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의 구약(혹은 히브리 성경) 사용은 신약의 구약 사용 분야에서 어려운 주제 중 하나이다. 요한은 인용 공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요한이 선지자의 이름을 밝히더라도 그 선지자와 무관한 내용인 사례도 있으며, 여러 선지자 중 이사야를 대표적으로 밝히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든 요한복음이 이사야를 언급하므로, 이사야서와 요한복음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다.

나는 선행연구의 주류와 달리 스가랴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7:37-39는 스가랴 14장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사 학위 논문의 주요 본문인 10장 선한 목자 담론은 스가랴서 9-14장과 연결해서 해석할 예정이다.

요한복음 7:37-39에서 37절은 이사야 55:1, 38절은 에스겔 47:1이 요한이 인용했다고 주장되는 대표적인 본문이지만, 나는 스가랴 14장으로 두 구절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 입장에서는 스가랴 14장이 요한이 생각한/의도한 본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혹여나 주류의 견해대로 요한이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스가랴 14장을 통해 읽어야 본문의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는 입장이다.

아직 가정 관계이지만, 혹시나 요한이 이사야서를 사용했다면 그의 의도는 실제로 그의 신학이 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아직 배제할 수 없지만, 이 같은 독법에 익숙한 청중들을 고려한 요한의 의도적 사용일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즉 요한은 대다수의 이해를 고려하여 대중적 읽기를 사용하지만, 그의 진의는 스가랴서를 통해 밝혀진다는 전제이다.

내 주장은 극소수의 입장이라 앞으로 학회나 저술 등을 통해 반박 과정을 거쳐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학자로서는 확실한 독자성을 갖게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운 길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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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5장에서 이스라엘의 군주가 주도하는 속죄는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서 드린다 (17절). 에스겔의 주요 관심사는 성소와 성전 정화이며(18-20절), 군주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명절에 대속죄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앞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본 대속죄일과 초막절"에서 "에스겔 45장에서 대속죄일은 성전 정화와 관련이 있으며,"라는 문구는 적합하지 않다. 반면 에스겔이 군주가 지켜야 할 명절로는 유월절과 초막절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신학이 요한복음에 흐른다(고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사역은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노끈으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일이다 (2:13-22). 가나의 혼례는 첫 표적이며, 내가 매번 강조하듯이 예수의 의지에 반하는 사건이다 (2:1-12). 예수의 구속사를 예수의 대제사장직과 대속죄일로 해석하는 경향과 다르게, 요한이 이야기 전개에서 유대 절기를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지만, 그가 대속죄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이 사건 이후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했다는 기록(23-25절)으로 자신의 전개를 이어간다. 또한 요한은 유월절은 세 번 배치하고, 7:1-10:21은 초막절로, 10:22부터는 수전절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다.

요지는 에스겔의 성소와 성전 정화, 그리고 유월절과 초막절 준수 명령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다. 에스겔에서 대속죄일을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반복적인 속죄제를 통해 정화하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포함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 간에, 에스겔과 요한복음이 대속죄일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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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설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대세이지만, 간혹 장로 요한을 주장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저자설과 무관하게 두 기록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내 관심사인 '어린 양'이 그중 하나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현재는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주창하고, 요한계시록이 완성했다는 잠정 결론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 (1:29)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으나, 아직 선례를 찾지 못했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려는 목적대로 '어린 양'을 그의 기록 초반부에 위치시켰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한은 '어린 양'을 왕권 사상과 연결하는 중요한 기여를 남긴다. 요한의 고유한 절기 사용은 그의 목적에 부합한 기교이다.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정립하는 시작점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을 그 사상을 계승하여 종말론적 심판과 부활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린 양'을 왕권과 연결한다. 반면 요한계시록은 유대 절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복음과 달리 절기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할 필요가 요한계시록에는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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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실 최근 문헌 조사(a literature review)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아들됨'(sonship)은 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헌 조사 이후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의 흐름이 이 주제를 꼭 다뤄야 한다는 판단이 서서 방향을 틀었다.

고대 문명에서 집단 지도자나 왕을 신의 아들로 칭했듯이, 아들됨은 신적 정체성(a divine identity)과 신성왕권(divine kingship)에 관한 개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됨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규정하며, 그에 따른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왕권을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권위도 예수의 아들됨에서 기인한다.

현재 목자-왕 유비를 다루면서 틈틈이 '아들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더 조사를 해봐야겠으나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에 관한 자료 위주로 보인다. 만약 적합한 선행 연구를 찾지 못하면, 일일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거나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게 된다. 내 박사 학위 논문을 내년에 제출할 수 있느냐는 여기에 승패가 달려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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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선행 작업으로 왕권 사상을 다뤄야 한다. 내 관찰에 의하면,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 목자-양 비유, 아들됨(sonship)이 모두 왕권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왕권을 주장한다. 다만 요한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내어놓음, lay down)으로 예수의 왕되심을 선호한다는 역설이 있다.

초막절은 일 년의 수확을 여호와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풍성한 수확을 가능케 하신 비의 주관자 여호와를 찬양하는 시기가 바로 초막절이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우상숭배, 특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고발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숭배가 바로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목자-양 비유는 전통적으로 왕권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목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왕을 상징한다. 목자-양 비유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kingship/Messianism)이다. 예언서에 나타난 미래에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다윗과 같은 왕 혹은 다윗의 후손으로 해석하지만, 요한복음에 이 사상을 신봉하는 무리가 등장하지만, 다윗처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등장하지만, 그의 출신 배경이 다윗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여호와를 궁극적인 왕으로 선포하는 선지자들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넘어서는 구원자 예수의 등장을 선포한다.

