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나중에 성경에서 'ring'이 사용된 사례가 있는지 확인해 야겠으나, 우선은 'rod'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왕의 덕목 중 하나는 '정의'이다. 왕은 자국 백성을 정의롭게 다스려서 불의와 부정이 사라지고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왕은 자신의 통치 권한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정의'를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의 규는 그의 권한을 상징한다. 왕은 정의로운 통치자이며 정의의 수호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문화를 가져와서, 독자적인 전통을 구축했을 텐데, 그중 하나가 왕의 규에 나타난다. 아마도 구약 성경에서 왕의 규 이외에 원을 언급한 사례가 있을지 궁금하다.

The Mesopotamian ‘Rod and Ring’: Icon of Righteous Kingship and Balance of Power between Palace and Temple
https://academic.oup.com/british-academy-scholarship-online/book/21550/chapter/181390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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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 중 하나가 왕과 목자에게 적용되는 어휘군 분류이다. 고대 근동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과 목자를 동일시했어도, 이러한 용례를 목자-왕 전승으로 칭하더라도, 실제 어휘 사용에서 구분할 수 있는 사례가 많다. 오늘 살펴볼 규/[쇠]막대/철봉은 왕과 목자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어휘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대상이 왕인지 목자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의 시편 영문판에서 'rod'는 두 번(17:24; 18:7) 사용되었다.

17:24 an iron rod
18:7 the rod of discipline of the Lord’ anointed

이 용례를 목자 은유로 해석한 사례가 있으나, 나는 문자 그대로 왕의 '규'로 간주한다. 솔로몬의 시편에서는 왕권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직역과 은유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만, 대부분 직역으로 해석해야 하는 본문이다. 내가 볼 때 목자 은유가 나타난 구절은 단 한 곳(17:40) 뿐이다.

17:40 He shall be strong in his works and mighty in fear of God, shepherding the flock of the Lord faithfully and righteously, and he shall not let any among them become weak in their pasture.

이 문장에서 세 단어 'shepherding', 'the flock of the Lord', 'their pasture'가 목자 은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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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대로, 구약성경에서 '비'는 왕권 사상, 특히 야웨 신앙과 관련이 있다. 제2 성전기 문헌 중 하나인 솔로몬의 시편(The Psalms of Solomon)에도 이 같은 사상이 나타난다.

17:18 They were scattered over the whole earth by lawless men, for heaven withheld the rain from falling on the earth.
17:19 Everlasting springs out of abysses were held back from high mountains, for there was none among them who did righteousness and justice.

17:18 하늘이 땅에 내리는 비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법자들에 의해 온 땅에 흩어졌습니다.
17:19 심연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샘물이 높은 산에서 막혀 있었으니, 그중에는 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 번역은 DeepL Translate를 이용한 결과이다.

두 구절은 '비'와 '영원한 샘물'이 부재한 이유를 악인에게 돌리고 있다. 반대로 의와 정의를 행한다면 비와 영원한 샘물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게 된다.

시편 기자는 의와 정의가 다윗과 같은 왕이 등장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17:40 He shall be strong in his works and mighty in fear of God, shepherding the flock of the Lord faithfully and righteously, and he shall not let any among them become weak in their pasture.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목자-양 비유의 결합은 다윗 왕권 사상(Davidic Kingship)에서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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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예레미야서는 시대 상황을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한 역사서의 면모를 갖춘 예언서이다. 또한 은유(metaphor)와 같은 언어적 기법을 꽤 많이 사용한 예언서이다. 내 관심사인 목자-양 비유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예레미야의 은유 분석에 관한 책은 Benjamin A. Foreman, Animal Metaphor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e Book of Jeremiah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이 있다. 비록 내 관심사에 한정해서 Chapter 2: Pastoral Metaphors를 중점적으로 읽고 있으나 이만한 자료는 없다고 여겨진다.

