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대다수의 견해와 달리, 나는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의 어머니와 제자들이 갖고 있던 전형적인 유대 메시아 사상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하라.

가나의 혼례가 갖는 의미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믿음과 예수의 사역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 또 등장한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이다.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칭하는데, 그 이유를 본인이 직접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다시 말해, 유대 메시아 사상을 걷어내지 않으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2:11)과 나다니엘이 예수를 선생으로 보는 이유(3:2) 모두 이적을 행하는 메시아라는 관념에 기인한다. '어머니'라는 관계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리아의 요청에 대한 직각적인 대답에 예수의 태도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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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을 후대 편집으로 간주하고, 1~20장이 원 요한복음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대표적으로 Jörg Frey). 이러한 전제대로 요한복음이 20장으로 충분한 이유와 21장이 추가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유추해볼 수 있다.

예수의 수난 기사에 집중하는 전개와 그의 승천 기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특이점  등을 고려하면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제자 도마의 사건(20장)을 끝으로 요한복음이 구성되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21장은 베드로의 순교와 요한의 생존에 관한 질문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이 기록을 통해 21장이 베드로의 순교(AD 66)와 요한의 죽음(AD 100) 사이에 추가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두 사도의 죽음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가 이스라엘 거주민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테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주는 충격은 지대했겠지만,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을 통한 죽음과 부활에 관한 가르침(2장)을 통해 물리적인 성전 파괴에 대한 충격은 상쇄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절기를 강조하는 목적, 그리고 성찬식(6:53-55)을 암시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건(6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은은하게 드러낸다.

여기에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19절)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특히 2장)에 관한 암시, 요한의 미래에 대한 질문(23절) 등은 당시 요한 공동체 내부에 모종의 위기의식에 기반한 임박한 종말론이 항유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의 해답은 '제자도'이다. 죽음이나 생존과 상관없이 공동체 일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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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은 세례 요한의 발화를 통해 처음 예고된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문구는 속죄와 관련해 이사야 53장의 "야웨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하는 해석이 대세를 이룬다. 53장에서 속죄의 역할과 "어린 양"이란 문구는 이러한 해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3: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더구나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구절에 의해 해석자들은 이런 경향을 강화한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사야 53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러한 유사성은 예수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사이의 연결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현재 이사야 53장에 언급되는 야웨의 종을 메시아와 연결 짓지 않으며, 속죄는 이사야가 덧붙인 개념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종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사야조차도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는 종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깨닫고 난 후 유대인들의 '고난'이라는 관념을 뒤집는다. 1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 그의 의지가 군중들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통해 나타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구절에서 중요한 관점은 '예외성'이다.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메시아사상의 스펙트럼이 넓었다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다수가 신봉했던 사상(들)과 결을 달리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여기서 큰 무리가 모인 이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은 다윗과 같은/다윗 계열의 왕(Davidic King)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다른 행보를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예외성'을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했던 무리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의 제자들만이 예수의 부활 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한복음 12장 38절에 예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하신 이유는 '예외성'이라는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과 자신의 사역을 일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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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원론을 헬레니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금도 이원론 이외에 몇 가지 요소들을 근거로 요한복음의 배경이 헬레니즘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문학비평이 성서학에 도입되면서 문학 기법 중 ‘역설’(irony)로 요한복음을 해석한 연구들이 제법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의 십자가와 영광이란 주제이다.

요한복음의 대조 기법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는 이원론과 역설은 모두 예수의 구속사와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은 먼저 영생을 강조하고, 이어 심판을 말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하며 심판은 불신의 결과이다. 요한에게 불신(=죄)의 대가는 심판이며, 믿음의 대가는 영생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구속사에 기인한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대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셨고, 요한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예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의 이원론과 역설은 요한의 시대적 배경이나 문학적 기교를 넘어서 예수의 구속사, 즉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이원론과 역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기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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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요한복음이 예수의 승천 기사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예수의 죽음이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로서 승천 기사를 기록해야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으로서 깔끔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지상적 실체이고(1:1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조만간 떠난다고 예고하신다(16장).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 복귀를 말씀하시기 전에 보혜사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14:16ff). 또한 "보냄"에 대해서도 자주 말씀하신다(12:25ff).

