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Jesus’ mission as the good shepherd who desires the well-being of the sheep has as its goal the production of life in abundance, already signified in the abundance of wine at the wedding in Cana and the abundance of food left over at the feeding of the five thousand.

[Source]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300.


요한이 예수의 첫 이적으로 기록한 가나 혼례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해석자들이 많다. 위에 기술한 Lincoln도 그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2: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의 진술은 이같은 해석의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요한의 기독론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보면, 가나 혼례 사건은 부정적인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따른 이유가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요한의 기독론은 자기 부인(=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기반한다.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자기 부인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본문이다. 따라서 나는 Lincoln의 진술에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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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학위 논문은 방법론으로 주제를 관통해 자신만의 주장을 담아된 결과물이다. 방법론이나 주제가 새로울 필요는 없으나 주장은 참신해야 한다. 새로운 방법론으로 익숙한 주제를 다루어도 참신한 접근을 했다는 기여로 학위를 받는 경우도 자주 있다. 자신의 방법론으로 본문을 새롭게 접근하는 참신성은 가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벗어나는 해석이라면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인정을 받아야 할지 의문이 든다. 아래는 Helen C. Orchard 박사의 학위 논문을 토대로 출간한 『Courting Betrayal: Jesus as Victim in the Gospel of John』의 내용이다.

Practically, the Jews are already determined to kill him. There is no possible alternative ending to the Gospel. Hence, the greek that Jesus is referring to is not an ability to change his circumstances―the die is already cast. The only 'power' that he possesses is the ability to become powerless, and this is expressed in the voluntary nature of his sacrifice. He does this by consciously 'laying down' his life, rather than having it taken from him. That he uses authoritative terms to stress his passivity reveals the tension between the voluntary and involuntary narure of his role as the Lamb of God. He uses forceful phrases to qualify his renouncement of power. the allegory of the shepherd and his sheep, threatened by the wolf, contextualizes and aids in the interpretation of his words. When faced with danger, the hireling is able to flee, but the shepherd has no choice but to remain with the sheep, because his very nature is as the good shepherd. He has a relationship with the sheep and it is his duty to protect them―if he did not he would not be the good shpherd. He has no option but to accept the situation―to choose vulnerability in the face of a vicious enemy, to become a victim. (출처: 142―3쪽)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 무리를 요한 공동체로 보는 견해는 가능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따르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목자-왕 전승을 사용한 목적과 그 전승을 비틀어 사용한 이유이다. 목자-왕 전승의 대표적인 근거로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고, 구약성경 곳곳에 이 전승이 나타난다. 때로는 목자와 왕 사이의 구분 없이 사용되기도 함. 왕은 문자적으로 왕을 배타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지도자를 포괄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중요한 사실은 목자-왕 전승은 목자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한의 예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외성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무리의 반응을 보면, 이같은 선포가 그들에게 얼마나 생경한지를 알 수 있다(19―20절).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께서는 목자로서 자신의 자발적인 죽음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놓게 된 기적(mirales)과 표적(signs)들을 의지대로 조절하실 수 있었고, 하물며 자신이 죽어야 할 시기를 조절하셨다. 예수의 죽음은 필연성이며, 자신에게 닥칠 수난의 때를 조절하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이시다.

Likewise, Jesus uses the metaphor which caused him anguish in John 10, revealing that laying down his life will mean surrendering to a savage fate, to invoke anguish in Peter. This time there is no mention of the death of Jesus; the context is the death of Peter. The role of shepherd is conjoined with the role of victim. Jesus no longer understands this as his role; it now belongs t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s. Perhaps this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change that has taken place in the resurrected Jesus. He has escaped from the victim-cognizance which characterized his life before 'the hour'. The evidence of his victimization remains―one need look no further than the scars on his body―but there has been a shift in his self-understanding, revealing his own liberation from grief and fear. (출처: 262쪽)

또한, 예수의 죽음은 제자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강조하듯이, 자신과 제자 사이의 관계도 강조하신다. 베드로에게 목자 은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죽음이 동일하게 제자인 베드로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반면  베드로와 같이 있었던 자에게는 그러한 죽음이 닥치지 않는다. 

성경 해석을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접근법은 독자에게 참신함을 주지만, 그 방법론을 적용해 본문의 의미를 벗어난다면, 그것이 유익한 연구인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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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해석가들이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도전을 받고 있다.

예수와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역사적으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은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전 재건에 힘썼던 스룹바벨을 지칭한다. 스룹바벨은 귀환 공동체의 지지와 기대 속에서 성전 재건을 도모하지만,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던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약속을 성취할 자로 추앙받지만, 귀환 공동체의 기대와 달리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사야의 진술은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기대를 받은 지도자의 사망에 대한 절망과 탄식 가운데 나온 고백이다.