내 판단에 의하면, 그의 책은 최소한 두 가지 제약이 있다. 하나는 목자-양 비유, 그의 언어로는 Pastoral Metaphors의 범위이다. 그가 연구한 범위는 6구절(3:15; 10:21; 23:1-4; 31:10; 50:6-8; 50:17-19)이다. 나는 최소 15구절을 범위로 설정한다. 다른 하나는, Foreman은 제목에 반영되어 있듯이 은유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하지만, 나는 은유를 넘어 문맥 내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Foreman은 구절마다 은유의 진위를 가리고 주변 구절과 인과 관계가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에 열중한다. 이러한 작업은 의미가 있다. 아래 인용은 그 예시이다.

The metaphor, which begins in the first line of verse 17, is comprised of two images: a sheep and several lions. … In verse 18 the leaders of Babylon and Assyria are no longer lions, but regular kings. … The imagery of verse 17, therefore, is not carried over into verse 18 since there are no terms relating to the semantic fields “shepherding” or “lions” in that verse.
- Foreman, Animal Metaphors and the People of Israel in the Book of Jeremiah, 82.

이러한 연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내가 Foreman의 분석에 빚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인 '목자-양 유비'의 어휘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어서, '사자'라는 단어도 때에 따라 유비의 범위에 포함할 수 있다거나, 목자와 왕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내 기준에 언어학적 연구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저자가 인유를 사용하는 목적과 방식을 미세하게 놓치게 된다. Foreman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의 한계가 느껴지는데, 아직 한창 예레미야서의 목자-양 비유를 분석 중이라, 그 한계는 나중에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오늘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남기는 선에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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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약 17번 정도 사용하였는데, 이 빈도는 성경에서 가장 많은 활용이고, 그 용례는 다양하게 적용된다.

예레미야는 '목자'라는 칭호를 이스라엘 왕 혹은 지도자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도 사용한다. 목자의 '선함'과 '악함'은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심판이란 주제도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예레미야는 목자-양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지만, 바벨론을 향해서는 철저한 심판을 선포한다. 대표적으로 23:1-8은 전자에 속하고, 50장은 후자에 속한다. 흥미롭게도 목자-양 비유의 빈도는 후자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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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Verses 1–8 are a microcosm of chapters 41—48, with their use of the image of the highway and new exodus; whereas vv. 9–11 correspond to chapters 49:14ff., with the themes of the return of Yahweh as ruler in Zion, the voice of the messengers, and the victory of Yahweh’s arm.
- Childs, Isaiah, 302.

"아름다운 소식"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40:9-11은 이사야의 이스라엘 회복 선포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를 양 떼를 돌보는 목자로 비유한다. 또한 목자의 보호는 49:14 이후에서 야웨의 귀환으로 선포된다.

이 같은 구조는 스가랴 9-14에도 나타난다. 9-13장이 악한 목자를 향한 심판과 선한 목자의 등장을 그린다면, 14장은 야웨께서 천하의 왕으로 등극한다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자와 왕 심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동안 향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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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실 최근 문헌 조사(a literature review)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아들됨'(sonship)은 박사 학위 논문 이후 진행할 연구 주제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문헌 조사 이후 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의 흐름이 이 주제를 꼭 다뤄야 한다는 판단이 서서 방향을 틀었다.

고대 문명에서 집단 지도자나 왕을 신의 아들로 칭했듯이, 아들됨은 신적 정체성(a divine identity)과 신성왕권(divine kingship)에 관한 개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됨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규정하며, 그에 따른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왕권을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한 권위도 예수의 아들됨에서 기인한다.

현재 목자-왕 유비를 다루면서 틈틈이 '아들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더 조사를 해봐야겠으나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에 관한 자료 위주로 보인다. 만약 적합한 선행 연구를 찾지 못하면, 일일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거나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게 된다. 내 박사 학위 논문을 내년에 제출할 수 있느냐는 여기에 승패가 달려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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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선한 목자 담론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선행 작업으로 왕권 사상을 다뤄야 한다. 내 관찰에 의하면, 선한 목자 담론에서 초막절, 목자-양 비유, 아들됨(sonship)이 모두 왕권 사상과 관련이 있다. 즉,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왕권을 주장한다. 다만 요한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내어놓음, lay down)으로 예수의 왕되심을 선호한다는 역설이 있다.

