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요한복음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께서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으나, 청중들은 도무지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도리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이적을 베푸는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커져만 간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구절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된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메시아(Davidic Messianism)로 간주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사건을 해석하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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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학 전공자들은 "신약의 구약 사용" 혹은 "상호본문성"으로 일컬어지는 방법론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신약 전공자들은 고대 근동부터 구약을 거쳐 제2 성전기 문헌을 기본으로 다뤄야 하고, 때로는 다른 신약 본문을 다뤄야 한다.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에스겔을 많이 인용했다고 주장한다. 비슬리-머리는 그 중 하나이다.

복음서 기자는 에스겔의 사역을 특징지었던 예언자적인 통찰력이 그 계시자에게 특별히 존재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1:48; 2:23; 11:14; 13:38을 참조).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210.

나는 개인적으로 요한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본문은 스가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재학 시절 요한복음에 관한 두 가지 페이퍼를 제출했다. 하나는 게리 버지(Gary M. Burge) 교수의 "The Gospel of John"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Reading John 7:37–39 in light of Zechariah 14”이란 페이퍼이다. 다른 하나는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라는 페이퍼로, 버지 교수의 지도로 진행된 Independent Study이다. 내가 관찰한 본문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주류인데, 나는 스가랴의 영향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버지 교수는 본인이 에스겔의 영향을 지지하는 주류에 속하면서도 나에게 모두 "A"를 주었다. 다만 "에스겔 혹은 스가랴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 없이, 요한은 에스겔과 스가랴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고 주장해도 충분하다"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아직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는 박사 과정 학생으로서 요한복음은 예언자 스가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더구나 스가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언자가 에스겔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에스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주장한 들 틀린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 역시 에스겔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어서 아직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요한복음의 저자가 스가랴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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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도 요한복음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주제들이 모두 '죽음'과 연결이 되고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목자의 죽음을 말하는 특이성(10장)이 그러하고, 성전 청결 사건과 죽음을 연결하는 흐름(2장)이 그러하다.
 
요한복음은 주제적으로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분석하면서 특이점을 계속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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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설명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언급이 없다. 내 추정에는, 예수의 속죄 사역은 대속죄일 날 행해지는 대제세장과 아사셀 중 그 어디와도 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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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를 '로고스'에 초점을 맞춰 헬레니즘 문화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난 성육신을 강조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1장을 보면, 예수의 승천 기사가 없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은 시몬 베드로에게 목양(=전도와 양육)을 명령하시고,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즉, 요한복음 처음과 끝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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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사(sacrifice)의 궁극적인 기능은 현존(God's presence)이라고 생각한다. 지도교수의 Jewish Sacrifice에 관한 글을 읽어보니, 내 생각과 동일한 지향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과 성전(Temple) 역시 동일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요한복음은 제사와 초막절, 그리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성육신으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 주장은 요한복음의 저술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라는 가정과 맞닿아 있다.
 
큰 틀은 이러한데 세부사항을 채우는 것이 내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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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은 예수의 정체성과 사역을 설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독특한 어휘를 사용해 예수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은 "예수는 메시야시다"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3-4장은 유대인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5장은 갈등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행한 이적이 그를 적대하는 무리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5:16)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감하게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7)


예수님의 반응은 유대인에게 극단의 적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5:18)


분명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행위가 모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너희를 하나님께 고발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선포는 요한복음의 전개, 그리고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적대감만큼이나 극적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진정한 모세의 후계자라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요한은 유대인들이 직면한 믿음의 장벽을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와 오늘날 신앙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 생존 당시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더구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경험하기 전이다. 

청중/독자는 이러한 전개에 당황할 수 있으나, 이러한 반전은 필연적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9)


예수와 유대인의 갈등은 예수의 고난을 위한 필연적인 장치이다. 유대인의 적대감은 예수의 죽음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선행 과정이므로, 요한은 갈등을 자신의 고유한 수사적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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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자의 고뇌는 유대주의의 연속성과 성전의 비연속성을 극복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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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에 모세 전승이 나온다는 견해는 검증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반면 1장에 다윗 기독론이 묘사되어 있다는 주장은 세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1장에서 모세 전승과 다윗 전승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흥미롭다. 지금은 차후 연구를 위해 관련 글을 남겨 두는 선에서 만족해야겠다.

요한복음 1장과 모세 기독론
요한복음 1장과 다윗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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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를 모세의 시내산 사건과 연결 짓는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Craig S. Keener는 요한이 "현현의 언어"(the language of theophany)를 사용했다고 서술한다(17쪽). 그는 요한이 모세가 경험한 시내산 현현 사건과 예수의 성육신을 평행 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도록 의도한다고 진술한다(20쪽, 자세한 내용은 23―25쪽을 보라). 이러한 의도는 요한이 예수를 모세를 능가하는 분으로 묘사하려는 데 있다(21―25쪽).

 

더 자세한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라 적절한 시기에 다루려고 한다.

 

참고 자료

Keener, Craig S. "We Behold His Glory!" (John 1:14). In John, Jesus, and History, Vol. 2: Aspects of Historicity in the Fourth Gospel. Paul N. Anderson, Felix Just, S.J., and Tom Thatcher eds. (Atlanta, G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9),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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