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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개인의 성품과 행위가 선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주머니가 가벼워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거짓말에 속을망정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아도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귀한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답답하다. 이들은 남들도 나와 같을 거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보다 자신의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 더많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묘하게 거짓말하고, 친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많다. 그들 역시 남들도 나와 같을거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당할 바에는 자신이 남을 이용하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선함을 지키고 교묘한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타인이 자신과 같다는 신념을 버려야 한다.
부정함을 모르고 사는 길이 순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러움을 알고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결단 역시 순결을 지키는 길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이리와 같은 자들이 많이 있다. 신앙의 언어를 빌리지만,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순박한 사람들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적잖이 휘둘린다. 수많은 교회가 엉망진창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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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서 순전히 내 사고에 의존하고 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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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조선 말기 기독교인들은 복음대로 살려고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탄압에 의해 순교자들이 발생해도 신앙을 굳걷히 지켰던 믿음의 조상들의 피가 이 땅의 복음화를 앞당겼다.
현대 사회에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 요인 중 하나가 기복주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복'이라는 말에 이끌려서"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구호에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들이 많다. 그 '복' 때문에 교회에 왔는데, 나는 언제 남들처럼 '복' 받나 싶어서, 신이 자신만 외면하는 거 같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
교회 성장에 눈먼 목사들이 '전도'와 '복음화'를 명분으로 삼는다. 정작 자신은 전도는 커녕 복음 선포도 안하면서, 부교역자에게 출석인 수로 압박하고, 교인들에게 전도를 강요한다. 교인 수가 증가하면, 지가 잘난 줄 알고 사례비 늘리고 좋은 차로 바꿔탄다.
기독교 가정이라는 명분 아래, 특히 목사와 장로 등의 자녀들이 믿음 없이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에 가는 사례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성경 인물을 본따 지었을 텐데, 부모가 자녀의 이름만큼이나 신중하게 교육을 시켰는지 의문일 때가 있다.
나는 기독교의 역성장이 어떤 면에서 교회의 정상화라고 생각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믿음이 아니고서는 교회에 다닐 수 없고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루터기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에 제대로 사로 잡힌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어난다면,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시대라고 믿는다. 복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설교 수없이 쏟아지지만, 성도들 삶은 왜 변화되지 않을까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7334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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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학자들은 고대 근동부터 랍비문헌까지 참고할 수 있다. 풍부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경이 구전되고 기록으로 통용되던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그들이 향유한 문화를 동일하게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럼에도 거시적 흐름과 미시적 현상을 분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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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교회가 죽어가지만, 오순절 계통 교회는 부흥하고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는 기간 동안 여러 영국 교회를 방문해보고 싶다. '성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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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학교에서는 교수들부터 박사 과정 학생을 연구자이자 박사 후보생으로 대우해준다. 동시에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 학생으로 본다. 이같은 인식에서 박사 과정 학생은 세 가지 태도를 갖춰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교수들은 박사 과정 학생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 상태이지만, 박사 후보생으로서 발언과 주장이 학자로서 평가를 받는다. 주제와 상관 없이 자신의 주장을 섣불리 결정하거나 표출해서는 안되며, 주장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 과정 학생은 선행 연구를 답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를 창조해야 한다. 따라서 선행 연구를 뒤집거나 방향을 선회하거나 보완해야 한다. 지도 교수를 비롯해 심사 위원 누구라도 내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견고한 성을 구축한 학문의 세계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려면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자신의 분석과 참신한 주장이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내 견해는 수 많은 주장 중 하나이며,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수많은 선배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선행 연구를 통해 끊임 없이 배우며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
지난 박사 과정 1년 동안 가장 도전 받은 영역은 학습법이나 글쓰기 등 연구 능력이 아니라 바로 정신의 영역이다. 선행 연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의 피드백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정신 상태가 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매 과정마다 성장통이 적잖았는데, 이번 박사 과정에서도 만만치 않은 압박이 있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적응력이 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뭐든 첫 1년이 힘든 법이니까, 앞으로는 좀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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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동시대적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상이 있다면, 현 연구 본문에도 적용해도 되는가? 최소주의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연구 본문에서 유추할 수 없는 자료는 인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나에게 크나큰 부담이 된다. 하지만 난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전략 1. 선행 연구의 주장을 수용하고 최근 연구 자료를 보강하면서 내 견해를 만든다.
