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연구 주제(=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의 영향 탓인지,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이 복음서가 구전되고 기록되었을 당시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그려진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과 '하나님의 아들'(1:34)이라는 모순적 표현이 중첩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라는 문구를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본다. 성전 중심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도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 동안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는 헤스모니아 왕조 이후 메시아 사상이 고취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고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메시아 사상의 정점에 닿아 있는 다윗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자극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 그 정점에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17)고 명령하신 부분이 인상 깊게 남는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살아남는다. 그는 사도들의 순교에도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다(21:24-25).

예수의 부활을 붙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쩌면 예수의 생애를 공유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좌절감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설득해야했다. 요한복음 1장이 로고스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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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으나, 청중들은 도무지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이적을 베푸는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커져만 간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된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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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에는 부활신앙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도 부활신앙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믿음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부활신앙을 정의하는 자들이 있다. 그만큼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개인의 믿음과 별개로 부활신앙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있다. 이 기사는 그 근거들을 다루고 있다.


이 기사에 언급한 리 스트로벨은 『예수는 역사다』란 책을 썼다. 한국에 소개된지 10여년 이 넘었는데, 지금도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나는 학부 시절에 이 책을 읽었고, 지금까지 이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있어 봤지만, 이보다 잘 정리된 책을 보지 못했다.


기사 끝 부분에 등장하는 신현우 교수는 초대교회의 탄생을 증거로 부활의 역사적 사건으로 단정짓는 보수적 학자로, 사본학과 공관복음 문제,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이다. 내 논문의 지도교수이시기도 하셨다.


[증거로 증명한다] 사흘 만에 부활, 네가지 근거 있다

언론인서 기독 작가로 변신한 리 스트로벨 역사가 게리 하버마스, 증명 자료 수천 가지 주장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대 돌무덤으로 예수님 당시 무덤과 같은 형태로 추정된다.




“다 믿겠는데 부활만큼은 못 믿겠다.”  

부활은 여전히 비기독교 세계에선 전설 같은 얘기다. 백번 양보해도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면 그들의 회의(懷疑)를 돌이킬 수 있을까. 

언론인에서 기독교 작가로 변신한 리 스트로벨에 따르면 부활을 증명하는 자료들은 수천 가지가 넘는다. 게리 하버마스 같은 역사가는 1975년부터 수집한 자료만 22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주로 학계에서 통용되는 예수 부활의 근거는 크게 네 가지로 꼽는다. 성경 자체의 증거, 구전(口傳), 기록문서, 빈 무덤이다.

우선 신약성경 앞부분을 차지하는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는 모두 부활을 전한다. 복음서는 모두 AD 100년 이전에 기록됐다. 이는 회의적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장 앞선 기록은 마가복음으로 50, 60년대로 추정한다. 마태복음은 50∼70년대, 누가복음은 60∼80년대, 요한복음은 50∼85년 사이로 본다.  

지금부터 2000여년 전 특정 인물의 생애를 그의 사후 60년 안에 기록했다는 것은 다른 고대 문헌과 비교하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알렉산더 대제에 관한 가장 훌륭한 문헌 두 편만 하더라도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나서야 기록됐다. 기록이 빨랐다는 것은 그만큼 전설이나 신화가 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복음서 부활 사건이 복음서마다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날조된 역사일수록 일사불란하고 아귀가 딱딱 맞지 않는가. 사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을 전후해 그분이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독특한 관점과 시각으로 조망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성경의 상호 모순된 기록을 역사적 비진정성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므로 진정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일관성과 조화를 갖추려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다음은 구전이다. 당시엔 녹음기나 영상기술이 없었다. 글자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글로 기록될 때까지는 말로 전해오는 구전에 의존했다. 학자들은 이 구전이 신앙고백과 찬송, 설교 요약 등의 형태로 신약성경에 그대로 옮겨져 있는 곳을 찾아냈다. 대표적 구절이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이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바울이 회심한 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베드로와 야고보를 찾아갔을 때 그들에게서 신앙고백을 전해들은 것으로 본다. 이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후 채 5년이 안 된다.  

이 신앙고백은 시기가 매우 일렀을 뿐 아니라 바울에게 그것을 전해준 사람들 또한 분명히 목격자들이거나 바울이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신앙고백은 전설의 산물이기엔 시기가 너무 빠르다. 구전은 신약성경에 사도들의 설교로 몇 편 남아 있다. 사도행전(2장, 13장)에 요약, 간직돼 있다. 그 설교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기록문서다. 기록문서에는 이른바 ‘사도 교부’들의 저작이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와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등 사도 교부들도 모두 동일한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은 사도들을 직접 알았거나 사도들을 아는 사람들과 친했다. 이 때문에 그들의 편지나 책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그대로 반영됐을 가능성이 짙다. 이레니우스는 로마의 클레멘트(AD 30∼100년경)가 사도들과 직접 대화했다고 전하며, 아프리카의 교부 터툴리안은 클레멘트가 베드로에게 직접 안수를 받았다고 전했다.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사도요한에게 배웠고 그리스도를 직접 본 사람들과 대화했다고 전해진다. 폴리캅은 AD 110년 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사도들의 말을 그대로 전한 인용문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여기서 예수 부활을 다섯 번이나 언급했다.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를 사도적 전통을 잇는 중요한 고리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빈 무덤이다.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왜 굳이 훔쳐갔다고 말하는가. 이는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나온 얘기다. 더구나 제자들이 공모해 시신을 빼돌린 후 그 뻔한 거짓말을 위해 평생 고난과 죽음까지 감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총신대 신현우(신약학) 교수는 “죽은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로 기록되고 불렸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만약 예수가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그는 한낱 로마의 죄수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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