요한은 이 두 주제를 자신만의 신학으로 재정립하는데, 아들됨은 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요한의 아들됨은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그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권한을 동시에 드러내는 수단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스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야웨 신앙에 관해서는 고대 유대 유일신론(ancient Jewish monotheism)을 염두에 둬야 하고,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는 삼위일체론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앞 세 주제를 다루는 작업이 쉽지 않아서, 뒤 두 주제는 차후 연구 주제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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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관심을 둔 지 6년이 되어간다.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이해하려다보니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현재 선한 목자 담론은 본문 자체 내에서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림. 그러나 요한의 의도를 명쾌하게 파악하려면 1-2장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서사를 아주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그 배경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은 정교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1:1-18 요한복음의 서론으로 '로고스' 본문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수의 신적 기원을 선포하는 구절이다. 예수의 정체성과 권위 등 그에 관한 모든 질문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한 생명을 빛에 비유하고 어둠과 대조하는 이유는 예수를 향한 믿음의 이유를 말한다. 그러나 빛을 거절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1:19-36 세례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메시아됨(messiahship)을 거절하지만, 예수의 정체와 사역을 선포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식 이후 예수께 임한 성령의 임재는 교회 공동체의 구원과 긴밀한 의미가 있다.

1:37-51 나다니엘의 발언은 유대 메시아사상을 드러낸다. 수많은 해석자가 나다니엘이 예수의 정체를 믿음으로 고백했다고 주장하는데, 내 견해는 오히려 그의 불신앙 혹은 유대 메시아사상의 전형으로 본다.

2:1-12 가나 혼례 사건이다. 이 장면을 종말론적 축복으로 해석하는 해석자들이 다수인데, 나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제자들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장면으로 해석한다.

2:13-25 성전 정화사건이다. 요한의 서사 배치는 역사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성전 정화 사건의 시기에 관한 논의보다는 이러한 배치를 통한 의도를 읽어야 한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교회 공동체 내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적 사고를 변화시키기 위한 요한의 의도가 담겨 있다.

박사 학위 이후 진행하고 싶은 연구 주제에 요한복음 1-2장 해석을 추가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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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등장을 본 세례 요한이 한 말 중 "하나님의 어린 양"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다. 이 "어린 양"의 정체와 기원에 관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지금은 "유월절 양"과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결합이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유월절 양"이란 견해는 반대 의견이 많은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다리를 꺾지 않은 사건을 두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19:31–36을 근거로 덧붙여 반박하고 있다.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지만, 예수의 대리적 죽음과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한다. 각자가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둘을 결합해서 요한의 어휘 사용과 신학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수식해 그의 사역을 진술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라는 표현에서 "속죄"와 연결한다. 여기서 요한은 직접 "속죄"와 관련된 어휘를 사용하지 않지만 요한 1서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현 요한복음 "하나님의 어린 양"에 관한 연구에서 대세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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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 M. Stovell은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왕권 사상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려고, "메시야"(41절), "하나님의 아들"(49절), "이스라엘의 임금"(49절), "인자"(51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여기에 "하나님의 어린 양"(29, 36절)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왕권은 그의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결은 언어학적 분석이 아닌 신학적 분석을 통해서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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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해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49절)은 그가 갖고 있던 당시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의 일부를 드러낸다. 나다나엘이 그같은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토대로 고백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언급했기 때문이다(48절). 나다나엘은 유대인들에게 팽배했던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메시아 사상을 갖고 있었다.

요한복음 1장 로고스 (1:1-18)과 세례 요한(19-36절)로 시작하는 이유는, 서두에 예수의 정체를 미리 선언한 이후에 제자부터 시작하여 2장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까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여 (1-12절), 전통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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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atically, this chapter is tied to the Feast of Tabernacles (ch. 8) through the explicit reference to Jesus as the light of the world (9:5; cf. 8:12). This chapter portrays what happens when the light shines: some are made to see, like this man born blind, while others, who think they see, turn away, blinded, as it were, by the light (9:39–41). At the same time, this chapter prepares the way for ch. 10, where a sharp contrast is drawn between the good shepherd, who gives his life for his sheep, and other religious leaders, like those in ch. 9, who are nothing but thieves and hirelings.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359.


(My Comment) In the three chapters, however, we need to focus on the Pharisees. In other words, in chapters 8 and 9, there is a common theme of the identity of the Pharisees: they define themselves as Abraham’s descendants (8:33) and the disciples of Moses (9:28). In chapters 9 and 10, the relationship between Jesus and the Jews is highlighted.

Carson은 요한복음 8-10장 사이의 주제적 일관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는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이 8장의 초막절 절기에 행해지는 의례의 비유적 의미와 명백하게 연결되고, 10장을 준비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주제적 일관성에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요한의 절기 사용에서 의례나 상징적 의미 부여는 과도한 해석으로 보고 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으마, 내 관찰에 의하면, 요한은 절기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며, 각 절기에서 간결한 의미를 가져다 쓴다.

더구나 본문에서 8-10장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의 주체는 바리새인들이다.

8-10장이 초막절이란 유대절기를 공통분모로 사용하지만, 주제적 일관성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부각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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