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대선지서에서 다니엘서를 제외하고, 이사야서는 후대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와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다윗의 자손들 특히, 왕 같은 메시야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왕으로 묘사되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여 다스리시는 온 열방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그가 친히 창조하신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출처] 이승현, 성령, 50-51. 


이 진술에서 이사야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첫 번째, 구원자의 성격.
이사야가 내다본 메시야는 다윗 계열의 왕이 아닌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다. 여러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한다. 회복 이후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인지, 새 다윗 왕조를 재건한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러한 흐름과 달리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이라는 전례 없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두 번째, 구원의 대상.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하신다. 구약은 민족주의적 성경이 강하다. 예언서에 반복되는 '심판'과 '회복'이란 주제는 대부분 이스라엘(북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남유다를 중점으로)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을 향해 있어서인지, 구원 역시 온 이스라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등장은 새로운 다윗 왕조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식과 달리 이사야의 새 창조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히브리인들에게 열방 구원이라는 개념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독특성은 내게 큰 과제를 안겨준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내어줌'(lay down)이란 가르침을 이사야의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연결 짓는 견해가 많은 탓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요한이 이사야를 사용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 역시 유의해야 한다.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새로운 왕국을 통치한다는 오랜 믿음과 달리 다윗의 후손이 열방을 구원하신다는 개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혀야 한다. 예수의 구원 대상이 유대인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방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유의 깊게 관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관련글:
[연구주제/요한복음의 목자 은유] -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그리고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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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법 많다. 내 연구 범위에 한정해도, 에스겔의 예언을 스가랴가 발전시킨 흔적들이 발견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스가랴 1-8장이 에스겔 40-48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9-14장의 묵시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가랴 9-14장이 에스겔 34-37장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스가라가 에스겔 전통을 계승한 이유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모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는데,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이 은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 여러 면에서 이사야의 독자적인 위치가 눈에 뛴다.

현재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의 역할이다. 분명 요한은 이사야를 잘 알았고 그의 복음서에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견해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목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나 역시 연구제안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이사야 53장이 아닌 스가랴 9-14장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 나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 자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 희생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와 마태의 사례를 통해 그 같은 주장을 개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차후 이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복음 10장이 어느 본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히려면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를 다루면서 세 선지서 중에서 누가 요한복음과 가장 밀접한지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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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둘 사이의 침묵 이면을 탐구한다.


Dalit Rom-Shiloni, “Ezekiel and Jeremiah: What Might Stand Behind the Silence?,” Hebrew Bible and Ancient Israel 1 (2012): 203–230. 

https://english.tau.ac.il/sites/tau.ac.il.en/files/media_server/imported/15/files/2012/10/Rom-Shiloni.HeBAI-2-2012203-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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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읽는 선지서』 / 에드가 W. 콘래드 / CLC


이 책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라는 세 명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수령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세 명의 선지자들이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그에 따른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성전과 기록방식 등에서 차이가 난다(대략적인 비교는 19쪽에 표로 정리가 되어 있다). 또한, 저자에게 있어 선지자들의 '보는 것'은 예언의 선행성과 단일저작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떠오르는 생각들이 몇 가지 있다. 첫번째는, 심판의 점진성과 선지자들의 수동성이다. 세 선지자들 모두 다가올 심판을 선포한다. 그런데 그 때가 다가올수록 선포자들의 태도는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한다. 하나님이 각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 수령자가 압도 당하는 강도가 점점 강렬해진다. 이러한 현상은 성전의 부정함과 환상의 신비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두번째는, 제사장 선지자의 등장이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은 엄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사장 선지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추측하건대, 성전과 제사장의 연관성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선지자에게 성전 파괴와 재건축에 대한 예언이 주어질 때, 그 심각성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제사장들이다. 특히, 성전의 재건축 이후 의례를 집행해야 할 사람들 역시 제사장들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제사장 선지자들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새롭게 읽는 선지서
국내도서
저자 : 에드가 W. 콘래드(Edgar W. Conrad) / 장세훈역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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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지역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다. 


"After the fall of the city Jerusalem is never again mentioned by name. The oracles of salvation and restoration scrupulously avoid mention of Jerusalem, and marital and sexual imagery is entirely absent from the descriptions of Israel’s future.” " - Julie Galambush, Jerusalem in the Book of Ezekiel: The City as Yahweh’s wife, SBL Dissertation Series 130 (Atlanta, GA: Scholars Press, 1992), 145.

