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바리새인'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2.24 논쟁자 그리스도
  2. 2012.03.08 신학생과 경건훈련
  3. 2011.09.15 누가복음 19장 10절 주해
  4. 2011.08.25 누가복음 19장 7절 주해

논쟁자 그리스도

추천도서 2014. 12. 24. 18:28


논쟁.

팽팽한 대립을 연상시키는 껄끄러운 단어이다. 그런데 존 스토트는 예수를 "논쟁자 그리스도"(Christ the Controversialist)로 묘사한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에서 대체로 온유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를 떠올린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치유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구제에 힘쓰라고 가르치셨고, 창녀와 세리와 어울리셨다. 그는 자신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사회적 약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궁극적으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반면에, 예수는 논쟁자이시다. 실제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으셨다. 특히, 율법준수에 엄격했던 바리새인에게 거친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셨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고 저자가 논증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논쟁은 진리를 위한 외침이다. 예수는 종교지도자로서 지위를 누리지만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두개인과 헛된 열심과 변질된 가르침으로 오만에 빠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당시 청중들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셨다.


저자는 예수께서 논쟁을 통해 가르쳐주신 믿음의 본질을 "복음주의"로 규정하는데, 서론에서 이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의 목적은 아주 단순하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 즉 진정하고 옳고 원초적이고 순존한 기독교임을 주장하고, 이 주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입증하는 일이다. (19쪽)


그리고 본론에서는 예수의 논쟁을 통해 신앙생활의 8가지 측면(종교, 권위, 성경, 구원, 도덕, 예배, 책임, 야망)을 다루고 있다.


저자가 복음주의를 외치는 이유는 예수의 논쟁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 가운데 그치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가 볼 때 우리는 예수의 복음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상황을 잘 모르기에 현재 상황과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보아도 너무나 유효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유효성은 이 책이 출간된지 44년이란 세월이 흘려 반세기가 가까워져가는데도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반성해도록 만든다.



2014. 12. 24 성탄전야를 앞두고




논쟁자 그리스도

저자
존 스토트 지음
출판사
성서유니온 | 2014-11-2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한국교회는 기독교적인가 바리새주의나 사두개주의의 현대판인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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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과 경건훈련

성찰 2012. 3. 8. 23:19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율법과 구전(Oral Tradition)을 아주 엄격하게 지켰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자신들의 열정과 규율과 다른 이들을 정죄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이웃에 대한 정죄와 같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오늘 날에는 신앙생활에는 열심이지만 이중적인 모습을 사람들을 보이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
. 하지만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바리새인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나타나는 일들을 보면 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못하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최소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경건의 모습도 경건의 실제도 없다.