더구나 이사야 54-66장에서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에도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55:3)을 말하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은 말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한 언약'(55:3; 61:8)이라는 표현은 몇 차례 나온다. 절망에 빠진 귀환 공동체를 위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특히 하나님은 귀환 공동체를 향해 '네 남편'(54:5)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새로운 다윗의 등장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해석가들이 새로운 다윗의 등장에 더 주목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메시아/그리스도로 추앙받았으나,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러한 순서는 스룹바벨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자신의 궁극적 지상 사역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스룹바벨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스룹바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직접 귀환 공동체를 통치하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신의 방법대로 성취하신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좀더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 인용에 관해서는 주의에 주의를 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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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연구자들이 목자-양 비유의 기원을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11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은 스가랴 13장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견해라면, 목자-양 비유의 기원과 목자의 자기희생을 스가랴 9-14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자의 주장과 달리, 스가랴 13장은 목자의 자기희생을 말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목자-양 비유의 기원과 목자의 자기희생은 스가랴 9-14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목자의 자기 희생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을 다른 본문에서 찾아야 한다.

선한 목자의 죽음은 이사야 53장과 비교하거나 요한복음 1:29을 근거로 레위기의 속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부분은 내 지도 교수이신 David M. Moffitt 박사의 전문 영역이라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7:17은 '어린 양'과 '목자'라는 두 주제가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요한복음 이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같은 사상적 토대가 최소한 요한에게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다수 주해자들이 선한 목자 담론의 배경으로 초막절을 언급하지만, 그 기원으로 스가랴 14장을 언급하는 이들은 드물다. 더나아가 요한이 유대절기를 자신의 복음서를 해석하는 주요 틀로 사용한다는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선행연구와 달리 스가랴 9-14장을 통해 목자-양 비유의 배경과 초막절을 설명할 수 있으며,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은 이사야 53장 혹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선한 목자의 자기희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지도 교수를 비롯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내 전제부터 증명할 필요가 있다. 나의 어려움은 얼마나 집약적으로 내 전제와 추후 연구 계획을 설명하느냐에 있다. 또한 선행연구와 내 연구 사이의 간격을 얼마나 매끄럽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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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내어 놓음"(lay down; 10:15, 17, 18)은 전통적인 목자-양 은유에서 나타나지 않는 가르침이다.

모든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떼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으나(삼상 17:35; 사 31:4),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선한 목자는 그가 유일하다는 John Henry Bernard(John, ICC, Vol 2, 357)의 지적은 옳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사 3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예수께서는 유대 전승을 사용해 자신의 사역을 예고하셨고, 이같은 가르침은 이미 세례 요한의 선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이 구절은 레위기의 "속죄"에 비추어 연구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선행연구를 검토하는 단계에서 "속죄"를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는 "내어놓음"으로 표현된 자기 희생이라는 차이점에서 전통적인 "속죄" 개념과 결을 달리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이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해야 한다. 아마 이 지점에서 내 지도 교수인 David M. Moffitt 박사와 공통분모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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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꽤나 익숙한 본문이다. 특히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 본문에서는 lay down; vv. 15, 17, 18)이라는 표현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

내가 이 본문에서 주목하는 주제는 두 가지, 목자-왕 은유와 유대 절기(Jewish Festivals)이다.  

목자-왕 은유에서는 고대근동문헌(ANET), 구약성경, 제2성전기 문헌을 다루고,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나는 특이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선행연구는 대체로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장 등 목자-왕 은유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구절을 언급하고, 약간의 해설을 붙이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해석자는 목자-왕 비유에 나타난 선한 목자의 자기 희생이라는 주제를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요한이 의도한 유대 메시아 사상의 전복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유대 절기에 관해서는 선한 목자 담론을 초막절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이 초막절이라는 배경이 목자-왕 은유와 연결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요한이 영향받았을 구약 본문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가 구약 시대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자기희생을 통해 유월절로 시작하는 요한의 절기 흐름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를 풀 수 있다. 물론 본문의 순서에 의하면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만, 내 연구 범위에 의해 역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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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 아래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요한계시록과 연결하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아래는 그 중 하나의 예이다.

이 예언적인 "만화"는 그 선지자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이었을 것이며 십중팔구 그 묵시로 통합되기 전에 요한 학파의 구성원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443.


난 이미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목자 은유를 살펴 본 적이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스가랴 9–14장의 목자-왕 은유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을 배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현 연구에서 후대 자료는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나에게 도움만 되는 건 아니다. 특히,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계시록을 인용하는 편이 수월하다. 역으로, 요한복음에서 두 주제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복음의 흐름 전개를 아주 치열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내 추정에 의하면, 요한복음에서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은 유대 절기라는 또다른 장치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절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데, 과연 내 관찰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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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선한 목자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10:1-21에 이어 10:22-42에도 목자-양 은유가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앞서 강도와 목자의 구분, 목자의 희생 등을 가르치셨고 (1-18절),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19-21절)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확답을 얻고자 질문을 던지고 예수께서 대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2-42절).

유대인의 질문은 "당신이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요한복음은 모세와 율법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사상을 통해 군중이 기대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상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크다. 아마도 이 '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오랫 동안 예언되어 온 다윗의 후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해도 종교 심판을 받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다(25절). 더나아가 목자-양 은유를 사용해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26-27절).

