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시편 109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저자의 저주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대적을 저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한다.

저주의 내용을 보면, 대적자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은 물론 후손까지 도말시켜달라고 한다. 그야말로 저주 중의 저주이다.

시편 기자는 왜 이토록 심각한 저주를 퍼붓는가?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아다" (시 109:16)

대적자들의 횡포는 2-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태도는 후안무치의 전형이다.

시편 저자는 대적자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를 향해 저주를 쏟아붓는다. 그의 입장에서 대적자는 심판 받아 마땅하다. 반면, 자신은 대적자를 저주해도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찌라도 주의 종은 즐거거워하리이다" (시 109:28)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이기적으로 들린다. 시편 저자나 대적자나 둘다 저주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잘못을 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대적은 처참하게 심판하시고, 자신에게는 복을 달라는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기복주의 신앙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 109:22)

이 구절이 바로 대적자를 향한 저자의 저주와 저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정당화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가난과 궁핍, 마음(중심)이 상함은 가시적인 상태가 아닌 영혼의 상태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의미한다. 즉, 시편 저자의 대적은 개인적인 대적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자이다. 따라서 저자의 저주와 구원 요청은 정당성을 얻는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오늘날에도 대적을 저주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통치자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는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향한 심판의 정당성과 정의실현을 믿음의 행실로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이다. 요새 심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중에 시편을 읽으니 "시편과 정치"란 주제로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날이 이어진다. 아... 난 신약학 전공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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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의 표제는 저작배경을 다윗이 왕정에 있을 때로 설정하도록 한다. 


다윗은 인자(헤세드)와 공의를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인자(헤세드)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지칭하며,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비추어 노래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정의도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고 있다(1절).


다윗은 완전한 길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만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질문을 통해 그가 정치적 위기에 놓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져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다. 그는 완전한 마음으로  자신의 집에서 행동하리라고 다짐한다(2절).


이러한 다짐은 개인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3-4절),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이스라엘(6절에는 "땅", 8절에서는 "여호와의 성")도 포함된다.


다윗은 곤란에 처했을 때에 그는 자신의 권력과 술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를 기억해낸다. 다윗은 자신만이 아니라 통치자로서 인자와 정의를 노래함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통치자로서 곤란에 처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에 위기가 가득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대처방안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참고문헌
Allen, Leslie C. Psalms 101-150. WBC 21. Revised. Dallas: Word, 2002.
Gerstenberger, Erhard S. Psalms, Part 2, and LamentationsThe Forms of the Old Testament Literature,  Vol. 15. Grand Rapids: Eerdman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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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슥 13:5)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를 끊으시고 선지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2절), 예언은 사라지고(3절) 선지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4-6절).


요 몇 일 기독교선교단체의 공금횡령이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재빠른 사실관계 확인으로 소속단체와 당사자에 대한 정보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듯 싶은데, 한국을 대표한다는 대형교회에서 큰 사건들을 연이어 터뜨려주고 있어 착잡한데 선교단체까지 비리가 발생했다고 하니 꽤나 실망한 분위기이다.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하락하면서 개신교인들은 자신이 교회다닌다는 사실을 왠만하면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도 작용했을 터이다.


이런 이유에서인가 목회자들도 교인들과 무리지어 다닐 때 목사라는 칭호를 부담스러워 하곤 한다. 유난히 큰 목소리로 자주 불러서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지, 교회 내부의 주된 문제요인으로 지적 받는 탓인지 알 길이 없지만.


논문을 위해 이 구절을 주해하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선지자 대신에 목사라는 단어를 넣어 읽어도 적절한 적용이 되는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교회에서든 밖에서든 성도들은 개교회 소속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전도사라고만 해도 살갑게 대해준다. 목회자들이 감당해야 할 수고와 현실적 어려움을 공감해 주시기 때문인텐데,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야 할 시대가 다가온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존경받는 목회자는 못 되어도, 신분을 감추는 목회자는 안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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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D. G. 던은 자신의 책 <바울신학>에서 갈라디아서 2장 10절이 연보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갈 2:10이 연보 자체를 가리킬 것 같지는 않다; 다른 곳에서 연보를 가리키는 구절들은 표현과 어조에서 유사성을 지니는데, 갈 2:10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연보를 그의 선교활동과 안디옥에서의 그의 실패 이후의 예루살렘 또는 유대 교회들 간에 벌어진 간격을 메우는 시도로 생각했을 것이다(갈 2:11-14). 그러나 갈 2:10에 언급된 합의가 연보를 촉구하는 말의 일부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가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애초부터 요청했던 것이었다; 이 연보가 특히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울 자신의 의도였다(롬 15:26) - 제임스 D. G. 던, 바울신학, 924 n.170.


