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조선일보 "[인터뷰]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김종일 PD"


"하고싶은 이야기 30% 만 소화..그래도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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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모태신앙
..그러나 성역은 없다"

"기독교가 모태신앙입니다. 하지만 PD로서 성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던진 SBS TV 4부작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을 연출한 김종일 PD는 지난 3주 큰 홍역을 치렀지만 무척 담담한 모습이었다.

지난달 29일 다큐의 1부 방송을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방송 취소를 요구하고 나서고 목동 SBS 사옥 앞에서 시위를 펼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한기총의 반론 보도 요구를 거절한 SBS가 우여곡절 끝에 13일 마지막 4부 방송을 몇시간 앞두고 반론 보도 요구를 수용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일단락됐다.

15일 오후 목동 SBS에서 만난 김 PD는 "방송이 다 끝나 속시원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방송이 끝났다. 소감이 어떤가.

▲솔직히 이 다큐를 기획하고 만들 때는 이런 반발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회를 겨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견이 있어도 반발이 심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프로그램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나.

▲30% 정도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할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면큰 상처없이 방송을 마친 것이기 때문에 만족한다.

--다큐의 기획 동기는 무엇인가.

▲기독교가 모태신앙이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기독교와 교회를 접하며 자랐다.

사춘기 시절부터 의문이 생겼다. 교회 안팎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 시골 작은 교회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 등을 보며 잘은 모르지만 뭔가 왜곡돼있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PD가 된 후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002년 티모시 프리크의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읽은 후 그 생각이 더 구체화됐다. 지난해 5월 내부에 기획안을 올렸지만 통과가 안되다가 아프간 피랍 사태가 발생하자 종교간소통과 화해를 모색하자는 취지로 기획안을 좀 수정하면서 제작 승인을 받았다. '신들의 고향을 가보자'는 취지로 기획했다.

--취재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

▲이란에 가보니 이슬람 시아파와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여러가지가 비슷했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선교가 금지돼있고 거기서 개종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이란에 선교를 하러 간다.

그런데 선교하러 나서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이슬람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해봤더니 60%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남의 종교를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선교하러 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있나. 다큐의 2부에서는 선교를 하려면 그들의 종교를 알고 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의 신과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가야하는 것 아닌가.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의 믿음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제기하는 것처럼 논리가 크게 소용없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종교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종교적 문제가 사회와 연결돼 있다. 개인의 문제, 개인의 신앙에 머물면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우리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프간 사태 후에도 이슬람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나간다.

종교에 대해서는 성역 운운하는데 21세기에 성역이 어디있나. 읽지 말아야하고,보지 말아야할 것이 어디있나. 가치 판단은 시청자의 몫 아니겠는가.

--한기총의 반론 수용을 거부하다 마지막에 받아들였다.

▲내부 PD들 대상으로 시사회를 했더니 '반론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또 종교간 소통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한기총의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고, SBS 앞으로 몰려든 선량한 신도들의 신앙도 존중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또 한기총이 반론을 보도하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왔기 때문에 마지막 4부에 그들의 반론을 수용했다.

--영국에서 교회가 사라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등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선도 제기했다.

▲영국 세속주의협회장이 "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옮겨갈 뿐이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한국의 전자 오락 열풍을 종교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게임을 통해 자기를 초월한 어떤 존재를 꿈꾸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종교간 화해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프로그램에 소개한 개신교 원로 김경재 목사(삭개오 작은교회)의 말씀에 공감한다. 세상에는 유일신이 존재하는데 모든 종교는 그 유일신으로 가는 여러갈래의 길이라는 것이다. 길은 다르지만 그들이 섬기는 신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갈래의 길을 인정해야 다른 종교와 상생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중동에서 보는 태양이나 한국에서 보는 태양이나 다 같은 태양이라는 얘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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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약성경과 고대근동 "“가브리엘 묵시록”과 SBS의 “신의 길 인간의 길.”"


