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E. Henderson의 The Book of the Twelve Minor Prophets이 아키브에 공개되어 있네요. 판본이 출판연도에 따라 다르니 확인하고 다운로드 받으세요. 최소 150년 정도 된 자료이나 소선지서 연구에 유용할 듯 싶네요.

 

 

The Book of the Twelve Minor Prophets :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Hebrew, with a commentary, critical, philological, and exegetical

(1845) https://archive.org/details/bookoftwelvemino1845hend
(1860) https://archive.org/details/bookoftwelvemino00hendrich
(1866) https://archive.org/details/bookoftwelvemino1866h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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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으로 신학석사 졸업논문을 진행하고 있는데, 요 몇 일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졸업논문이라고는 하지만 성경연구가 직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성경연구를 통해 깨달음과 교훈을 얻으면 감동하며 내 신앙에 적용해야 하는데, 감동은 받았으나 적용은 없고 풀어야할 실타래에 집중하고 서술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내가 성서학을 전공하고자 했을 때 특히 예레미야서를 원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삶이 나에게 주는 감동 때문이였을 터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철저히 순종하고 삶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심판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 예례미야.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일컬어진다.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예레미야를 본받고 싶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내 자신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성서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내 삶을 변화시키며 성도들을 양육할 도구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지금도 가지고 있고 성경 전체를 설교하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부끄럽다. 성서학에 대한 갈망대로 신학지식은 쌓여가고 성경연구기술은 체계적으로 훈련되고 있으나, 정작 내 삶은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듯 싶다. 아마도 나는 바리새인 보다 못한 처지인가 보다.

학부생 시절 교부신학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적이 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사막에서 수련에 전념했던 교부들은 자기를 부인하고자 몸부림쳤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건, 그리고 앞으로 치열하게 다투어야 할 다툼은 자기부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연구는 지식습득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연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는 자양분이다. 그런데 나는 졸업논문이라는 하나의 과정에 치우쳐 있다. 숲을 봐야하는데 나무를 보고 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자기부인'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주셨으니, 묵상과 기도로 자기부인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이 시간을 허투로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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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슥 13:5)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를 끊으시고 선지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2절), 예언은 사라지고(3절) 선지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4-6절).


요 몇 일 기독교선교단체의 공금횡령이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재빠른 사실관계 확인으로 소속단체와 당사자에 대한 정보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듯 싶은데, 한국을 대표한다는 대형교회에서 큰 사건들을 연이어 터뜨려주고 있어 착잡한데 선교단체까지 비리가 발생했다고 하니 꽤나 실망한 분위기이다.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하락하면서 개신교인들은 자신이 교회다닌다는 사실을 왠만하면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도 작용했을 터이다.


이런 이유에서인가 목회자들도 교인들과 무리지어 다닐 때 목사라는 칭호를 부담스러워 하곤 한다. 유난히 큰 목소리로 자주 불러서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지, 교회 내부의 주된 문제요인으로 지적 받는 탓인지 알 길이 없지만.


논문을 위해 이 구절을 주해하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선지자 대신에 목사라는 단어를 넣어 읽어도 적절한 적용이 되는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교회에서든 밖에서든 성도들은 개교회 소속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전도사라고만 해도 살갑게 대해준다. 목회자들이 감당해야 할 수고와 현실적 어려움을 공감해 주시기 때문인텐데,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야 할 시대가 다가온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존경받는 목회자는 못 되어도, 신분을 감추는 목회자는 안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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