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Frey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수난사화(Passion narrative)에서 예수는 공관복음과 달리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지적한다(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73-174).

이러한 관찰은 내 연구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에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τίθημι; lays down, vv. 11, 15, 17, 18).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빼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고 강조하신다 (18절).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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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하여, 내 생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다.

서론은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론은 책의 출발점을 제시하며, 전개 방향성을 압축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예수의 정체와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마주하신 동시대 유대인들의 믿음에 대해 알게 된다. 2장은 1장의 연장선이자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자리한다.

요한복음 1장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1-18 로고스 기독론
1:19-36 세례 요한의 선포와 세례 베품을 통해 예수의 정체가 밝혀지다
1:37-5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다

첫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1절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두번째 단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29절로, 예수의 궁극적인 사역을 밝히고 있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번째 단락에서는 48-50절에 등장하는 나다니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나다니엘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믿음을 유추할 수 있다. 나다니엘의 고백은 예수의 신적 능력에서 출발한다.

요한복음 2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12 가나 혼례
2:13-25 성전 청결 사건

가나 혼례 사건에서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4절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의 특별함이 그의 지혜인지, 아니면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예수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전제가 있다.

11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기적이다. 여기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하여 제자들의 남다른 믿음을 부각시키는 해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다는 분기점이다. 요한이 성전 청결 사건을 진술하는 방식에 유의하자.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한은 예수의 공식적인 사역, 그가 의도한 첫 사역을 유대인의 유월절과 연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앞서 가나 혼례 사건에서 언급한 "내 때"(4절)을 의미한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성전 청결을 행한 표적을 요구하는데, 이는 예수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이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빗대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신다. 예수의 사역은 십자가 상에서 당할 죽음과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 그 사건들이 발생한 이후에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않았고 누구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다.

이렇듯 요한복음 1장은 예수의 신적 기원과 지상 사역, 유대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이어서 2장은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의 믿음을 드러내고, 예수의 첫 공식 사역으로서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해 그의 구속사적 사건을 가르치며, 유대인들의 믿음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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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 M. Stovell는 요한복음 1:29-34와 10장을 "왕권"(kingship)으로 설명하면서도, 예수의 죽음이라는 요소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또한 절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추후 내 글에서 그녀의 책을 다루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언급한 책은 『Mapping Metaphorical Discourse in the Fourth Gosp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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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 구상을 정리하는 목적을 위해 작성되었으므로 자세한 인용은 생략한다.

요한복음에서 "헬레니즘과 유대주의"과 "반유대주의와 유대주의"는 주요 논쟁에 속한다. 

1. 헬레니즘 논쟁
요한복음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로고스, 이원론(생명과 죽음, 어둠과 빛 등), 시간 등이 있다.

하지만 로고스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그 기원으로 설정할 수 있고, 지혜문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원론은 지혜 문헌이나 기타 유대 문헌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고, 이러한 대조는 인류 보편적 사고이므로 헬레니즘에 종속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다는 주장은 요한이 강조하는 "Jesus' hour"로 반박이 된다. 대표적인 예는, 가나 혼례식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이후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는데 주저하지 않으신다. 또 다른 예로는,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살해 시도에는 물러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음의 시기를 조절하셨다. 내 기준에서는 절기가 요한복음의 유대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2. 반유대주의 논쟁
요한복음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모세의 율법과 대립되는 양상, 회당 축출(9:22) 등으로 인해 고립된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을 상정한다. 

하지만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자신의 가르침이 어긋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대표적으로 5:45-46이 그 근거가 된다.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회당 축출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예수의 사후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이 30년 정도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한 상황에서, 회당이 큰 의미를 가질지 의문이다.


3. 요한의 유대주의적 사고
요한복음이 유대주의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단서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다만 유대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변형적으로 사용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한다는 특수성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유대 절기를 예로 다루어본다.

내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이라고 풀어 쓰는 Davidic Messianism은 분열 왕국의 멸망 이후 예수의 지상 생애 당시까지 이어졌다. 요한복음에는 10:1-21과 12:12-16에서 그 사상이 나타난다.

10:1-21은 흔히 '선한 목자 담론'로 불리며, '새로운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을 고대하는 목자-왕 전승을 사용했다. 다만 요한은 이 전통적인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울 왕이 등장한다고 기술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토대로 목자의 희생을 설파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12:12-16도 동시대 유대인들이 Davidic Messianism를 갈망했다는 단서가 된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중에, 아니면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열국을 제압하고 왕으로 추대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믿었다(12-15절).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었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이 예언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16절).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갈망했던 Davidic Messianism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절기는 또다른 유대주의의 증거이다. 요한의 예수는 절기에 맞추어 움직이신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들로부터 반박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확고한 두 기둥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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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장에 예수의 첫 표적으로 기록된 가나의 혼례를 유대 메시아 사상에 입각하여 '종말론적 신랑되시는 예수'를 주장하는 해석자들이 있다. 예수는 혼례의 주인공인 신랑이 아니라 참석자이므로, '종말론적 신랑'이라는 주장은 해석자의 신학적 틀을 과도하게 주입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본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예수의 첫 표적이 갖는 의미에 달려 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와 동행했던 제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본문의 흐름을 따르면, 혼례 이전까지 5명의 제자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1:37). 이 둘 중 하나는 안드레로 밝혀지며,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가 추가된다(1:40-42). 후에 빌립과 나다나엘이 더해진다(1:43-51). 여기까지 최소 5명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표적으로 인해 그를 믿었다. 즉 이들은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
 
