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ames J. Tissot, detail from "Zacchaeus in the Sycamore Awaiting the Passage of Jesus" (1886-1896), watercolor, Brooklyn Museum, New York.

누가복음 주석서들을 읽다보면, 삭개오 이야기(19:1-10)에서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학자들은 본문에 사용된 형태에 따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부딪히게 되는 해석의 어려움을 이유로 미래적 현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경향을 정당화한다.[1]

이 동사는 예수를 만난 결과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동사는 현재 결심의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적당해 보인다. 행동이 구체적인 표현에서 믿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행동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이러한 행동은 죄인인 한 여인(7:36-50)의 경우만큼이나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생각나도록 한다. 사실, 19:9-10에서 구원과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사실상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동사들을 현재의 행위가 아닌 미래의 결심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삭개오의 예수와의 만남은 그의 돈을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다⏤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2]


8절은 세리장으로서 세금을 토색해온 과오를 반성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내놓으며, 앞으로 토색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인다.세리장인 동시에 부자라는 소개는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지위를 남용하여 부자가 되었고(2),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 무엇보다, 10절에서 예수께서 잃어버린 양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은 15:1-7를 연상시키서 회개하는 죄인으로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렇든 미래적 현재로의 번역은 해석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며, 결국에는 삭개오의 회심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지만, Crag A. Evans는 본문에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단서가 없으며, 무엇보다 원문은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미래적 현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3] Evans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도 제시한다.

8절에 더욱 적절한 해석은 “죄인”인 세리에게 청하시고 그와 식사하려는 예수의 의도에 불평하는 군중(7)을 향한 삭개오의 진술을 즉각적인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는 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의 직업 때문에 죄인이라 불리는 비꼼(sting)에 대한 반응이다. 사실상 그는 다른 세리들이 시민들을 속이고 착취한다지만, 삭개오 자신은 정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를 하고 있고 (뜻하지 않게) 더 많은 돈을 걷었을 때 마다 (반드시 “토색했다”고 볼 수는 없다) 항상 네 배로 갚아주고 있다고 변론한다.

9절에서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는 그의 공정한 행동(3:12-13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세리들을 향한 충고를 떠오르게 한다) 때문으로 이러한 행위는 신실한 마음을 암시하며,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환영하는 모습이 입증하듯이,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 (경멸 받는 세리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우리는 추방된 자들과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 때문에 해를 당하는 자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은 예수를 보게 된다.[4]


이렇듯 습관적 현재에 따른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취급한 이유(7)와 예수께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이유(9) 그리고 잃어버린 양 비유(10)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이러한 해석을 따를 경우 삭개오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미래적 현재냐 습관적 현재냐 하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주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여기서 해석자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해석자의 선택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그래서 이 연구의 목적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동사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의 용례를 분석하여 두 동사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연구하고, 그에 따른 본문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다.


[1]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따르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Darrell L. Bock, I. H. Marshall, Robert H. Stein 등이 있다.

[2] Darrell L. Bock,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1520.

[3] Craig A. Evans,Luke,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Vol. 3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0), 280.

[4] Evans, Luke, 280. Evans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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