예수 그리스도와 오시리스


왼쪽의 여인은 이시스, 중앙 인물은 오시리스


SBS의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때문에 요즘 한국 기독교가 바짝 긴장하는 듯하다. 기독교의 복음을 구성하는 주요 사건, 즉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세례, 고난, 죽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오시리스-디오니수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아류 신화에 불과하다는주장은 비록 새로운 것도 진지한 학계의 의견도 아닌 황당한 가설에 불과하지만 한기총과 같은 단체가 SBS 사옥에서 단식 농성을 벌일만큼 일반 기독교인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SBS 스페셜을 챙겨보지는 못했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Frekke와 Gandy가 공저한 The Jesus Mysteries의 주장을 그대로 재탕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를 이집트 신화의 아류로 보는 관점은 제대로된 학문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의 심정적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장 근사한 예가 Zeitgeistmovie.com로 대표되는 운동이다. 그러나 오시리스 신화를 자세히 살펴 보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지는 유사성은 기껏해야 피상적임을 알 수 있고, 설사 그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발견된다해도 그 유사성이 인과적 영향 관계를 보장하지 않음은 학계의 상식이다.

 

피상적 유사성이라는 의미을 부연하기위해 오시리스가 예수님처럼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예수의 신비>의 저자 프레케(Freke)와 갠디(Gandy)의 주장을 예로 들어보자(The Jesus Mysteries, p 5). 첫째 오시리스의 어머니는 누트라 불리는 여신인데 누트가 처녀였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처녀라는 호칭은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에게 주어졌다. 오시리스는 어머니 누트(Nut)와 아버지인 게브(Geb)의 성관계를 통해 잉태된다둘째, 고대 근동 여신이 처녀라는 호칭을 가졌을 때 그것은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것, 즉 남자의 도움없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처녀라는 호칭은 남자없이 아이를 임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늙지 않은 미모를 가진다는 의미로, 이 호칭은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에게도 붙었고 바알의 아내이자 누이인 아나트(Anat)에게도 붙었다. 나아가 이 호칭을 가진 여신들은 보통 넘치는 성욕을 가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자녀도 거느린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동정녀 잉태의 개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런 비교의 피상성 이회에도 오시리스 신화의 수많은 버전들 중 어떤 것이 복음서 저자들에게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은 오시리스 신화와 복음서 간의 비교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다양한 버전의 신화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각각의 생성 연도 또한 전혀 알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오시리스 신화를 플루타르크의 보고에 근거해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무작위로 비교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며 의미있는 비교가 전혀 될 수 었다. SBS의 다큐멘타리의 유일한 순기능은 일반인들 사이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높였다는 것이다.


가브리엘 묵시록


주전 1세기 토판, 사해 동쪽 지역에서 발견, 빨간 잉크로 기록
 

지금 미국에서 다른 이유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일반인 사이에 높아지고 있다. 가브리엘의 환상 (Vision of Gabriel) 혹은 가브리엘의 묵시록(Gabriel’s Revelation)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문서는 사해문서 유일하게 양피지가 아닌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60센티미터의 토판에 빨강 잉크로 기록되었다. 토판은 이미 10여년 전에 발견되어 스위스의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보관되었으나 본격적인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야르데니(Yardeni) 엘리쭈어(Elitzur) 사해토판의 연구 번역을가브리엘의 환상”(Vision of Gabriel)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이다. (히브리어 원문과 영문 번역은 Biblical Archaeology Review홈페이지에서 있다).

 

학자들은 가브리엘 묵시록 기록된 때를 기독교 생성 이전인 주전 1세기로 본다. 히브리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이스라엘 (Israel Knohl) <종교 저널>(The Journal of Religion) 봄호에서 묵시록이 고난받아 죽은 삼일만에 부활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예수님 바로 이전 시대(2성전기) 유대인들에게는 죽고 부활하는 메시아 개념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종종 증거로서 인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부학자들은 기독교의 핵심을형성하는 죽고 부활하는 메시아 이미지가 (이방 신화의 영향을 받은) 후대 기독교인들의 조작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수에 따르면 가브리엘 묵시록 고난받고 부활하는 메시아 사상이 기독교 생성 이전에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해준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의 묵시록에는 정치적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 이외에 고난받는 메시아의 상징으로서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이 등장한다. 시카고대학 교수인 피쉬배인(Fishbane) 따르면 예레미야 3:18, 호세아 11:1-9절에도 고난받는 메시아의 상징으로 에브라함이 사용된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 묘사되는 점과도 연결된다. 또한 요셉 자신도 고난받는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사실은 2성전기 문서인 벤자민의 증언”(Testament of Benjamin 5:8)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곳에서 야곱은 요셉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흠없는 자가 무법자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죄없는 자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대신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너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고난받고 죽는 메시아는 가브리엘로부터 부활을 명령 받는다. 교수는 가브리엘의 묵시록 80-81열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삼일 만에 부활하라!’ 가브리엘은 왕중의 , 너에게 명령한다.”