"도시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다시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신탁은 철저히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결혼과 성적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묘사에서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스가랴도 자신의 예언에서 "성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표현이 "하나님의 집"(the LORD's house, 14:20, 21)이다.


에스겔과 스가랴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성전의 재건이 실현되기 전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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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연구주제로 삼은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는다. 포로귀환 이후 에스겔과 스가랴가 목자 모티프를 사용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솔직히, 내가 요한복음의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박사학위 취득의 용이함 때문이다. 내 신학석사 논문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에서 참신한 해석적 가능성을 개진했으므로,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에서 내 전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거라고 예상했다. 목자 모티프란 주제 하나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라는 두 분야에 숫가락을 얹을 수 있는 기회는 덤으로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연구를 진행하고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한때 내 관심사가 포로기 신학이었다는 사실말이다. 당시에는 포로기 시대를 거쳐 묵시문학이 발현되므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차후 방향설정에 도움이 될거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석사 과정에서는 신약 내 묵시문학으로 간주되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내 관심사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스가랴 9-14장은 구약 내 묵시문학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14장에 집중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의 심령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포로기에 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반복적으로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 쓰인 구약성경과 목자 모티프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목자 모티프야말로 예언자들의 심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수단이자 독자들을 설득하는 강력한 언어였던거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포로기 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왜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는듯 하다. 지금껏 나는 내 연구와 포로기 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칫 '우연' 혹은 '편의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끊임 없이 나에게 역사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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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날드 클레멘츠의 글을 인용해서 선지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Probably such a political possibility could not readily have been envisaged; a popular democracy was not then a recognized ideal in Israel. Instead, the full weight of responsibility is placed by Israel's prophets on the institution of kingship—and by implication on all related offices of public leadership—as a form of commitment and service for the benefit of others. - Clements, Ezekiel, 155-6.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중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언급은 시대착오적이다. 그 당시 대중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생성되어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므로, 클레멘츠의 진술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타당하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조 체제라 하더라도 선지자는 왕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 그 앞에 서서 그들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적용해보면, 목회자들은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사장 역할만 부각시키고 선지자의 책무는 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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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클레멘츠(Ronald E. Clements)는 자신의 『에스겔』 주석에서, 다윗 왕조의 몰락 이후 다시 등장하는 다윗 계열의 왕조에 대해 주해하면서 대중민주주의(a popular democracy)를 언급한다.
Probably such a political possibility could not readily have been envisaged; a popular democracy was not then a recognized ideal in Israel. Instead, the full weight of responsibility is placed by Israel's prophets on the institution of kingship—and by implication on all related offices of public leadership—as a form of commitment and service for the benefit of others. - Clements, Ezekiel, 155-6.
비단 고대 이스라엘 시대만이 아니라 중세시대에도 왕권신수설처럼 왕의 권한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다. 이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만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강력한 권력이 민중들을 압박해온 탓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단순히 특정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탓의 탓이 더 큰 문제로 작용할 때가 많다. 엄밀히 말해서, 체계(system)가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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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emains, however, an incomplete account of Ezekiel’s picture of the new Israel, for God’s people are once more to be led by a monarch. -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Ⅱ: The Theology of Israel’s Prophetic Traditions, Translated by D. M. G. Stalker (New York: Harper & Row, 1965) 235.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한 에스겔의 그림이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번 더 왕조의 통치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이스라엘 본토로 복귀한 선지자 에스겔은 목자 모티프(34장)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비록 목자 모티프를 통해 야웨께서 이상적인 목자가 되신다는 희망적인 선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바벨론 포로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야웨의 회복을 말해야 할 때 그는 그야말로 처참한 심경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거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 받는 다윗 조차도 궁극적인 왕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왕조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한계성을 절감했을 때 에스겔이 느꼈을 참담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거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은 얼마나 절실했을지 생각하면 내 가슴이 울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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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서는 에스겔과 스가랴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두 본문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려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아래 출처는 Mark J. Boda, Haggai, Zechar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9) 201이다. 각주 20번에 언급된 자료들은 나중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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