또한, 이 무대에서 잊혀질 수 있는 예수의 어머니를 기억해야 한다(2:1-5).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잉태를 다루지 않았다. 전문 용어로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어머니를 부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구절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를 특별한 존재로 믿고 있었다는 단서로 작용한다.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를 어떤 존재로 믿었는지 명백히 밝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예수가 떨어진 포도주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예수를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유대 메시아 사상을 전복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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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이원론을 비롯한 대립적 개념의 사용이다. 하지만 이같은 용례는 요한이 후대에 '복음서'(gospel)라는 장르(genre)로 분류되는 자신의 증언을 위한 기법 중 하나일 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유대기독교인들의 현실 혹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매우 암울하다. 대표적으로 성전파괴(2장), 회당축출(9장), 순교(21장)는 예수의 제자들과 따름이들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빛과 어둠, 죽음과 영생 등과 같은 대조 기법은 현실의 암울한 상황을 이기게 해주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요한복음이 복음서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동시에 묵시적 성격이 매우 강한 본문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로마황제숭배까지 더해지면 요한계시록과 같이 묵시의 절정에 이르지 않았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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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제안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말과 관련된 유대 전승뿐만 아니라 상호 사랑과 타인에 대한 희생이라는 배경은 다른 언사들에서 영감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쓸데없는 일로 만든다.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53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에 대한 해설.
 
10장 선한 목자 담론에서 목자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은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 없는 사례로 남는다. 또한 21장 베드로에 대한 명령에 목자 비유를 사용하셨고, 그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두 본문 모두 목자 비유는 사용하여 죽음을 암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게다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친구로 재설정하여, 목자의 죽음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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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차후 연구를 위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다. 그래서 사례나 근거 제시는 빈약하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21:20)이다. 그는 베드로의 죽음(21:19) 이후에도 살아 남았으며, 예수의 관한 증언을 위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21:24-25). 

요한복음, 생존자의 증언


저자는 예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으며(특히, 19:26-30), 베드로와 함께 빈 무덤의 현장에 있었다(특히, 20:2-10). 또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특히, 21:7, 20).

요한의 증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목격한 자신의 체험이자, 예수의 가르침이 실현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상반되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대조 기법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무리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예수의 구속사 사역)이 곳곳에 전파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 사건을 부정하는 무리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유대인의 불신앙은 그들의 견고한 믿음과 사상에 기인한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했으나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우셨다. 요한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자신의 증언 사이에 간격을 줄어야 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가장 강력한 위험으로 작용했다고 짐작된다. 요한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성전 재건축과 맞물려 등장한 유대주의(Judaism), 그리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즉 요한은 성전 파괴를 율법 준수와 결부시키려는 움직임과 다윗과 같은 메시아의 등장을 고대하는 메시아 사상의 고조를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모세에 관한 언급은 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기능을 하며, 다윗에 관한 언급을 자제하여 메시아 사상의 부상을 누그러뜨린다.

예수의 증언자, 모세

유대인의 믿음과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

요한복음에 나타난 모세 기독론과 다윗 기독론


여기에 절기는 예루살렘 성전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요한은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치환하며(2장), 절기를 통해 예수의 사역과 연결하여 유대주의를 끊어내는 동시에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성취로 결론내린다.

목자-양 은유와 수전절


요한은 더이상 유대주의와 전통적인 메시아 사상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구속사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 사고를 예수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에 비해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이 영적인 복음서이기 때문이 아니다. 요한이 마주한 현실의 난관을 뚫고 헤쳐나가야 하는 증언자의 책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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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주제(=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의 영향 탓인지, 요한복음을 분석할 수록 이 복음서가 구전되고 기록되었을 당시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고 그려진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과 '하나님의 아들'(1:34)이라는 모순적 표현이 중첩된다. 특히 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라는 문구를 통해 예수의 죽음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문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로 본다. 성전 중심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파괴는 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도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유대인들은 오랫 동안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는 헤스모니아 왕조 이후 메시아 사상이 고취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르쳤고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메시아 사상의 정점에 닿아 있는 다윗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자극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나는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이 그 정점에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17)고 명령하신 부분이 인상 깊게 남는다. 또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살아남는다. 그는 사도들의 순교에도 살아남아서 요한복음서를 기록한다(21:24-25).

예수의 부활을 붙들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쩌면 예수의 생애를 공유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좌절감에 빠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총체적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설득해야했다. 요한복음 1장이 로고스 기독론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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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차후 요한공동체에 닥쳐올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수난을 암시할 수 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죽음을 진술하고 있다.

두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 좁게는 요한복음의 청중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난을 담은 본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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