 

물론 교수의 해석이 학자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몇가지 해결되어야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문서가 골동품 상인에 의해발굴되어 발굴당시의 상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 토판에 글이 새겨진 것이 아니라 빨간 잉크로 기록된 등은 사해 토판 자체의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킬 있다. 또한 교수의 해석은 마모된 본문의 재구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묵시록 기독교의 핵심, 고난받고 부활하는 메시아가 유대교적 뿌리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증거를 제시한다. SBS “신의 인간의 지닌 치명적 약점이 기독교가 가진 유대교적 뿌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가브리엘 묵시록 기독교의 유대교적 뿌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가브리엘 묵시록을 보고 기독교복음의 독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있겠지만, 신앙인들에게 가브리엘 묵시록은 SBS ‘신의길 인간의 혹은 짜이트가이스트무비(www.Zeitgeistmovie.com) 대표되는 노선, 기독교가 이집트 신화의 아류라는 주장을 넘어서는 도구가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가브리엘 묵시록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주어진 메시아 사건임을 상기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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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앤조이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은 표절"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반기독교 소설류인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그대로 베낀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4부작 중 첫 편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가 6월 29일 밤 11시 20분부터 한 시간 동안 방영됐다.

불공정한 내용을 케이블이 아니라 그것도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다는 사실은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 제시와 그 논리전개 방식의 문제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적되어 이미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허구 소설류인데, 이번에 SBS 스페셜이 전적으로 거기에만 의존하다시피 하면서 특집방송을 만든 것은 공익방송으로서 스스로 그 위상을 격하시킨 부끄러운 사건이며 동시에 정통 기독교에 대한 무책임한 폭거이다.

그러면 필자가 이번 방영된 SBS 스페셜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집트 신화인 ‘오시리스 신화’에 관해 살펴보자. 오시리스 신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서기 40~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크에 의해서다. 다시 말해, 단군신화가 일연에 의해 조선시대에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 그 유래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플루타르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후 10년 내지 40년이 경과한 때에 출생한 인물이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집대성한 사도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을 다 기록한 이후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한 철학자이다.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쓴 때를 아무리 빨리 잡아도 70~80년경이므로, 이미 그때는 신약성서의 기록이 거의 마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시기가 맞아 떨이지지 않는다.

둘째,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를 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 프리크가 플루타르크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라는 책을 표절한 것이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이집트인에게 농사를 짓는 법과 여러 신들에게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오시리스의 동생인 세트는 이것을 시기하여 자기 형인 오시리스를 잡으려고 교묘하게 수작을 꾸며서 자신이 만든 관 속에 눕히게 된다. 후에 오시리스는 세트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14개로 토막이 나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리스처럼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오시리스가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통치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면서 당대에 정치적 메시아만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주권을 온 인류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다.

셋째,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와 같은 고대 이민족들의 신화가 간직하고 있는 다신론적인 내용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 말은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신화는 무엇인가? 그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플루타르크는 이집트 신들의 이름 대신에 로마 신들의 이름으로 대체하여 오시리스 신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신론적인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사상에 철저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배격하고, 죄에 빠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표현 방식도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신화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들의 진술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는 신화와 달리 사건이 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사역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구원과 은혜와 평강이다.

