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저주시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2.25 복수의 하나님?
  2. 2015.01.18 시편과 정치(Psalms and Politics)

복수의 하나님?

추천도서 2015. 2. 25. 14:40

교회기도모임에서 시편을 본문으로 인도하다보니, 시 109편와 같은 저주를 담은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에 대해서는 "시편과 정치"에서 짤막하게 다루고 차후 연구주제로 놔두었는데, 찜해두었던 『복수의 하나님?』을 구매하게 되어 틈틈이 읽었다.


앞서 쓴 글에서 개인적으로 시 109편의 저주에 대해서는 그 정경적 가치를 인정하지만, 오늘날에도 저주를 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본문의 저주가 혹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혹독함은 현대 독자들만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도 느꼈던 모양이다. 다만 그들이 받은 충격이 아주 큰 탓인지, 아니면 정경적 성경해석방법론이 정립이 안된 탓인지, 원수시편과 저주시편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을 내놓았다.


가령 기독론적 복음(십자가의 긍휼과 사랑)에 부합하지 않는 본문들은 배제하는 마르시온주의나 이와 유사하게 잔혹한 폭력성이 드러나는 구약을 열등한 본문으로 치부하고 신약에 더 권위를 둔다거나, 구약은 유대교의 하나님으로 신약은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구분하는 등 갖가지 사례들이 그 예이다. 저자인 에리히 쨍어(Erich Zenger)는 이러한 해석적 전통을 1-2장에 걸쳐서 나열하며 원수시편과 저주시편의 해석적 어려움을 드러낸다. 


3장에서는 시편 자체에 대한 통찰로 시편의 폭력성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고찰한다. 본문의 폭력성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며 저자는 자신의 기도대로 현실에서 자행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가해자가 아닌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약자이며, 그의 폭력성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기반한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의로운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갖고 있는 자들이 많으나, 종말의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 공평과 정의를 바로 세우실 것이다.


4장에서는 원수시편과 저주시편의 해석학을 다룬다. 현대 독자들은 이 장을 통해 해당 본문에 대한 해석지침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연구를 통해 기여할 수 있는 과제이기도 한거 같다.


5장에서는 실천적으로 오랫동안 예배에서 배제되온 원수시편과 저주시편을 예배 기도로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서 다룬다. 어쩌면 이 부분이 현실적으로 가장 도전이 되는 과제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편들 역시 구약적 상황속에서 실제 기도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적용해야 할 과제인건 분명하다.


바램이 있다면, 에리히 쨍어의 시편해석 4권 중 마지막 책을 번역했다는데 그 앞선 책들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독일어는 도저히...



복수의 하나님

저자
에리히 쨍어 지음
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 2014-03-2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구약사상문고 시리즈 8권. 독일 뮌스터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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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9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저자의 저주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대적을 저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한다.

저주의 내용을 보면, 대적자 한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은 물론 후손까지 도말시켜달라고 한다. 그야말로 저주 중의 저주이다.

시편 기자는 왜 이토록 심각한 저주를 퍼붓는가?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아다" (시 109:16)

대적자들의 횡포는 2-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태도는 후안무치의 전형이다.

시편 저자는 대적자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를 향해 저주를 쏟아붓는다. 그의 입장에서 대적자는 심판 받아 마땅하다. 반면, 자신은 대적자를 저주해도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찌라도 주의 종은 즐거거워하리이다" (시 109:28)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이기적으로 들린다. 시편 저자나 대적자나 둘다 저주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잘못을 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어떻게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대적은 처참하게 심판하시고, 자신에게는 복을 달라는 기도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기복주의 신앙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 109:22)

이 구절이 바로 대적자를 향한 저자의 저주와 저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정당화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가난과 궁핍, 마음(중심)이 상함은 가시적인 상태가 아닌 영혼의 상태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의미한다. 즉, 시편 저자의 대적은 개인적인 대적자인 동시에 하나님의 대적자이다. 따라서 저자의 저주와 구원 요청은 정당성을 얻는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오늘날에도 대적을 저주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통치자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는 정치적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향한 심판의 정당성과 정의실현을 믿음의 행실로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이다. 요새 심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중에 시편을 읽으니 "시편과 정치"란 주제로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날이 이어진다. 아... 난 신약학 전공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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