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사무엘상하, 역대상에서 다윗이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궤 이동'과 '성전 건축'에 한정되어 있다. 절기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을 이동할 때 수레에서 흔들린 궤를 만진 웃사가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다윗은 이같은 일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 발생했다고 판단하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레위 사람들이 궤를 옮기도록 조치를 취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보관될 장소를 건축하고 싶어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성전이 건축되게 하신다. 한편으로는 다윗의 마음을 기뻐 받으시고 그의 가문이 왕권을 유지하게 된다는 축복을 내리신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 이후에 초막절을 지켰고, 모세가 명한 세 연례 절기를 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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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국가법이 유일무이한 효력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법 또한 지대한 효력을 가졌다. 

고대 이스라엘은 사사 통치 시대에서 왕권 국가로 전환된 이후에도 (형식상으로라도) 율법이 최상위 권위를 가졌다. 신명기 사관으로 집약되는 유대인 사고는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포로 귀환을 거치며 율법 준수에 관한 집착으로 귀결되었다. 에스라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스모니안 왕조 등장 이후 헬레니즘화된 개혁이 실시되면서도 율법 준수라는 기조는 유지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동시에 언약을 선포한 선지자들이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과 유대 사상의 종말이라는 위기에서 이스라엘 회복과 갱신은 율법 준수가 아닌 언약으로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인간의 책임으로써 율법 준수는 매우 중요한 행동 강령이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그 결과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한다. 

예수 생애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통한 거룩한 이스라엘을 꿈꾸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규례를 어기는 자들을 정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범을 어기고 신성모독을 한 예수는 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cf. 요 5:18).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종교중독이라고 부르는 율법주의적 열심이나 신앙적 해이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율법과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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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율법과 사랑 / 문우일 / Canon & Culture 7권 1호 2013-봄

http://www.itheology.kr/canon/cc_read.php?menu=&mode=list2&mode=view&idx=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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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전 시대(Templeless age)는 질 미들마스(Jill Middlemas) 박사가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의 한계를 알지만, 바빌로니아 침략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부터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이전까지를 지칭하는 무성전 시대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추정되는 요한복음 저작 시기 사이의 유사한 환경을 강조하려고 한다.

요한복음 저작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AD 70년 이후로 가정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초기 서신을 통해 신앙 공동체에 공통된 신앙 고백이 있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사역에 관한 권위 있는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 다른 복음서를 기록했는데, 그 동기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간주하는 게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나는 수많은 학자가 언급하는 출교 결의(9:22)보다 성전 파괴가 더 강력한 집필 동기로 작용했다고 가정한다. 결의문의 효력은 검증할 수 없으므로 이 사건이 실제로 심각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의 진술은 독자가 더이상 회당에 출입할 수 없는 처지라고 믿도록 만든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충격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요한공동체에게, 혹은 요한복음이 암시하는 독자에게는 더이상 회당도 성전도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교회가 있다.

요한복음의 저술 동기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 있다는 내적 단서로는 요한이 예수를 성전으로 묘사하는 데 힘을 쓴다는 점이다. 첫 번째, 요한은 성전 청결 사건(2:12―22)을 예수의 공생애 초기로 보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의도는 성전 파괴를 경험한 세대에게, 그리고 더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를 향한 함의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출교 결의로 인해 그들은 회당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도 예수를 성전과 연결 짓는 본문이 여럿 있다. 저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예수가 성전이시다!"

유대인은 이미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앞서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한 솔로몬 성전 파괴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바빌로니아 포로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치욕의 세월 동안 이주민들은 이스라엘 멸망과 회복을 예고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억했다. 포로 귀환 이후 최대 관심사는 성전 재건에 집중되었고, 율법 준수 운동이 강조했다. 이스라엘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까지 귀환 공동체는 혁명적인 신학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와 유사하게, 요한은 2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복음서를 써야 하는 의무감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패러다임을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paradigm shift). 요한복음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많이 있지만, 최근 경향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했다는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요한이 처한 시대적 상황은 그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학적 의미에 중점을 더 주도록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요한이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기반하면서 신학적 의미를 더 강조했다는 의미로, 그 과정에서 사실의 변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더이상 성전 재건은 의미가 없다. 교회 공동체로 충분하다. 더이상 율법 준수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복음으로 충분하다. 이렇듯 회당 출교 결의와 성전 파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요한은 기존 관습을 허물고 교회(에클레시아) 중심의 공동체를 위한 복음서를 기록해야 했다.