넷째, SBS 스페셜이 티모시 프리크를 인터뷰 전면에 내세워서 그의 주장들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 것은 한국의 청취자들을 우롱한 처사이다. 더구나 SBS 스페셜 제작진이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단지 방송 초두에 책 표지만을 보여주고 이미 내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나 인용 제시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가져다가 마치 자기들이 학문적으로 신약성서와 비교를 한 것과 같이 청취자들을 현혹시킨 것은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 검증되지 않은 망상을 무단으로 사용한 일이므로 너무나도 중대한 표절행위이다.

과연 SBS는 티모시 프리크와 특히 그 책의 공저자인 피터 캔디에게 허락을 받았는가? 이는 마치 SBS 스페셜 제작진이 무슨 학자라도 된 듯이 착각하고 청취자들을 기만한 행동이 아닌가? 필자는 이러한 SBS 스페셜의 표절 행위에 대해서 마땅히 그 담당자들에게 엄한 책임을 물어야 공적 기관이 취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SBS 스페셜의 기획의도에 의하면, “본 프로그램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원을 <예수는 신화다>라는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의 저서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결론적으로,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가 이미 서구와 국내 학계에서 그 학문적 가치가 없는 일종의 기독교 비하 소설류로 결론이 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이번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 SBS는 공익 방송으로서 그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져야한다. 물론 일부 네티즌들이 이번 SBS 스페셜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 혹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의 표출이며 또한 제대로 실상을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 치기인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공인이라면 스스로 자중 자해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SBS는 이번 스페셜 방송 파행과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단순하게 무마하고 해명만을 할 것이 아니라, 차후에 유사한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청취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제기를 SBS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소개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번에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를 표절하고 더 나아가서 공정하지 못하게 특집 방송을 만든 담당자들을 엄히 문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후에 기독교계가 SBS에 대하여 법적으로 그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소기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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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와 제 4 부 평론>


정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 참된 본질의 회복의 길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 3 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는 제국주의와 함께 전파된 영국의 기독교가 선교지에서 어떠한 반응을 낳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원주민 문화에 관한 이해가 없이 유럽 문화의 절대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제국주의적 선교는 바누아투의 타나 섬에서처럼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선교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병행되어 힘에 의한 강압이 이루어질 때에는 오히려 원주민의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문화 코드에 둔감한 영국의 기독교는 타 문화권 선교에만 실패한 것이 아님을 이 방영물은 잘 보여주었다. 영국의 기독교는 영국 내에서 다음 세대를 선교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기독교가 한 시대의 문화에 적응한 후 그 시대의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게 되면 전통을 싫어하는 젊은 세대는 기독교를 전통의 일부로 간주하며 거부하게 되어 있다. 이 방영물은 미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현대 문화 코드에 잘 적응한 측면이 있음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 역시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여 화석화된다면 타문화권에서는 물론 미국의 다음 세대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 방영물은 기독교가 왕성한 미국 사회에 범죄율이 매우 높은 것은 양극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진단한다. 미국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미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심하다. 즉 미국 사회는 아직 기독교적인 사회는 아니다. 한편 유럽의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이 감소하고 있지만 유럽 사회는 그 동안 성경에 담긴 약자 보호의 정신을 꾸준히 체화하여 왔다. 그리하여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고 범죄율도 낮다.