그리고 다시한번 목자-양 인유를 통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신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시며, 우리는 그를 따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어긋한 대화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이룰 군사적 메시아(24절)와 예수의 긍극적인 사역, 즉 영생을 주는 것(28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이 관계로 예수께서 답을 마치신다(28-30절).

여기서 배경으로서 '수전절'(22절)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문맥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전절에 관해서는 구약과 중간기 문헌을 살펴봐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짥막한 인용으로 대신한다.

"수전절의 제정은 제1마카비서 4:59에서 묘사된다. ... 그런데 그것의 목적은 이제 안디옥으로부터의 구출과 성전 예배의 갱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383).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사이에 수전절의 기능이 드러난다. 즉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더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10:22-42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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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과 목자 심상의 긴밀성은 명확하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이와 관련하여 나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ThM) 졸업 논문으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 스가랴 14장, 요한계시록 7:9-17, 21:1-8 상호본문성 연구"를 제출하였다. 이 논문은 스가랴 14장이 요한계시록 두 본문 7:9-17, 21:1-8과 연결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 내 관심사인 요한복음 내에서는 두 심상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역사적으로 어린 양과 목자 심상은 별개로 전승되어 왔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증언자들에 의해 두 심상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어린 양 전승은 그 흔적이 많지 않고, 이사야 53장과 연결짓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목자 심상은 고대 근동부터 고대 이스라엘까지 오랜 세월동안 통용되어 왔다. 내 추측에는 요한복음에서 두 심상이 결합되는 단서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미 교회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별개로 존재하던 두 심상이 하나로 접목되어 나타나는 요한복음 본문을 역추적하는 과정이다. 이제 Literature Review라고 해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연구 주제 심화 탐구를 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는 섣부른 예단이나 짐작을 경계해야 하지만, 요한복음 저자가 두 심상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보고 있다. 후에 두 심상이 여전히 별개로 동작하고 있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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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박사 학위 연구 본문은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이다. 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이미 두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은 나온 상황이다. 박사 과정에서는 두 질문에 관한 잠정적인 결론을 보강하고, 나머지 한 질문에 집중해 답하면 된다. 내가 붙들어야 할 질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을 때, 그가 떠올린 밑그림은 무엇이었을까?'이다. 수많은 선행연구에서는 이사야 53장을 지목한다. 소수는 스가랴 13장 7절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소수 입장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 이사야 53장과 대안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의 기원, 이사야 53장과 대안

 

 

앞서 논쟁을 풀 방안을 발견한 듯한 감이 돈다고 적었다. 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12장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 12:34)

 

여기에서도 이사야 53장을 지지하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나 역시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사야 53장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의 죽음을 스가랴 13장 7절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12장에서 다시한번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설파하셨을 때 스가랴 13장 7절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요 12:41)

 

하지만 위 본문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 구절에서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이 막히는 느낌이 든다. 대세를 따라 10장과 12장은 이사야 53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된다. 이 지점에서는 내 기여가 없더라도, 이미 다른 두 질문에 대한 해답에서 학계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어서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무리하게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10장에서 스가랴 13장 7절이 배경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싹을 틔우는 중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려면, 수많은 자료를 분석하고 대세를 압도할 만한 강력한 논증을 내세워야 한다. 사실 이 과제만 해결해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손색이 없다. 어렵게 난관을 헤쳐나가도 12장에서 더 큰 장벽을 만난다. 인용 공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요한복음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다고 밝힌다.

 

답이 없지는 않다. 이사야를 대표적인 인물로 해석하면 된다. 간혹 신약 저자가 구약 본문을 인용할 때, 특히 선지자의 경우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 중 대표적인 인물을 내세우거나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을 내세우는 사례가 있다. 내 연구에 적용한다면, 이사야가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인물 중 대표로 꼽혔다고 주장하면 된다. 실제로 이 주장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 지점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와 스가랴의 관계에서 규명해야 한다.

 

내 앞에 끝을 알 수 없는 장벽이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박사 과정 시작 이전에 내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 있지만,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고비가 그만큼 많다. 엄밀히 말해 요한복음 12장은 내가 고민해야 할 본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요한복음을 계속 연구할 예정이고, 한편으로는 내가 가정하고 있는 신약의 구약 사용에 대한 전제를 시험하고 싶다.

 

신약의 구약 사용에 있어서, 나는 신약 저자가 구약을 구절 단위로 인용하지 않고 특정 본문을 밑그림으로 두고 그 위에 저자의 메시지를 얹힌다고 전제하고 있다. 구약의 밑그림과 신약 저자의 덧칠은 정교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해석자로서 신약 저자의 구약 사용을 분석하다 보면, 구약 본문의 메시지에 저자의 섬세한 각색이 더해져서 글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을 준다.

 

요한복음 10장과 12장은 내 전제를 실험하기 좋은 본문이다. 박사 학위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크나큰 부담으로 느껴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사명감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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