요한의 관점에서 현 상황에 가장 큰 장애물은 유대인의 성전 중심의 사고와 율법주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는 유대인 혹은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가정한다. 요한복음의 암묵적인 독자가 이방인이라고 가정하기에는 유대적인 진술이 넘쳐난다.

요한은 유대계 기독교인과 전도 대상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성전 중심의 사고를 탈피하는 탈 성전주의(≠반 성전주의)와 유대주의와 결별하는 탈 유대주의(≠반 유대주의)를 강조하고자 했다.

1. 탈 성전주의
요한복음에서 성전 청결 사건과 예수의 부활 예고(2:13―22)는 공생애 초창기로 추정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더이상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4:20―24). 또한, 요한은 종말론적 성전을 묘사한 스가랴 14장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묘사할 뿐 아니라 성령에 대해 언급한다(7:37―39). 이외에도 여러 본문이 있음.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성전 재건과 유대주의로의 회귀를 염두에 두고, 요한이 탈 성전주의를 의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2. 탈 유대주의
요한복음은 유대주의에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요한은 유대인의 전통을 잘 활용한다. 일례로, 초반에 자주 등장하는 모세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이다. 유대인은 오랫동안 모세와 같은 선지자(the prophet like Moses)를 고대했다. 요한은 이러한 기대를 반영하여 예수를 메시아라고 선포하는데, 단순히 모세 기독론(Mosaic Christology)이 아니라 모세를 능가하는 예수(More than Moses)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율법의 성취자이시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도 여전히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계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텐데, 요한에게 율법주의는 교회 내부나 외부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절기의 기능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데, 이를 간과한 해석이 너무나 많다. 내 박사 학위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주제이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에서 절기의 기능은 매우 정교한데, 현재 가정하는 바로는 예수를 절기의 의미를 성취하신 분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탈 성전주의와 탈 유대주의를 아우르는 역할을 한다.

정리하자면,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야기한 교회 공동체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대외적으로는 복음 전도 전략 차원에서 공관복음과 다른 관점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내 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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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논문 ] 바울의 율법관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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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윤리세미나] The Ten Commandments

11장 순종의 의무: 선물로서의 율법의 회복

마티 스티븐스

율법에 대한 이해

1) 기독교인들의 이해

(1) “율법복음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율법은 구약과 유대주의(Judaism)와 동일하며, 신약의 자유와 은혜의 메시지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한다.

(2) 율법은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명령하고 있다.

2) 저자의 이해

(1) 성경에 따르면 율법은 거룩한 선물이며, 율법에 대한 순종은 거룩한 선물을 받는 인간의 의무이다. 율법을 선택된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로 재발견해야 한다.

(2) 십계명을 직설법-명령법 패턴으로 분석해야 한다. 문법적으로 직설법의 서술과 명령법의 명령은 다르지만, 주해적으로는 대립관계에 있지 않다.

 

십계명의 직설법-명령법 패턴

-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은 율법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 2절에는 하나님의 자기증명(self-identification)이 나오고, 3절에는 첫 계명이 나온다. 2절과 3절은 구문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2절은 3절의 토대가 된다. 두 구절의 구문론적 연결은 직설법-명령법 패턴에 적합하다.

 

선물-의무 관계로서의 직설법-명령법 패턴

- 독일어 Gabe선물”, Ausgabe의무를 의미하며, 저자는 성경에 사용된 언어유희의 전례를 따라 자신만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십계명의 구문론적 패턴을 분석하는 본문은 출애굽기 20 2(선물) 3-17(의무)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개정개역)고 소개하신다. 즉 출애굽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 의무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와 행동을 포함한다.