한국 기독교의 문화 적응은 미국의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영국처럼 전통 문화와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현대 문화에 완전히 개방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적으로 감소하겠지만 영국처럼 급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한국 기독교가 계속 성장하려면 과거 교회 전통의 틀을 과감하게 개혁하여야 한다. 교회 문화와 복음을 혼동하지 말고 복음은 유지하되 전통 교회 문화는 얼마든지 개혁하고 새로운 문화 코드에 개방되어야 한다. 개혁과 개방은 한국 기독교가 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이 한국 사회를 참으로 발전시키려면 한국에서 성장하는 기독교가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성경적 기독교여야 한다. 미국식 기독교는 자본주의처럼 경쟁과 성장에 익숙한 기독교이지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 있는 기독교가 아니다. 유럽식 기독교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할 수는 정신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정신을 한국에서 실천할 만한 영향력을 가질 만큼 성장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면서도 성장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에 한국 기독교에 주어진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 그런데 양극화 현상의 해소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성서에 담긴 핵심 메시지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한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가난한 자들, 자유가 없는 자들, 힘이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자들이 발생하지 않는 장치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것이 제7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탕감하는 빚탕감법, 6년 동안 종을 부린 후에는 풀어주는 노예해방법, 대토지소유를 금지하는 토지법 등이다. 이러한 법의 정신이 체화되는 사회 속에는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이러한 법의 정신을 더 철저화한다. 예수께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자에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신다(마가복음 10:21).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11:4)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이 기획물 제 4 부 “길 위의 인간”은 자신이 선 교리적 입장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이와 다른 입장을 모두 부정하는 근본주의적인 사고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빈 라덴이나 조지 부시나 모두 이러한 근본주의자들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선의 자리로 여기고 적이 선 자리를 절대적인 악의 자리로 여기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이 되는 약점을 보이는데, 미국의 경우 근본주의자들은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복지정책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지적된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따른다는 근본주의자들이 어떻게 성경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본문의 문맥이나 본문의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세상을 선한 편과 악한 편으로 단순하게 나누고 자기가 속한 편을 무조건 선한 편이라고 여기는 미성숙한 세계관과 만나 기독교를 천박하게 타락시킨다.


이 방영물의 제4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사탄, 종말, 천국의 개념이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며 세 종교를 모두 상대화한다. 화해와 소통을 위해 방해가 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이 모든 종교들에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상대주의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각 종교들을 피상적으로 비교하여 발견된 유사성을 토대로 이 종교들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고유한 것만이 진리일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근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를 권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자주의적 이해를 극복하기 위해 본문을 독자가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없음과 같다.


근본주의를 극복하려면 각 종교인들이 각자의 종교의 본래적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종교를 문자주의적으로 왜곡하여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한 시대의 문화와 결합하고 그 문화를 정통 교리인 것처럼 고집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는 성서에 담긴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예수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거듭나지 않고 성서의 정신과 관계없이 성장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무관하며 성서와도 관계없다. 본질의 회복은 개혁과 개방보다 먼저 수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본질이 회복되지 않은 기독교는 성장할 필요가 없으나, 본질이 회복된 예수교는 그 생명력에 의하여 스스로 성장할 것이다.


미국 못지않게 양극화된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양극화를 부추기는 정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세력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러한 선택은 단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 선택이며 선교적 선택이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권력과 재물을 택하는 잘못을 범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젊은 세대를 선교하지 못할 것이며 유럽의 기독교처럼 쇠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는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편에 서지 말고 권력자들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기독교가 권력과 재물의 길을 택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하나님의 길과 병행하려고 하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길 위에서 근본주의라는 가면이 우상숭배적 상대주의라는 실상과 만나는 모습이 진리를 믿지 않는 거짓 종교인들의 정체이다.


근본주의를 하려면 정치적 의도 없는 순수한 근본주의를 취해야 하며, 상대주의를 하려면 종교의 탈을 벗어버려야 한다. 대개의 신앙인들은 대개 근본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은 다른 모양의 폭력이다. 참으로 비판받아야 할 자들은 양처럼 순수한 근본주의자들의 신앙을 이용하는 이리떼들이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탈을 쓴 상대주의자들로서 자기들도 믿거나 따르지 않는 근본주의 교리를 가르치며 권력과 재물을 취하며 명예마저도 누리고자 한다.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항상 적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화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본인들이다.