그래서 더욱 신학교육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경건훈련에는 소홀히 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경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차후에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육할 때에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신학적 지식과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능력보다 경건의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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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34),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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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모든 사람이 불평한다.[1]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무시려고 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실제로 불평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πάντες)이 아닌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3]그렇다면, 이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 불평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기 때문이다(5:30; 15:2).[4] 실제로, 동사 διαγογγύζω의 주체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이다(15:2).[5]동사 γογγύζω의 주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5:30).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실질적인 적대세력은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6]사실, 누가복음에서 율법학자(γραμματεῖς)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νομοδιδάσκαλος)을 가리킨다.[7]이러한 사실은, 5:17 5:21의 평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누가는 자신의 독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8]또한, 사도행전 5:34(ΦαρισαῖοςὀνόματιΓαμαλιήλ νομοδιδάσκαλος)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활동했다는 정보를 준다. 비록 율법을 가르치던 자들이 모두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두 집단이 바리새인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9]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와 동일하게 여겼다(18:11).[10]바리새인들의 전승을 이어받은 랍비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랍비들은 세리를 도둑과 동일하게 여겼고(m. B. Qam. 10:2),[11] 급기야 살인자와 동등하게 여기기도 했다(m. Nedarim 3.4).[12] 이렇듯 세리는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그들이 들어간 집은 물론 내부에 있는 물건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길 정도였다(m. Ohar. 7:6).[13]이러한 증거에 따르면, 세리를 죄인으로 여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14]그러므로, πάντες는 과장법이다.[15] 더구나, 모든 세리들이 죄인 취급 당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가이사랴의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 간의 토지 분쟁이 생겼을 때 유대 유명들과 세리 요한이 함께 플로루스(Florus)에게 중재를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다.[16]또한, 8 달란트를 제공하고 중재에 대한 약속을 받아두었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지도자들과 요한이 앞장서서 플로루스에게 호소하다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도 있다.[17]이 기록에 의하며, 요한은 세리였음에도 지도자들과 함께 분쟁을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유대사회에서 부정한 자로 취급 받고 배척 당하는 세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전체가 세리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견해[18]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더구나 누가는 세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3:12; 5:27; 7:29; 15:1; 18:10).[19]그렇다면 세리들은 모두 불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되었을까? 유대 지역 세리였던 카피토(Capito)는 세금 행정관(administrator of taxes)으로서,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었다.[20]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 역시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리고 지역은 무역 중심지이다.[21] 더구나 그는 세리장이다.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은 세리는 토색으로 부자가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할수록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세리장이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22] 이 구절에서는παρὰ ἁμαρτωλῷ가 강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세리들과 그들의 편법 행위에 대한 감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23] 동사καταλύω는 문자적으로 “짐 싣는 동물의 장구를 풀어주다”(to unhitch pack animals)라는 의미이다.[24] 9:12에서는“유숙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맥상 식사교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집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의 죄를 나눈다는 의미이므로, 예수께서 죄인인 삭개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된다.[25] 그러므로 예수의 상식에 어긋난 행동은 이들이 불평하는 원인이 된다.[26]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의 식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념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죄인들을 환영하신다(참조 7:34).[27]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군의 무리들이 삭개오를 죄인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죄인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28]


[1] Bock, Luke 9:51-24:53, 1518.

[2] 참조.Bock, Luke 9:51-24:53, 1519.

[3] Bock, Luke 9:51-24:53, 1519.

[4]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5. Johnson이 언급한 7:34, 39는 동사 γογγύζω 혹은 διαγογγύζω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5] BockEvans는 별다른 설명 없이 바리새인으로 단정 짓지만(Bock, Luke 9:51-24:53, 1519; Evans, Luke, 283), 본문은 분명히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6] Evans, Luke, 91, 97.

[7] 참조.Bock, Luke 1:1-9:50, 479; Bovon, Luke 1, 17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212.

[8] Bock, Luke 1:1-9:50, 479. Bovon의 지적대로, νομοδιδάσκαλος5:17에서 한 번 사용되고, 이후로는 줄곧 γραμματεῖς로 사용된다(Luke 1, 178).

[9] Bock, Luke 1:1-9:50, 479.

[10] Evans, Luke, 282.

[11] H. Danby e.d. & tr., The Mishna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346.

[12] tr. Danby,Mishnah, 267.

[13] tr. Danby,Mishnah, 726.

[14] Evans, Luke, 91.

[15] Nolland, Luke 18:35-24:53, 905; Stein, Luke, 467.

[16] Flavius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Vol. ,trans. H. St. J. Thacker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 285-288.

[17] Josephus, The Jewish War Books -, .292.

[18]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19] Bock, Luke 9:51-24:53, 1513 n.2; D.A.S. Ravens, Zacchaeus: The Final Part of a Lucan Triptych?,JSNT41(1991): 22.

[20] Philo, On Embassy to Gaius, Vol. , trans. F. H. Col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7), §199.

[21] Evans, Saint Luke, 662.

[22] Johnson, The Gospel of Luke, 287.

[23] Bock, Luke 9:51-24:53, 1519.

[24] Bock, Luke 9:51-24:53, 1518;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1224;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Luke's Gospel, 940.

[25]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7.

[26] Plumm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434.

[27] Evans, Luke, 120.

[28] David A. Neale, None But The Sinners: Religious Categories in the Gospel of Luk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58 (Sheffield: JSOT Press, 1991),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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