- 각 계명을 직설법-명령법 혹은 선물-의무 패턴으로 분석하려면, 각 의무에 가정되어 있는 선물의 진술 본문을 확장해야 한다. 139-142쪽 참고.

 

선물로서의 율법의 재발견

- 성경과 랍비 문헌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원천으로 묘사하며 시를 시작한다. 19, 119. 시편에 따르면, 율법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 이사야에 따르면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결과이다.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수여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 십계명은 부담스러운 짐이자 성가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특권이자 영광이다.”

- 율법을 하나님의 선물로 해석한 고대 전통이 현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율법과 복음으로 상대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유대주의/구약과 기독교/신약으로 구분하는 배타성으로 이어진다.
- 십계명에 직설법-명령법 패턴을 적용하면 의무에 선행되는 선물이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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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말씀묵상 2011. 9. 21. 18:18

[매일성경] 사도행전 15:12-21

#1
예수를 믿지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이방인에게 강조한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부활사건, 오순절성령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체 그릇된 지식과 열심으로 자신의 관습을 다른 사람들을 강요한다.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가?

#2
초대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접하고 있지만 각 성의 회당에서는 모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방인의 선교확장으로 인해 선지식과 새로운 지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 내 지식은 새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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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서서 말하는 상황이 분명하지 않다.[1]예수께서 이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는지, 무리들과 떨어져 계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다만, 9절의 예수의 말씀을 통해 무리와 떨어져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건 추측할 수 있다.[3]또한, 이러한 반응이 무리들의 수군거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분명하다.[4]삭개오는 예수를 “주”(κύριος)라 부른다.[5] 소경 역시“주”라 불렀다(18:41). 그리고 소경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18:38, 39). 소경은 예수를 “주”라 부름으로써, 다윗의 자손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6]즉 소경에게 예수는 메시아였다.[7]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1:27, 31-33에 언급되어 있다.[8]그렇다고 해서 소경이 예수를 문자 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다고 볼 수는 없다.[9]당시에는 “다윗의 자손”은 회복과 치유를 가져온다고 믿었다.[10] 실제로, 예수께서는 4:17-18에서 이사야 61:1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사역을 밝히신다.[11]그렇지만, 소경의 경우에는 누가가 마가복음 10:51ῥαββουνίκύριε로 수정한 결과이다(참조. 20:33).[12] 누가는 셈어적 표현인 ῥαββουνί를 피하고,[13] 19:8과 통일성을 주기 위해 κύριε를 사용하였다.[14] 누가복음에서 소경이 예수를 주라 부른 대가는 구원(18:42)과 병 고침이었다(18:43).삭개오 역시 예수를 주라 불렀으니, 소경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ἰδοὺ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집중해서 듣도록 유도한다.[15]동사 δίδωμιἀποδίδωμι를 습관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적 현재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해석과 주제가 달라진다.[16]습관적 현재로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으며,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하고, 미래적 현재라면 “제 재산의 절반을 주고 만약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로 번역하여 해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두 동사를 미래적 현재로 보고, 삭개오의 회심에 따른 서역으로 해석한다. , 세리장으로서 지금껏 행해온 불법적인 행위들을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을 올바로 사용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한다. 이와 달리 동사의 형태가 현재형이므로 습관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7]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고 토색했을 경우 네 배로 갚아 주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재산의 절반(τὰ ἡμίσιά μου τῶν ὑπαρχόντων)은 아마도 일 년 수입의 절반을 의미할 것이다.[18]그렇지 않고 실제로 재산의 절반을 구제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부자로 남을 수 없다(2절에서 누가는 삭개오를 부자로 소개한다). ‘만일 누군가의 것을 토색했다면’(εἴ τινός τι ἐσυκοφάντησα)은 세금을 징수하다가 실수가 발생했을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 토색과 네 배 보상의 공존은 어불성설이다. 네 배로 보상하는 삭개오가 의도적으로 토색할 리 없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다른 세리들과 달리 토색 없이 정당한 수입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삭개오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구제에 힘쓰고 있으며, 직업을 악용하지 않는 윤리적인 사람이다. 삭개오라는 이름대로 의로운 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의로운 행실은 그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게 된다(9).[19]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긴다(7). 바리새인들이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 “부당한 전제와 종교적인 위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0]그들은 삭개오의 의로운 행실을 보지 않고, 오직 세리장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취급하였다.[21]바리새인들은 삭개오가 “세리라는 이유로 거부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회복을 도우신다.[22] 따라서 삭개오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이자, 누구나 지위에 상관없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23] 이렇듯 이 동사 해석의 두 가지 경향은 본문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누가는 습관적 현재와 미래적 현재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문맥으로 해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미래적 현재가 더 적합하다.[24]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7).세리 요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세리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지는 않았으며, 카피토처럼 정당하게 부자가 된 세리도 존재한다(7절 주해). 따라서 세리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기준은 그들의 직업이 아닌 편법행위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삭개오를 소개할 때 느끼게 되는 청중/독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2절 주해).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한다.[25]삭개오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발언 자체가 다소 충격적이다(토비트 10:10에서 라구엘은 토비아에게 자신의 신부 사라와 재산의 절반을 넘겨준다).[26]삭개오의 자발적인 반응은 부자 관원과 대비된다(18:23).[27] 그리고 토색에 대해서는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보상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위기 6:4-5과 민수기5:6-7은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명한다.[28] 미쉬나에 의하면 2배로 보상해주도록 되어 있다(m. Ketub.3:9).[29]양의 경우에는 특별히 네 배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m. B. Qam. 7:1).[30]그럼에도 토색에 대한 네 배 보상은 율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출애굽기 22:1에 따르면 양 한 마리를 훔쳐 죽이거나 팔면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 사무엘하 12:6에서 다윗은 양 새끼를 빼앗아 손님에게 대접한 자는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헤롯은 절도에 관한 처벌을 강화하여 도둑은 네 배로 갚도록 했다.[31]그러므로 삭개오의 보상은 적절하다. 더욱이 삭개오는 자신의 지난 잘못을 청산하고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1] Bock, Luke 9:51-24:53, 1519.

