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사야가 ‘야웨의 종’이라 칭하는 인물을 밝히려는 시도가 끊임 없이 지속되고 있다. 유력한 학자들에 의해 모세나 스룹바벨 등 여러 인물들이 언급되었지만, 그들의 역사적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강하지 못하다. 나는 이사야의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모세부터 제2성전기 시대를 통틀어 저자의 진술에 부합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해석적 난맥에 의해, 역사적 인물을 밝히려는 시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으로 해석하는 추세로 전향되지 않았나 싶다. 현재로서는 ‘야웨의 종’을 ‘이스라엘’로, 화자를 ‘열국’으로 구분하는 입장이 제법 영향력이 있어보인다. 이러한 입장의 변형(?)으로는 ‘야웨의 종’을 ‘이스라엘’로 보지만, 화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국가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있고, 역사적으로 그들이 번영한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열국을 위해 희생당했다는 해석은 무리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고난과 분열, 멸망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열국을 의존하는 외교 정책 등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열국에 대한 평화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열국을 향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이 있는데, 변혁의 시대에 따른 사고 전환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사야조차 이런 선포를 했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현 추세는 집단적 해석이 더 강세로 보이는데, 연구자는 해석적 다양성을 염두해야겠고, 나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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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고정 관념, 혹은 신앙과 전승 등을 뒤집는다는 데 있다. 내가 다루는 주제에 한해서는 ‘고레스’와 ‘야웨의 종’이 그러하고, 이 두 인물은 유대 메시아 사상에서 독특한 궤적을 남긴다.

고레스는 이방 왕이지만,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에 부여될 명칭으로 이 그를 부른다 (44:28; 45:1). 그리고 그의 업적은 마치 멸망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이상이 담긴 다윗 왕과 같다. 실제로 포로 공동체는 열방 심판과 이스라엘 재건 명령은 장차 나타날 다윗과 같은 왕의 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일을 행한 인물은 이방 왕이었다. 이사야에게 이같은 모순적인 현실은 그로 하여금 기존 유대 전승을 뒤집어야 하는 도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사야가 신적 계시에 순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그는 여전히 청중들로부터 극심한 저항에 마주하게 된다.

고레스 왕의 출현과 유대 포로민들의 저항

고레스와 다윗 계통의 왕

고레스의 등장과 열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


야웨의 종의 정체에 관한 연구들과 각종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논쟁이 가능한 영역으로 보인다. 연구 추세가 ‘종’의 정체를 역사적 인물에서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경향으로 넘어가듯 싶은데, 이런 변화마저 정체를 밝히는 어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현재 나는 그의 정체를 특정 인물로 보고 있으며, 추후 선행연구를 검토하면서 내 견해가 달라질 수 있다. 그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그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역시 군중들처럼 ‘종’의 정체를 가볍게 여겼지만, 어떤 특정 사건을 통한 유대 공동체의 상황이 변화되면서, ‘종’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이같은 변화 역시 군중들과 불일치를 일으킨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야웨의 종'의 정체


이처럼 ’고레스’와 ‘야웨의 종’에 대한 이사야의 시각은 유대 공동체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귀환 공동체의 이스라엘 재건으로 인해 고레스에 대한 이사야의 평가는 후대에 수용되지만, 아마도 ‘야웨의 종’에 대한 인식은 오랫 동안 극히 일부에게 통용되었다고 보여진다. 극적인 변화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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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의 네 번째 '야웨의 종의 노래'(52:13-53:12)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견해가 갈린다. 일단 내가 파악한 선에서, Klaus Balzer는 모세 전승을 강조하고(Deutero-Isaiah: A Commentary on Isaiah 40-55, 404ff), John Watts는 스룹바벨로 본다(WBC, ***). 나는 개인적으로 스룹바벨에 가깝다고 짐작하고 있으나, 이사야서 본문 해석에서 의문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어서 확정할 수는 없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에스라서를 참고하면,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족보나 현지 지도자들을 언급할 때 첫 번째나 두 번째에 언급될 정도로 입지가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1-4절의 진술에 해당되지 않는다. 혹자는 야웨의 종이 질병을 갖고 있거나 온전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야웨의 종이 '메시아적인 인물'(messianic figure)인가에 대한 견해도 갈린다. 대체로 메시아적 인물로 보는 견해가 강한 듯하나, 그에 반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는 추세로 보인다. 동시대 인물들은 야웨의 종을 멸시하고 버렸다 (3절). 더구나 야웨의 종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5절). 야웨의 종은 메시아적 인물로 추앙받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Matthew V. Novenson은 『The Grammar of Messianism』에서, 동시대 군중들이 추앙했던 메시아들 사이에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그의 고난은 그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질고에 기인한다. 그의 고난은 공동체를 위한 대속적 고난이다. 야웨의 종의 대속적 고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속죄(sacrifice)에 관해서는 몇 가지 견해들이 존재한다. 야웨의 종을 속죄제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전통적이었다. 기독론적 해석이 대체로 이 입장을 지지한다. 실제로 이사야는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라고 진술한다 (10절). 그러나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율법의 조항에 의해 야웨의 종은 속죄제물에 부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야웨의 종의 ‘흠’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실제로 그가 육체적 질병이나 기타 흠결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2절의 진술은 야웨의 종이 메시아적 인물에게 기대되는 덕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본문에서는 그에게 더해진 육체적 흠결은 곤욕과 심문으로 인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7-8절).

여기서 이사야는 야웨의 종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에 집중한다 (5-6절). 그는 한때 야웨의 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3절), 어떤 사건을 통해 종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된다.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고 추측할 만한 단서도 없으나, 종을 향한 징계는 유대 공동체가 평화를 누릴 만큼 무게 있는 사건이다 (5 절). 여기서 종의 사회적 위치가 미천하거나 무시될 만하다고 볼 수 없다는 단서가 된다.

정리하자면, 야웨의 종은 귀환 공동체에서 유망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공동체의 상황에 영향을 미칠 만한 영향력은 있었다. 어쩌면 야웨의 종의 실제 위상이 아니라 이사야의 해석이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확실한 건, 이사야는 야웨의 종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을 동시대 군중들과 다르게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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