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에스겔서에서 절기/명절은 총  네번 사용되었다(36:38; 45:17–25; 46:9, 11). 첫 번째 사례인 36:38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을 표현하는 비유이므로 실질적으로는 절기에 관한 구절이 아니다. 두 번째 사례인 45:17–25에서는 ‘명절’에 포함되는 실례로 유월절(21–24절)과 초막절(25절)에 관한 규정을 선포한다. 여기서 ‘초막절’이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절기의 시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 사례인 46:9는 절기에 백성이 출입해야 할 문에 관한 규정을 선포한다. 네 번째 사례인 46:11에서는 ‘명절’이란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소제에 관한 규정이 진술되어 있다. 에스겔서 40-48장에서 새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에서 절기에 관한 에스겔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은 차지하고 있다.

반면 에스겔은 안식일에 더 관심을 둔다(20:13, 20, 21; 22:26; 23:38; 45:17; 46:1, 4–5).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을 군주의 주도로 준수되어야 하며(45:17), 관련된 지침을 제시한다(45:18–25; 4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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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나타난 절기는 총 3번 사용되었다(1:14; 29:1; 33:20).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특히 1:11-15,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비교적 성실히 이행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분노하시는 이유는 정의의 부재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악의 근원을 정의의 부재로 정의한다.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성일(holy day)는 안식일이다(56:6; 58:13[x2]; 66:23).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즐거운 날, 존귀한 날로 구별하셨다 (58:13). 참고로 스가랴에서는 초막절을 명령한다(14:16-19). 또한 이사야는 월삭/초하루(New Moon)에 대해서도 말한다(1:14; 66:23).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정리하자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절기, 안식일, 초하루를 지켜야 한다. 이사야가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모세의 율법이 정한 모든 성일을 지키는 이상을 그렸으리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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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절기 사용을 분석하다 보면, 안식일이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5장에서 '유대인의 명절'(혹은 '익명의 절기', 1절)에 언급된, 베네스다 치유 사건 이후 안식일 논쟁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요한이 유월절을 중심으로 절기 순서를 배열하고, 자신의 신학을 녹여내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같은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에스겔 45장 17절이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

17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이 구절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행하는 날에 명절과 안식일이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이같은 유대 관습에 주목하는 동시에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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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유대인의 명절’(5:1)을 부림절로 보는 해석자들이 대세라고 한다. John Bowman의 “Identity and Date of Unnamed Feast”는 그 중 하나이다. 영역본에 따라 이 절기를 ‘익명의 절기’라고 하는데, 저자가 특정 절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갖는 효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중/독자로 하여금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못하는 효과가 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총 여섯 차례나 절기를 언급하는데, 예외적으로 이 명절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절의 특성을 연상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의도적으로 청중/독자가 그 절기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절기의 특성을 연상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요한이 절기를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요한은 굳이 절기를 언급한다. 그 이유는 요한이 의도하는 두 번째 효과라고 불수 있다. 요한은 청중/독자이 어떤 절기인지 바로 알 수 없어도, 절기라는 시기를 염두케 한다.

이러한 의도는 명절의 특성과 동떨어진, 그러나 요한이 반드시 서술하고 싶은 사건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대다수의 견해대로 저 절기가 부림절이라고 한다면, 요한에게 부림절이라는 다른 절기에 비해 큰 비중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중에 일어난 베네스다 사건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봐야 한다.

내가 볼 때 요한복음은 절기와 그에 맞닿은 사건이 아주 중요한 해석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요한은 절기의 의미를 살려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유월절, 초막절, 수전절), 반대로 절기의 의미를 퇴색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도 한다(유대인의 명절). 현재 이 부분을 틈틈이 살펴보고 있고, 일부 내 박사 학위 논문에 포함되겠지만, 세부 사항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난 이후 진행될 연구 과제로 넘길 예정이다.

부림절은 하만의 유대인 말살 정책로부터 구제된 민족적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만약 요한이 이 절기의 의미를 살리고자 했다면, 5장은 민족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5장은 베네스다의 행각 중 한 곳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볼 때 요한의 절기 사용 중 절기의 유래와 의미와 동떨어진 사건 진술은 이 곳이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부림절이란 절기를 명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은 그 자체로 은혜롭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어 서른여덟 해 동안 고통받은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의 긍휼하심은 분명 기억될 만하지만, 요한의 절기 사용과는 이질감이 있다.

오히려 요한은 이 치유 사건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강조하신다. 예수는 안식일을 초월하는 존재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접하는 청중/독자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에 요한은 예수께서 절기를 준수하시며, 그때마다 예루살렘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 절기를 준수하는 분이시다. 또한 요한은 안식일이라는 규범은 그에게 족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5-10장이 재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는데(634-662쪽),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베네스다 치유 사건과 안식일 논쟁은 연속되는 이야기이며, 각각 베네스 치유사건은 유대인의 명절,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이라는 유대인들의 규범과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절기 사용과 예수의 정체성이라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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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절기가 바로 '유대인의 명절'(5:1)이다. 요한은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본문에서는 절기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절기의 이름은 청중/독자들로 하여금 그 절기의 특성과 규례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절기의 이름을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그 명절의 특징과 의식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라는 수식어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거하셨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연속성을 고려하면,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4장에서 중요한 구절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1) 

청중/독자들은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절기를 알고 있지만, 그 명칭을 통해서 연상되는 대상이나 의식 등은 애매모호하다. 그에 비해 요한복음은 베데스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안식일 논쟁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의도를 통해 요한은 명절은 아니지만, 그만큼 실생활에서 지켜지고 있던 안식일이라는 규범을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법 (참조.  출 20:8-11; 35:1-3)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법 (참조. 레 24:1-8)이다.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병자를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일을 하셨고,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17-47절). 후일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하게 되는 그 답변 중 다음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 그의 대리인으로서 일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사역은 구속사적이다. 그러므로 그는 안식일의 제약을 뛰어넘으신다.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으로 작용한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대 절기를 성취하신 분으로 예수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특정 명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칭하며 안식일 논쟁을 주요 사건으로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익명의 절기'라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유대인'을 강조하는 특성은 사라지겠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는 절기라는 특성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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