더구나, 예수께서 십계명을 지키시기 위해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했음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갔다(9).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기에 그들이 말없이 물러났을까?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다.[각주: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집단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범죄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분은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논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7:24 51, 8:15~16, 26,50절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다.[각주: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본문을 통해 진정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드러내고자 함이다.


** 알림 **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수정판)

  1. 김동수 박사의 <요한 신학 렌즈로 요한복음>에는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2.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Textual Commentary> 읽어보라. [본문으로]
  3.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4.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5.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7) 178. [본문으로]
  6.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79. [본문으로]
  7.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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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7장 1-23절 구조분석과 위치와 기능 과제물


1. 마가복음 7 1-23 구조분석

 

1-13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

 

 

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

A

 

6-13

예수의 대답

B

14-23

 

예수의 가르침

 

 

14-15

무리를 향한 가르침

C

 

17

제자들의 질문

A’

 

18-23

예수의 대답

B’

 

마가복음 7 1-23절은 크게 논쟁 내러티브(1-13) 가르침 내러티브(14-13) 구성되어 있다. 가르침 내러티브는 다시 가르치는 대상에 따라 14-15, 17-23절로 나눠진다. , 내러티브 안에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1-13), 예수의 무리를 향한 가르침(14-16), 예수와 제자간의 문답(17-23), 이렇게 단락이 포함되어 있으며, 구분은 예수가 상대하는 대상(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 제자) 따라서 나누어도 결과는 동일하다.

1-13절은 예수와 바리새인, 서기관의 논쟁이며, 14-23절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1-5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인데, 예수께서는 구약( 29:13; 20:12; 5:16 ) 고르반 사례를 들어 그들에게 반박하시고 나서야, 14-15절에서 무리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신다. 제자들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해 예수께 질문하는데, 이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1-5절과 평행이 되며, 그에 대한 대답인 18-23절은 6-13절과 평행을 이룬다.

1-5절과 17, 6-13절이 18-23절이 질문과 대답으로 평행을 이룸과 동시에, 14-23절의 예수의 가르침을 중점으로 샌드위치 구조(A-B-C-A’-B’) 나타난다. ‘부정한 관한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문제제기를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으로 확대하셨던 예수는 다시 무리를 향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더럽게 하는 무엇인지 가르치셨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C) 가장 극명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덧붙여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아무런 가르침도 주시지 않으셨고,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의미까지 설명하셨음을 보게 된다.

 

2. 위치와 기능

 

마가복음 7 1-23 앞에 위치한 6 53-56절은 게네사렛에서의 치유를 다룬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땅으로 건너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나왔으며, 예수께 손을 대는 자마다 성함을 얻었다.

마가복음 7 1-23 뒤에 위치한 7 24-30절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로,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사건을 다룬다. 이방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림으로 인해 유대인이신 예수께로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이방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셨으나, 예수께서 치유하시리라는 믿음과 자신의 딸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미천하게 여김도 꺼리지 않음을 보시고,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본문 앞뒤 구절은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치유와 귀신 쫓음은 회복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 앞뒤에서는 회복 다루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네사렛은 유대 지방이었으므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대체로 유대인이라고 있겠으며,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모두 예수께 나왔으며 회복함을 얻었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4절에서 시장에서 돌아와서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부지런히 씻는 규례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만남 조차도 부정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녀는 귀신 쫓음을 받았다. 이는 7 1-23절을 통한 정결규례개혁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렇게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 정결법 논쟁 -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구는 샌드위치 구조라고 있다.

정결규례개혁을 통해, 이제는 이방인들도 예수께로 나올 수가 있다. 1-23절을 통해 정결 규례를 개혁하신 예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자녀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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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씻기

성서신학/신약 2007. 10. 29. 23:51
* 배경연구 과제물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 때와 사이에 가까이 손을 씻어야 했다( 40:32). , 씻는 규례는 희생제물을 드리기 전에 제사장에게만 요구되었으며[각주:1], 식사와 관련하여 손을 씻으라고 규례는 율법에 없다[각주:2]. 바리새인들과 많은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대로 식사하기 전에 손부터 팔꿈치까지 씻긴 했지만(3), 예수의 제자 사람이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고 했으므로(2), 모든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규례라기 보다는 정결법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인들만의 규례였다고 봐야 한다[각주:3].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처럼 살아야 하고, 모든 유대인의 집은 성전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제사장에게만 적용되었던 규례를 엄격하게 지켰다.[각주:4]

  1. Joel Marcus, Mark 1-8 (NY: Doubleday, 2000) 449. [본문으로]
  2. 신현우, 마가복음 연구 강의안 2007, 63. [본문으로]
  3. Ulrich Luz, Mattew 8-20, trans. James E. Crouch(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1), 329. [본문으로]
  4. Joel Marcus, Mark 1-8, 449. [본문으로]
,

고르반

성서신학/신약 2007. 7. 23. 22:23

* 배경연구 과제로 제출한 내용으로 업데이트.


제물
이란 의미의
!B"ßr>q 음역된 단어로, 70인역에는 dw/ron으로 번역되었다[각주:1]. 구약에서는 제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었지만, 1 세기에는 서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각주:2] 마가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11), 예수 당시에는 재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여 십계명에서 명한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는데 악용되고 있었다(11-12). , 특정 인물들이 재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고르반이 사용되었다[각주:3]. 더구나, 고르반 서원은 취소 가능한데, 장로들의 유전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2). 제사장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사람들을 위해 쓰려는 목적으로는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각주:4], 남자는 50 세겔, 여자는 30 세겔을 내면 취소 가능했으며, 너무 가난하여 지정된 금액을 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제사장이 적절한 금액을 정해주었다(Josephus, Ant. 4.73)[각주:5].

  1.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chigan:Eerdmans, 2002) 286. 직접 확인해 보니 !B"ßr>q 구약에서 28( 1:2;2:1,4,12,13;6:13;7:14;9:7, 15;17:4;23:14,27:9, 11; 7:17,23,29,35,41,47,53,59,65,71,77,83;9:7,13,31:50) 쓰였고, LXT에서 모두 dw/ron으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2. Robert A. Guelich, Mark 1-8:26 Word Biblical Commentary 34A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89), 368. [본문으로]
  3. R. T. France, The Gospel of Mark, 286. [본문으로]
  4. 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2002) 210. [본문으로]
  5. 샌더스는 필로의 Hypothetica 7.5 근거로 하여 제사장이 봉헌된 재산을 거절하거나 대제사장이나 왕과 같이 권위가 높은 자가 봉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합법적으로 선언하여 서원을 무를 있다(E. P. Sanders, Jewish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 54) 하지만, 확인해본 결과 Hypothetica 7.5 고르반은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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