전략 2. 선행 연구의 주장을 거부하고 내 방식대로 주장을 펼친다.
원칙적으로는 2번을 고수하고자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버거움이 뒤따른다. 2번을 선택해도 더이상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1번이 현명한 답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지금은 1번이 전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 없이 배워야 하는 학생이라는 것, 지도 교수는 이미 검증된 전문가로서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혹시나 내가 나만의 세계에 갇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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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 경험과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이다.
대안학교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3년 정도 독서 토론을 재능 기부 형태로 진행한 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반에 토론으로 진행하다가 후반에는 글쓰기로 전환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토론다운 토론이 진행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모르고, 상대방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글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도록 하는 방향이 더 효과적이었다.
영미권에서 세미나와 토론 시간을 보면, 대체로 발표자들은 완성도가 낮은 아이디어 차원의 발상을 일정 수준으로 발효시켜서 의견을 개진해보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발표자가 설익은 아이디어을 꺼내 청중과 대화를 통해 발전시킨다는 인상이 강하다. 유독 한국인들은 완성된 원고를 발표 이전에 나눠주고 읽기 때문에 아이디어의 구현 완성도가 높으며, 청중으로부터 질문이 덜 들어온다.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aster of Theology 과정을 하고 있을 때, 수업에서 시험을 치르긴 했어도 가장 큰 점수를 차지하는 건 paper였다. 자율연구(independent study)는 100% paper로 평가받는다.
현재 재학 중인 영국 학교에서는 세미나나 스터디 그룹 공고는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다. 지도 교수마다 지도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 지도 교수의 경우 신약학부 교수들이 전원 참석하는 세미나를 권했을 뿐 그마저도 의무 참석이 아니었다. 최근 스터디 그룹 홍보에는 "글 쓰느라 바쁘겠지만 일단 공고가 있으니 이메일을 돌린다"라고 써서 보내셨다.
현재 distance learning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고,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어서 차후 진행 상황을 잘 모르지만, 학위 논문 구술 면접 이외에는 paper로 평가받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토론보다 글쓰기가 더 중요한 상황이고, 그 글쓰기를 위해서는 독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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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신 시절 조교 자격으로 연구소에서 공부하다 보니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xxx파"(좌파, 우파 아님)라고 분류되었다. 당시에는 신경을 안 써서 그러려니 했는데, 세월이 지나갈 수록 내가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논문 지도 교수의 영향력은 남다르다 싶다.
영국 학교 인문학 박사 과정에서는 입학 후 바로 논문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robationary Review는 학생이 박사 과정을 진행할 역량이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인 동시에 논문 초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개월 간 지도 교수와 교류하면서, 이전까지 경험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는 상호작용을 경험하고 있다. 수업이든 자율 연구(independent study)든 교수의 평가가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그 중요성은 박사 과정에도 적용되지만, 학생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내 경험에 의하면, 지도 교수는 학생에게 정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최대한 학생의 주장과 근거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반론이나 생각을 남긴다. 그에 대한 수용 여부는 전적으로 학생의 몫이다.
내 생각에 지도 교수와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 때 해결 과정이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견지해서 지도 교수와 심사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해도 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현격히 낮을 것이다. 보통 이 길을 선택할 경우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하는 사례가 많았다.
지도 교수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해도 한다. 안전한 길이지만, 학생이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갖지 않고, 지도 교수의 의견을 수용하는 수동적 태도는 좋은 평가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자신과 지도 교수의 견해 차이를 인지하고, 자신 스스로 둘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학생에게는 의견 차이만큼이나 긴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겠지만, 아마도 지도 교수는 학생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까 싶다.
영국 학교에서는 지도 교수를 조언자(advisor)라고 지칭한다. 학생은 연구자로 대우한다. 이전까지는 교수들의 수업을 이해하면서 희열을 느꼈다면, 지금은 내 연구를 가지고 지도 교수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성취감을 느낀다.
왜 영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들이 지도 교수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충성도를 보이는지 조금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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