이 정치적 근본주의자들 못지않게 화해와 소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경전을 모독하며,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독한다. 또한 예수의 역사성과 신성을 부정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폄훼하는 데 지극히 열심이다. 이들은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왜곡하는 일본인들 못지않게 이웃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남이 믿는 신앙을 짓밟으려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는 종교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정으로 의심하려면 자신들의 불신앙의 절대성마저도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영물은 방송 초기(제 1 부)에 반기독교적 성향을 보인다. 이것은 방송의 흥행을 위해 반기독교적 탈을 쓴 것이므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근본주의의 탈을 쓴 정치적 근본주의와 유사한 모습이다. 또한, 특정 종교의 신앙의 폄훼하는 것은 종교들 간의 화해와 소통을 위한 이 기획물의 목적에 맞지 않으므로 이 기획물은 자기모순을 범한 셈이다. 결국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은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하여서라도 흥행하려는 “인간의 길”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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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 폭력과 저항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 정의와 자비의 길로 -


 지난 7월 6일 밤에 방영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2부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는 이슬람에 관해 소개하며,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화해와 소통의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의 경전이 예수를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선지자라고 기록하며 또한 무슬림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이 화해의 접촉점으로 제시된다.

 또한 이 방영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과 소통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이 극복해야 하는 차이점들도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을 믿되 이슬람은 예수를 신으로 믿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비폭력과 사랑이 강조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연 이슬람과의 화해를 위하여 더 이상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그저 위대한 선지자로 믿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리적 문제만 극복하면 이슬람이 기독교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십자군 전쟁이나 이라크 침공 등의 군사적 폭력에 지지를 표한 실천적 행동 때문이다.

 이슬람이 폭력의 사용을 중단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하면 기독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는가? 이슬람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한다면 미국이 아랍 지역에서 가진 석유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 세력의 무력 사용이 계속 되고 경제적 착취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 세력의 대응 폭력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사용하는 폭력은 서방 세계의 폭력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 세계의 권력자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아랍 지역을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침공하기를 즐겨왔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돈에 눈이 먼 서방 세계의 권력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지원 아래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슬림의 저항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말고 그저 선지자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것은 무슬림에게 기독교와 화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경전과 무함마드를 버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요이다. 화해와 소통은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는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정된 죄명으로서의 신성모독과 관련된다. 대제사장이 “네가 메시아냐?”고 질문하자, 예수는 “그렇다. 내가 권능자(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4:62). 여기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아니다. 메시아는 순교자 저스틴(Dial. Trypho 49)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단지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다. 신성 모독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에 발생한다. 자신의 정체를 단지 메시아일 뿐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고 밝힌 예수의 주장을 인간들이 부정한 것이 예수의 죽음이었고, 이러한 예수의 주장을 하나님께서 긍정한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때 그를 신적인 존재로 믿게 되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결론 내렸지만 돌로 치는 종교형에 처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 정치형인 십자가형을 받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를 나무 형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신명기 21:23)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선언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저주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사건(부활)이 없이는 예수가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믿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해 율법의 저주 선언이 무효화되고 예수가 메시아로 믿어지게 될 때에는 예수의 주장대로 신적인 메시아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 기획물의 제 2 부는 이슬람의 문제점이 그들의 경전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잘 지적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점도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세계 속에는 사랑과 용서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속에 들어온 이 암세포는 오늘날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암세포는 속으로 기독교를 부패시킬 뿐 아니라 밖으로는 타종교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든다.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된 데에는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거짓 기독교인들의 공로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실상을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가리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기독교의 이미지마저도 실추시키고 기독교 복음의 전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십자군 전쟁은 아랍 지역의 선교를 힘들게 만들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이슬람 세계가 미국과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통치의 경우에도 인도네시아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무슬림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슬림이 이슬람 세계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먼저 명분을 준 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 준다는 핑계 아래 세속 정권이 하는 사악한 일을 지지한 사이비 기독교 세력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은 사람이 소에게 제공한 동물성 사료이듯이 이슬람의 폭력성의 원인은 서구 세계가 아랍 세계에 제공한 폭력과 착취이다. 이러한 폭력과 착취를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면 이슬람 세계는 말로는 예수를 전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비일관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눈앞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비성경적인 국정운영에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하며,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불신자들에게마저도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단체들은 결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지 말고 자신을 비워 아낌없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만이 참으로 예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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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평론"


 SBS가 기획하여 지난 6월 29일에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제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키며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한다. 이 기획물은 버미스(G. Vermes), 크로산(J. D. Crossan) 등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였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비교적 여과 없이 소개하고자 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물은 모든 편집물이 그러하듯이 보이지 않는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 주관성은 인터뷰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드러난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 전문가는 크로산이 유일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크로산은 비중 있는 학자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은 학계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 하나를 대변할 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미국의 마이어(J. P. Meir)와 샌더스(E. P. Sanders), 독일의 타이센(G. Theissen), 영국의 라이트(N. T. Wright) 등이 중요한데, 이들이 제외되고 크로산의 입장이 마치 정설인 양 소개되는 인상을 주며 방영물이 결론 내려진 것은 유감이다.

