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누가복음'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1.08.02 누가복음 19장 3절 주해
  2. 2011.07.26 누가복음 19장 2절 주해
  3. 2011.07.25 누가복음 19장 1절 주해
  4. 2011.07.19 삭개오 이야기 연구의 서론
  5. 2008.04.0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다.[1] 본문에는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에 대한 소문이 삭개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2] 다시 말해, 당시 유명 인사였던 예수에 대해서는 소식들을 통해 익숙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으므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3] 다만, 동사 ζητέω 10(ἦλθεν γὰρ ὁ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ζητῆσαι καὶ σῶσαι τὸ ἀπολωλός)에도 사용되었으므로, 누가가 예수의 사역과 관련지어 생각하도록 의도했다고 짐작할 따름이다.[4] 하지만 삭개오는 두 가지 장애물에 부딪힌다: 한 가지는 예수를 둘러싼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작은 키이다.[5] 삭개오는 몰려든 사람들이 자신의 앞을 가리는 바람에 도저히 예수를 볼 수 없었고, 더 큰 장벽은 그의 키가 보통 사람들 보다 작았다는 것이다.[6]여기서 ἡλικία는 실제적인 키를 의미하지만(참조 눅 2:52),[7]죄인 취급을 받았으므로(7), 삭개오는 “부와 직위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을 지나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작은 자(littleness)[8]였다고 볼 수 있다. 삭개오의 왜소한 체구와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그를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작은 자로 여기도록 작용했다.[9] 삭개오는 예수와의 거리적 간격만큼이나 소외당했던 인물이었다.[10] 그렇다고, 여기에 모인 무리가 예수를 보려는 삭개오의 시도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11]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5:1, 15, 19; 6:17, 19; 7:9, 11; 8:4, 19, 40, 42, 45; 9:11, 37; 11:14, 27, 29; 12:1; 14:25; 18:36; 19:39; 23:48),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키가 작았던 삭개오의 시야를 가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기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려는 예수님께 불평까지 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7).



[1] Bock, Luke 9:51-24:53, 1517.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7.

[3] Bock, Luke 9:51-24:53, 1517.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5] Bock, Luke 9:51-24:53, 1517.

[6] Stein, Luke, 467; Norval Geldenhuys,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9), 470.

[7]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8] Nolland, Luke 18:35-24:53, 907.

[9] Green, The Gospel of Luke, 670; Nolland, Luke 18:35-24:53, 907.

[10] Bock, Luke 9:51-24:53, 1517.

