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의 목적의식을 명확하게 밝힌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는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J. 루이스 마틴(J. Louis Martyn)의 『요한복음의 역사와 신학』(류호성 역, CLC)이 탁월하다. 우리는 여전히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회당 축출 사건과 성전 파괴(AD 70)가 주요 저술 동기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민족적 정체성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복음서를 기술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전제에 동의한다면, 요한복음이 성전을 강조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러한 의도가 1~2장에서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장에 등장하는 로고스(1-18절)는 성육신을 위한 소재일 뿐 요한이 헬레니즘에 더 익숙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세례 요한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는 말은 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기능을 하며, 속죄제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장의 성전 파괴에 관한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이 1~2장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오늘날 신자에게 덜 익숙하지만, 유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을 사용하여 예수의 사역을 설명한다. 이것을 우리가 통용하는 단어로 말하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이다. 더 나아가 요한은 이 세 개념을 모두 성전과 연결짓고 있다. 이러한 독법은 성전 파괴(AD 70)라는 시대적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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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전 시대(Templeless age)는 질 미들마스(Jill Middlemas) 박사가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의 한계를 알지만, 바빌로니아 침략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부터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이전까지를 지칭하는 무성전 시대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추정되는 요한복음 저작 시기 사이의 유사한 환경을 강조하려고 한다.

요한복음 저작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AD 70년 이후로 가정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초기 서신을 통해 신앙 공동체에 공통된 신앙 고백이 있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관한 권위 있는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 다른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그 동기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간주하는 게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수많은 학자가 언급하는 출교 결의(9:22)보다 성전 파괴가 더 강력한 집필 동기로 작용했다고 가정한다. 결의문의 효력은 검증할 수 없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로 심각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의 진술은 독자가 더이상 회당에 출입할 수 없는 처지라고 믿도록 만든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충격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요한공동체에게, 혹은 요한복음이 암시하는 독자에게는 더이상 회당도 성전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교회가 있다.

요한복음의 저술 동기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 있다는 내적 단서로는 요한이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하는 데 힘을 쓴다는 점이다. 첫 번째, 요한은 성전 청결 사건(2:12―22)을 예수의 공생애 초기로 보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의도는 성전 파괴를 경험한 세대에게, 그리고 더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를 향한 함의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출교 결의로 인해 그들은 회당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도 예수를 성전과 연결 짓는 본문이 여럿 있다. 저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예수가 성전이시다!"

유대인은 이미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앞서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한 솔로몬 성전 파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바빌로니아 포로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치욕의 세월 동안 이주민들은 이스라엘 멸망과 회복을 예고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억했다. 포로 귀환 이후 최대 관심사는 성전 재건에 집중되었고, 율법 준수 운동이 강조했다.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귀환 공동체는 혁명적인 신학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와 유사하게, 요한은 2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복음서를 써야 하는 의무감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패러다임을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paradigm shift). 요한복음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많이 있지만, 최근 경향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했다는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요한이 처한 시대적 상황은 그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학적 의미에 중점을 더 주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기반하면서 신학적 의미를 더 강조했다는 의미로, 그 과정에서 사실의 변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더이상 성전 재건은 의미가 없다. 교회 공동체로 충분하다. 더이상 율법 준수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복음으로 충분하다. 이렇듯 회당 출교 결의와 성전 파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요한은 기존 관습을 허물고 교회(에클레시아) 중심의 공동체를 위한 복음서를 기록해야 했다.

요한의 관점에서 현 상황에 가장 큰 장애물은 유대인의 성전 중심의 사고와 율법주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는 유대인 혹은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가정한다.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가 이방인이라고 가정하기에는 유대적인 진술이 넘쳐난다.

요한은 유대계 기독교인과 전도 대상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성전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는 탈 성전주의(≠반 성전주의)와 유대주의와 결별하는 탈 유대주의(≠반 유대주의)를 강조하고자 했다.