초막절은 일 년의 수확을 여호와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풍성한 수확을 가능케 하신 비의 주관자 여호와를 찬양하는 시기가 바로 초막절이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우상숭배, 특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고발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숭배가 바로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목자-양 비유는 전통적으로 왕권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목자는 신의 대리인으로 왕을 상징한다. 목자-양 비유에서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kingship/Messianism)이다. 예언서에 나타난 미래에 나타날 이스라엘의 왕을 다윗과 같은 왕 혹은 다윗의 후손으로 해석하지만, 요한복음에 이 사상을 신봉하는 무리가 등장하지만, 다윗처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등장하지만, 그의 출신 배경이 다윗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여호와를 궁극적인 왕으로 선포하는 선지자들이 적지 않다. 요한복음에서는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을 넘어서는 구원자 예수의 등장을 선포한다.

요한은 이 두 주제를 자신만의 신학으로 재정립하는데, 아들됨은 더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요한의 아들됨은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그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권한을 동시에 드러내는 수단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스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야웨 신앙에 관해서는 고대 유대 유일신론(ancient Jewish monotheism)을 염두에 둬야 하고,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는 삼위일체론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앞 세 주제를 다루는 작업이 쉽지 않아서, 뒤 두 주제는 차후 연구 주제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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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부터 고대 이스라엘에서 목자-양 유비의 용례가 대체로 왕권 사상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실제로 이 같은 용어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학술적 용어로 목자-왕 전승이라 칭해도 문제 될 게 없다.

목자-양 유비의 어휘군 중 '생수'(근접한 어휘로는 '물'과 관련된 단어들이 있고, 범위를 넓히면 '비'와 같은 어휘도 포함)에 관해서는 독특한 용례가 발견되어 유의가 필요하다. 목자는 그 자체로 왕(혹은 지도자)을 상징한다. 생수는 목자 혹은 양과 관련되어 사용되는데, 이와 달리 직접적으로 왕과 연결되는 용례가 있다. 우리는 이 용례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내가 웨신 신학 석사 졸업 논문에서 스가랴서 14장에 나타난 '생수'(8절)와 '왕'(9절)을 목자-왕 전승으로 해석했다. 스가랴 9-13장에서 목자가 주요 어휘였다면, 14장에서는 왕의 등극을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목자는 왕권을 상징하는 어휘이므로, 목자와 왕 사이에 언어적 치환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따라서 내 주장은 문제 소지가 없다. (그러니 논문 심사를 통과했겠지)

내가 최근 고민하는 지점은 목자-왕 전승과 별개로 '생수'를 왕권과 연결 짓는 용례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그러하다. 큰 그림에서는 목자-생수-왕을 서로 연결하여 해석되지만, 지엽적으로 왕권, 더 정확히는 야웨 신앙과 밀착한 사례를 설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는 왕권(kingship)과 신앙(divine kingship)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작업이다.

한 발 더 나가면 초막절도 연결되는 사안이라 이 고민을 지혜롭게 해결해야 한다. 목자, 생수, 초막절은 왕권이라는 거대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목자와 생수를 왕권과 연결 짓거나, 생수와 초막절을 왕권과 연결 짓는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요한은 초막절(7-10장)을 배경으로 생수(7장)와 목자(10장)를 연결해서 예수의 왕권을 주장한다. 이런 요한의 신학을 자세히 풀어내려면, 지금은 목자, 생수, 왕권을 한 편의 글에 잘 녹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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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4:28; 45:1)와 예레미야(25:9; 43:10)와 달리 에스겔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내 목자’나 ‘내 종’이란 칭호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저 ‘바벨론 왕’ 혹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부른다 (21:21; 26:7; 29:18, 19; 30:10, 24, 25; 32:11).

에스겔은 앞서 거짓된 점괘와 허탄한 묵시에 관한 비판하였다(13:6-10). 따라서 바벨론 왕이 희생제물의 간으로 우상에게 점괘를 얻는 행위 (21:21-25)는 그에게 용납될 수 없다. 에스겔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어떤 찬사도 돌리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할례에 대한 관심(32:18–32)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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