[11] Green은 의도적이라고 본다(The Gospel of Luke,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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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αὶ ἰδοὺ는 셈어적 표현으로,[1] 청자/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기 위한 기법이다.[2] 새 글 여는 공식(introduction formula)이기도 하다.[3]καὶ ἰδοὺ ἀνὴρ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5:12; 9:38; 23:50; 8:27; 10:30).[4] 여기에서는 삭개오를 등장시키며 세리장이자 부자로 소개하고 있다.[5] 누가복음에서는 ὄνομα 혹은 καλέω + 이름으로 사람을 언급하는데,[6]두 단어를 같이 쓰는 경우는 누가복음 1:13καλέσεις τὸ ὄνομα αὐτοῦ Ἰωάννην와 같이 이름을 지어줄 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을 소개하는데 ὀνόματι καλούμενος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중복적인 표현(pleonastic)이라 할 수 있다.[7]이러한 중복적인 표현은 “삭개오의 이름에 특별한 주의를 끌려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8] Ζακχαῖος는 의로운 자(Righteous One)라는 의미의זַכַּי에서 유래되었고,[9]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다.[10]직업은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으로 세리들을 관리하고 여리고 지역의 세금 징수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11]그리고 삭개오는 부자이다. 인칭대명사의 주격은 대조 혹은 강조를 위해 사용되므로,[12]여기에서 αὐτὸς는 삭개오가 세리장이자 부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참조 17:16).[13]이러한 진술은 그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통해 부자가 되었음을 암시하려는 듯싶다.[14]여리고는 무역중심지이자 지방세무서였으므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로마정부로부터 막대한 수수료(commission)를 받아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15]하지만 세리장이자 부자(καὶ αὐτὸς ἦν ἀρχιτελώνης καὶ αὐτὸς πλούσιος)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자신의 직위를 악용하여 부자가 된 인물로 그려지도록 한다.[16] 실제로 그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7). 이러한 소개는 그의 이름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17]하지만 세리장인 삭개오의 등장은 청자/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반응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18]예수는 세리들의 친구이기 때문이다(7:34).[19] 더구나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부자 관원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이 떠오르도록 한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20]사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다. 당시 사람들과는 정반대되는 평가이지만, 누가는 세리를 긍정적으로(3:12; 5:27; 7:29; 15:1; 18:10),[21]부자는 부정적으로 본다(16:22-23; 18:23). 일례로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했으나, 예수의 요청에는 근심할 따름이다(18:21-23).부자 관원에게 있어 부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이다.[22]또한 부자 관원의 태도(18:21)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9-14)에서의 바리새인과 평행된다.[23]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지만(18:11-12), 예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비난하셨다(16:14-15; 18:9-14).[24] 부자 관원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계명은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답하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8:20-22).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18:22). 하지만 부자 관원은 예수의 말씀에 근심하였다(18:23). 비록 예수께서 언급한 계명은 다 지켰다고 대답했지만, 재물에 대한 탐욕은 버리지 못한 자이다(18:23). 그래서 예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18;24-25). 그렇다면 세리장이자 부자인 삭개오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BDF §442.

[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3] Francois Bovon, Luke 1: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1:1-9:50, trans. Christine M. Thomas, Hermeneia (Minneapolis, MN: Augsburg Fortress, 2002), 173.

[4] 이 밖에 καὶ ἰδοὺ ἄνδρες5:18; 9:30; 24:4; 1:10

[5] Bock, Luke 9:51-24:53, 1516.

[6] ὄνομα 8(1:5, 27; 2:25; 5:27; 8:41; 10:38; 16:20; 23:50), καλέω 2(1:60; 10:39) 사용되었다.

[7] Nolland, Luke 18:35-24:53, 907;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9] Bock, Luke 9:51-24:53, 1516;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Stein, Luke, 468;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Christopher F. Evans, Saint Luke, TPI New Testament Commentaries (London: SCM Press, 1990), 661.

[10] Bock, Luke 9:51-24:53, 1517;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2.

[11]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2] BDF §277.

[13] 17:16에서 누가는 한센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자가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밝힌다.

[14] Bock, Luke 9:51-24:53, 1516; Evans, Luke, 282;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5] Bock, Luke 9:51-24:53, 1516.

[16]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O Hanlon, 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2.

[17] Bock, Luke 9:51-24:53, 1516.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19]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6.

[20] Frederick W.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A Commentary on St. Lukes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304.

[21] Bock, Luke 9:51-24:53, 1513 n.2.

[22] Bock, Luke 9:51-24:53, 1483;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4.

[23] Bock, Luke 9:51-24:53, 1473.

[24] Bock, Luke 9:51-24:53,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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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향해 지나가시고 계셨다.[1]여리고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목이다.[2] 따라서 여리고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여행 에피소드의 절정에 해당한다.[3] 또한 누가는 여리고라는 지형을 중심으로 맹인 이야기(18:35-43)와 삭개오 이야기(19:1-10)를 연결 짓는다.[4] 맹인 이야기는 삭개오 이야기를 위한 도입부 역할을 하므로,[5] 서로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더욱이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고유한 자료이므로,[6]누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1]Bock, Luke 9:51-24:53, 1516.

[2] Bock, Luke 9:51-24:53, 1516.