1. 탈 성전주의
요한복음에서 성전 청결 사건과 예수의 부활 예고(2:13―22)는 공생애 초창기로 추정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더이상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4:20―24). 또한, 요한은 종말론적 성전을 묘사한 스가랴 14장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묘사할 뿐 아니라 성령에 대해 언급한다(7:37―39). 이외에도 여러 본문이 있음.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성전 재건과 유대주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요한이 탈 성전주의를 의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2. 탈 유대주의
요한복음은 유대주의에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요한은 유대인의 전통을 잘 활용한다. 일례로, 초반에 자주 등장하는 모세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이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모세와 같은 선지자(the prophet like Moses)를 고대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반영하여 예수를 메시아라고 선포하는데, 단순히 모세 기독론(Mosaic Christology)이 아니라 모세를 능가하는 예수(More than Moses)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율법의 성취자이시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도 여전히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텐데, 요한에게 율법주의는 교회 내부나 외부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절기의 기능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데, 이를 간과한 해석이 너무나 많다.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주제이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기능은 매우 정교한데, 현재 가정하는 바로는 예수를 절기의 의미를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탈 성전주의와 탈 유대주의를 아우르는 역할을 한다.

정리하자면,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야기한 교회 공동체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대외적으로는 복음 전도 전략 차원에서 공관복음과 다른 관점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내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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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과 시온

독서후기 2020. 4. 10. 22:07

역자 서문을 인용하여 저자와 책을 소개하는 게 가장 적절할 듯 하다.

존 D. 레벤슨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 대화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는 유대교 성서학자이다. 그는 구약신학을 시내산과 시온이라는 두 축으로 풀어낸다. 시내산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와 헌신에 대한 강령이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한 사람의 신실함에 대한 대가로 준 영원한 약속을 대변한다. 한 마디로, 구약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의 약속 혹은 은혜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9-10쪽).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해 모세와 다윗의 연관성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 두 인물이 목자-왕 전승과 관련이 있고, 이차적으로는 언약과 성전이란 주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240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정말 알차다. 형광펜으로 주요 부분에 칠을 한다면 검은 글씨 위에 형형색색 하게 칠한 부분으로 가득 채워질 테고, 내 생각을 적어둔다면 구석구석에 필기가 남아야 할 정도로 내게 필요한 내용이 많이 있다. 

다만 레벤슨 박사의 연구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데다가 내 상식을 깨는 견해들이 있어서 신중하게 읽어야 했다. 중요도와 난해함 때문에 조만간 다시 정독해야 할 책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만약 구약신학의 진수가 무엇인지, 특히 유대교 성서학자는 어떻게 구약신학을 바라보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시내산과 시온
국내도서
저자 : 존 D. 레벤슨 / 홍국평역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12.09.30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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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지역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다. 


"After the fall of the city Jerusalem is never again mentioned by name. The oracles of salvation and restoration scrupulously avoid mention of Jerusalem, and marital and sexual imagery is entirely absent from the descriptions of Israel’s future.” " - Julie Galambush, Jerusalem in the Book of Ezekiel: The City as Yahweh’s wife, SBL Dissertation Series 130 (Atlanta, GA: Scholars Press, 1992), 145.

"도시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다시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신탁은 철저히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결혼과 성적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묘사에서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스가랴도 자신의 예언에서 "성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표현이 "하나님의 집"(the LORD's house, 14:20, 21)이다.


에스겔과 스가랴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성전의 재건이 실현되기 전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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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1

말씀묵상 2011. 8. 31. 07:20
[매일성경] 사도행전 7:37-53

#1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이후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했고 우상숭배를 했다. 신앙의 지도자가 없으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가? 왜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제하지 않는가?

#2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하나님을 성전에 담아낼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 예배 받아 마땅하시다. 성전 중심의 사고를 버려라.

#3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불순종의 역사로 규정한다.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지만, 그들은 불순종의 삶을 살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과연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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