[2] Bock, Luke 9:51-24:53, 1519.

[3]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5.

[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5]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305.

[6] Bock, Luke 9:51-24:53, 1510.

[7] Bock, Luke 9:51-24:53, 1507-1508;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3.

[8] Evans, Luke, 282.

[9] Evans, Luke, 282.

[10] Bock, Luke 9:51-24:53, 1508.

[11] Bock, Luke 9:51-24:53, 1508.

[12] Evans, Luke, 282;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3] Bock, Luke 9:51-24:53, 1510;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4]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4

[1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6] 습관적 현재로 해석하는 학자로는 Alfred A. Plummer, Craig A. Evans, Frederick L. Godet, Joseph A. Fitzmyer, Luke T. Johnson이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미래적 현재로 해석하며, Darrell L. Bock, Robert H. Stein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7] Evans, Luke, 280

[18] Godet,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218.

[19] Evans, Luke, 280;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

[20] Evans, Luke, 281.

[21] Richard C. White, "A Good Word For Zacchaeus? Exegetical Comment on Luke 19:1-10," Lexington Theological Quarterly 14 (1979): 89.

[22]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2.

[23] Mitchell, "Zacchaeus Revisited: Luke 19, 8 as Defense," 162-163.

[24] di,dwmi의 용례 분석과 미래적 현재의 해석적 적합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신현우, “부자 삭개오의 구원,프로에클레시아 17 (2010): 122-123를 참고하라.

[25] Bock, Luke 9:51-24:53, 1521.

[26] Bock, Luke 9:51-24:53, 1521.

[27] Bock, Luke 9:51-24:53, 1521.

[28] Stein, Luke, 468.

[29] tr. Dandy,Mishnah, 249.

[30] tr. Dandy,Mishnah, 340.

[31] Josephus, Jewish Anitiquities Books ⅩⅤ-ⅩⅦ, Ⅹ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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