이 견해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두 가지 정도만 짚고 넘어가겠다. 

1.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면에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로 답했으므로, 안디옥 사건 이후에 연보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와의 연합을 시도했다는 던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2. 그리고 번역이 정확한건지 의문이 드는 부분인데,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말한 이들은 바울이 아니라 사도들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애초부터 요청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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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랠프 P. 마틴의 고린도후서 주석의 내용 중 갈라디아서 2장 10절 해석을 간략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1)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 같은" 사도들에게 자신이 한 약속, 즉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고 있었다(갈 2:10을 보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약속을 실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Luedemann, Paul, 87, 88를 보라). - 랠프 P. 마틴, 고린도후서, WBC, 김철역 (서울: 솔로몬, 2007) )511.


1. 바울은 사도들과 약속한 적이 없다.

마틴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은 약속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개역개정)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면 이전부터 구제를 해왔다. 그러므로 약속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2. 바울의 구제는 자신의 신학에 따른 행위이다.

고린도후서의 구제는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던 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신학에 따른 실천이였다. 바울의 구제관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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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은 갈라디아서 2장 10절(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에 대한 주석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언약적 율법주의를 연관짓는다.


구약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기둥과 같이 여겨지는 이들의 요청은 곧 율법의 의무에 순종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112-3을 참조하라.


하지만 이러한 요청은 예루살렘의 기근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던의 해석에는 그의 신학적 편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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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2절("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에 대한 던의 주석을 간략히 정리하고 내 생각을 적어본다.

게바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을 보고 식탁교제에서 물러난 이유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게바가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사에 대한 신학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게바는 고넬료 사건 이후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탁교제에 대한 거리낌이 전혀 없다. 그러나 게바는 할례자들이 교회를 박해할까봐 두려워한다(참조. 1:13). 게바의 행동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게바를 책망한다(2:11). 게바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2:14). 할례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던 게바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의 행동이 유대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식탁교제 금지와 할례준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게바의 행동은 교회보호라는 차원에서 보면 적합해보이고, 바울의 반응은 과민해보인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게바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 상관 없이 복음의 진리를 허문다. 게다가 게바는 외부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내부의 단결을 허물어뜨리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우리는 게바의 행동을 통해 교회를 보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의 진리를 해치고 내부의 단결을 허물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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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0절("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에 대한 던의 해석을 읽는데, 그의 신학적 견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활동은 유대 율법과 전승의 특별하고 특이한 특징이다. ... 유력자들의 이러한 요구는 바울과 바나바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유대 언약 신앙의 주요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 할례 논쟁은 승인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언약적 율법주의'의 원리를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112-3.

아마도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관심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으로 인한 사도들의 요청으로 여겨지는데, 던은 이 요청을 '언약적 율법주의'와 연관짓는다. 이러한 과감한 해석은 바울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던의 대가다운 면모이거나, 그의 신학적 고정관념이 남발된 경우일지 모른다. "본문이 말하게 하라"는 개혁주의의 성경해석방법은 쉽고도 어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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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4절에 대한 슈라이너의 통찰력 있는 해석을 읽고 감탄한다.

The false brothers in Paul's view were still stuck in bondage, for like prisoners they came to see what freedom in Christ is like. But they did not arrive as prisoners who longed to be free but as those who desired to bring others into bondage with them. - Schreiner, Galatians, 125.

[번역] 바울의 입장에서 거짓 형제들은 자신들과 같은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보고도 여전히 노예 신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죄인들과 같이 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자신들과 같이 노예가 되기를 갈망한다.

[단상] 바울이 거짓 형제들이 몰래 침입한 목적을 밝히는데 "노예로 삼다"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명확해진다. 거짓 형제들은 자유를 보고도,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로 삼으려는 자들. 현 시대의 거짓 형제들과 같은 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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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 2: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지속되도록 하려고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끊임 없이 저항한다. 이러한 저항을 통해 "바울은 자신 스스로 권위를 바로 세우고 갈라디아 교회의 모범이 되었다"(Schreiner, Galatians, 126).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있는지, 교회의 모범이 되고 있는지, 복음의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저항하고 있는지 자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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