예수의 부활 이후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빈 무덤 방문(20:1-18), 도마 사건(vv.24-29), 베드로를 향한 명령(21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와 도마를 통해 부활의 역사성을 설파하고, 베드로를 향한 질문과 명령에서는 제자도를 재차 강조하신다.

저자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을 공유한 집단이 성령강림 이후(post-Easter period) 형성된 공동체라는 증거가 곳곳에 배어 있다. 요한이 자신의 증언과 공동체의 현실 사이에 간극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현 단계에서는 추정에 그치는데,
첫 번째, 공동체가 현재 상황을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다면, 요한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요한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요한이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부터 현재 직면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요한이 공동체의 우선순위에 집중해 자신의 복음서를 설파했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가르침은 제자도와 선교에 있다. 요한 공동체는 성찬을 비롯해 초대 교회에서 발견되는 예전을 향유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강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죄와 심판, 그와 반대되는 영생에 대해 자주 가르침을 주셨는데,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공동체에 요구되는 믿음은 제자도이며, 그 제자도는 선교라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이 베드로를 향한 세 번의 질문과 명령은 이를 확증한다(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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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읽고 있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소논문에서 17:18-19를 10:36과 연결해서 관찰하는 부분이 있다.

17:18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저자는 "보냄"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예수의 죽음을 조망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여겨진다. 글 자체에서 저자는 "hour"라는 열쇠로 해설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여기에 "관계"라는 주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예수와 제자"라는 두 관계를 바탕으로 설명해야 두 구절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생긴다.

나는 10장에 나타난 "목자 은유"와 "제자도"가 21장에도 나타난다고 보는데, 여기에서도 "보냄"이라는 주제가 나타난다.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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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örg Frey는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에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은 수동적인 순종이 아니라 능동적인 선택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요한의 십자가 신학이 바울과 루터처럼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고난과 영광이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수난의 복음(a Gospel of the Passion)이라고 할 만하다고 진술한다. 또한 그는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 아래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예수의 승천에 관한 의문이 해결된다. 왜 요한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천상적 기원과 복귀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16:28).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의 승천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앞서 "요한복음 1장과 21장: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라는 글에서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적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같은 관찰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Frey의 주장대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공존한다면, 우리가 흔히 예수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면인 승천 기사를 다룰 이유가 사라진다.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충분하다.

요한복음에는 승천 기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를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Frey의 주장대로,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그 해석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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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바울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봐야 한다. Jörg Frey의 요한과 바울의 십자가 신학에 관한 비교는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236-23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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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30f는 저자가 자율적으로 자료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선택하고 통합했다는 증거이다. 
(2) 'relecture'의 개념은, 후대 편집자들을 고려하더라도, 네 번째 복음서 저자의 생각을 지속하는 데 목적이 있다.
(3) 편집의 흔적은 꽤나 분명하지만, 그보다 신학적 이유가 결정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요한복음 1:1-20:31이 문예적 일치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83-8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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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y는 마틴 루터와 바울의 용어,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요한복음을 오독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Die ,,theologia crucifixi" des Johannesevangeliums, 177-178).

Käsemann는 참된 theologia crucis의 의미를 위해하기 위해서는, 바울과 루터에게 나타나는 λόγος τοῦ σταυροῦ (십자가의 도, 고전 1:18)에 대한 논쟁적인 성격을 필수적으로 인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78-179). 하지만, Käsemann은 요한복음에서 어느 누구도 더이상 십자가의 신학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179-180). 이에 대해 Frey는 요한 신학이 바울의 기준에 의해 넓게 재고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요한 신학은 바울신학 (그것의 루터적인 해석)을 넘어서 요한복음에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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