[3] Joel B. Green, The Gospel of Luk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7), 668.

[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5;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5]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3.

[6]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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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J. Tissot, detail from "Zacchaeus in the Sycamore Awaiting the Passage of Jesus" (1886-1896), watercolor, Brooklyn Museum, New York.

누가복음 주석서들을 읽다보면, 삭개오 이야기(19:1-10)에서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학자들은 본문에 사용된 형태에 따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부딪히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이유로 미래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경향을 정당화한다.[1]

이 동사는 예수를 만난 결과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사는 현재 결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적당해 보인다. 행동이 구체적인 표현에서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행동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이러한 행동은 죄인인 한 여인(7:36-50)의 경우만큼이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생각나도록 한다. 사실, 19:9-10에서 구원과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사실상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사들을 현재의 행위가 아닌 미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삭개오의 예수와의 만남은 그의 돈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다⏤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2]


8절은 세리장으로서 세금을 토색해온 과오를 반성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내놓으며, 앞으로 토색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인다.세리장인 동시에 부자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지위를 남용하여 부자가 되었고(2),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 무엇보다, 10절에서 예수께서 잃어버린 양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은 15:1-7를 연상시키서 회개하는 죄인으로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렇든 미래적 현재로의 번역은 해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며, 결국에는 삭개오의 회심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지만, Crag A. Evans는 본문에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단서가 없으며, 무엇보다 원문은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미래적 현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3] Evans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도 제시한다.

8절에 더욱 적절한 해석은 “죄인”인 세리에게 청하시고 그와 식사하려는 예수의 의도에 불평하는 군중(7)을 향한 삭개오의 진술을 즉각적인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는 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의 직업 때문에 죄인이라 불리는 비꼼(sting)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는 다른 세리들이 시민들을 속이고 착취한다지만, 삭개오 자신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더 많은 돈을 걷었을 때 마다 (반드시 “토색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항상 네 배로 갚아주고 있다고 변론한다.

9절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는 그의 공정한 행동(3:12-13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세리들을 향한 충고를 떠오르게 한다) 때문으로 이러한 행위는 신실한 마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이 입증하듯이,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 (경멸 받는 세리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추방된 자들과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 때문에 해를 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를 보게 된다.[4]


이렇듯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취급한 이유(7)와 예수께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이유(9) 그리고 잃어버린 양 비유(10)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이러한 해석을 따를 경우 삭개오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냐 습관적 현재냐 하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주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여기서 해석자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해석자의 선택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그래서 이 연구의 목적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동사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의 용례를 분석하여 두 동사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연구하고, 그에 따른 본문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다.


[1]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Darrell L. Bock, I. H. Marshall, Robert H. Stein 등이 있다.

[2] Darrell L. Bock,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1520.

[3] Craig A. Evans,Luke,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Vol. 3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0), 280.

[4] Evans, Luke, 280. Evans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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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신명기 6 4-5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다.

 

BHS 6:4-5

`dx'(a, Ÿhw"ïhy> WnyheÞl{a/ hw"ïhy> lae_r"f.yI [m;Þv.

.`^d<)aom.-lk'b.W ^ßv.p.n:-lk'b.W ^ïb.b'l.-lk'B. ^yh,_l{a/ hw"åhy> taeÞ T'êb.h;a'äw

 

 

개역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매일마다 이 말씀을 암송한데다가, 70인경을 성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들으라”는 표현은 매우 익숙했다.

 

o` e;cwn w=ta avkou,ein avkoue,tw ( 있는 자는 들으라)

ΒΝΤ 8:8

a;koue Israhl (이스라엘아 들으라)

LXT 6:4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마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을까?

 

이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야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8).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15).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구원 받지는 않는다. 믿음은 실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이 무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믿었으나 배교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 말씀을 인내로 실천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르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으로써, 마음(bb'l)을 다하고 성품(vp,n<)을 다하고 힘(daom)을 다하여 믿음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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