 크로산의 주요 방법론은 다중 증언(multiple attestation)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지만, 타이센, 샌더스, 라이트 등이 사용하는 “설명가능성 원리”를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비유사성 원리”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방영물에서 크로산은 요세푸스, 타키투스 등의 다중 증언에 입각하여 예수의 존재의 역사성을 변호한다. 이것은 이교도 신화에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허구라는 가설을 논박하는 중요한 논증이다. 그의 논증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유사성은 영향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유사한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미쳐서 발생하였을 필연성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가 그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 없이 단지 이야기 차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사성에서 인과관계를 끌어내는 논리적 비약이다.

 저자들은 어떤 사건을 서술할 때 유사한 평행구절들에 관한 독자들의 지식을 활용한다. 즉 저자들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독자들의 선이해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전달되어진다. 그리하여 여러 본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이러한 유사성의 면밀한 관찰이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현상을 간본문성(intertextuality)라고 부른다. 복음서 본문의 해석에는 구약성서, 중간기 문헌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구약성서과 중간기 문헌의 세계 속에 사는 저자들이 그러한 세계 속에 사는 독자들에 그들이 공유하는 언어 세계를 토대로 의사소통을 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본문성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본문 뒤에 놓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과 유사한 옷을 입은 사람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궤변이다.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 “설명가능성 원리”를 도입한다면 한 가지 비판을 더할 수 있다. 예수가 실재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가 과연 허구라면 그렇게 창작된 이야기를 믿고 기독교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허구 이야기를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고 죽음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예수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설은 기독교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타당성이 없다.

 이 기획물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신의 아들,’ ‘천국’의 개념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개념에 관하여 꼭 언급하여야 하지만 빠뜨린 것이 있다. ‘신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칭호이다. 4 Ezra 7:28(“나의 아들 메시아”)뿐 아니라, 쿰란문헌(4Q246 2:1)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 ‘메시아’라는 칭호에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을 담아 사용하며 고대하였으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 때, 이러한 개념에 따라 예수를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적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그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주)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후(마가 14:25)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심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마가 15:36).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취임하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획물의 의도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소통을 위한 것인데, 이러한 소통은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소통을 위하여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파괴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를 메시아(즉 하나님의 아들)라고 선언한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발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따라(신명기 21:23)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발생은 예수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부활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예수 자신의 주장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받아들어지게 하였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를 묻는 이 기획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건드렸으나 ‘신의 아들’의 개념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게 된 배경인 십자가와 부활을 간과하였다. 예수를 정치적 이념을 가졌던 한 독특한 유대인에 불과했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인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획물은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파괴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도전 앞에 반응하며 수천년을 지내왔으며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도 언제든지 다루어지며 응전되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에는 많은 항체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획물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체가 없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참으로 해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부패이다. 어느새 기득권층이 되어버리고 기득권층과 타협하고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에는 미래가 없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힘으로 선교를 하려는 승리주의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하거나 정권을 창출해도 그것은 자멸의 길일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기획물을 두고 분노할 때가 아니라 복음을 말로 왜곡하는 목회자들과 행함으로 왜곡하는 기독교 위정자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또한 이기적 기복주의에 빠져 복음을 왜곡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본질을 잃은 기독교는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으며, 변질된 복음은 더 이상 전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에 결탁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잘못된 대제사장의 교권세력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의 모습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정권과 교권이 결탁하여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여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의 뒤를 따라 이러한 부정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음성이 있는가? 교회가 정권을 배출하였을 때에는 교회가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교회에 돌을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교회를 버리실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장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이다. 교회는 돈과 권력을 택하기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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