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미 사사기 21장 19절의 축제와 사무엘상 1장의 매년제는 서로 다른 행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앞 구절은 초막절이 확실하고, 뒤 구절은 절기로 특정할 수 없으나 확실히 초막절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사사기 21장 19절과 사무엘상 1장에 나타난 초막절"과 "희년서와 사무엘상에 나타난 초막절, 그리고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에서 사무엘상 1장이 초막절을 배경으로 한다는 부분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만 이전 글 이후 갱신이 되지 않았고, 마침 발표를 위해 소논문 형식으로 재작성을 하고 있어서 최근 조사를 반영하고자 한다.

두 본문에 나타난 행사의 정체를 다루기 전에, 내 전제 사항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1. 저자/편집자는 절기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2. 군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사사기 21장 19절은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라고 진술되어 있다. 사무엘상 1장은 3절에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라고 기록되어 있고, 21절에 이 제사를 "매년제"라고 부른다. 두 행사는 실로에서 드려졌으며, 매년 시행되는 행사이지만, 그 행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실로에서 매년 시행되는 행사이지만, 그 행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청중 혹은 독자가 잘 알고 있어서 적시할 필요가 없거나, 저자 혹은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회피했을 가능성이다.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사사기 21장은 회중의 장로들이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실로의 여자들을 납치하는 기록이다. 베냐민 지파의 멸절을 막기 위해 실로 지역의 여자를 없애는 역설이 이 단락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사사기 전체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절)이라는 말과 함께 마무리된다. 본문의 관심사는 실로의 여자 납치이며, 회중의 장로들이 제시한 대책이 시행으로 옮겨지는 시기가 바로 "실로에서 매년 시행되었던 여호와의 명절"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문이 굳이 명절을 명시할 필요는 없어진다.

사무엘상 1장은 시대 상황에 대한 언급 없이 엘가나의 종교적 신실함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엘가나의 열심으로 인해 그를 비롯한 그의 온 가족이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게 된다 (21절). 엘가나의 열심과 한나의 서원은 엘리의 아들들의 행실(특히, 2장)과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를 위해 저자 혹은 편집자는 특정 절기를 명시하지 않고, "매년제"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매년제는 초막절의 성격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두 본문의 저자/편집자는 절기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사사기 21장 25절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진술로 사사기 전체의 막을 닫았다면, 사사기 1장은 사무엘의 탄생 배경, 즉 엘가나의 열심과 한나의 서원이 전술된다. 사무엘은 사사-예언자의 전형으로 사사 시대를 마무리하는 인물이자 군주제의 시작을 여는 인물이다. 사무엘은 사울 왕조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다윗 왕조의 시작에 동참한다. 사사기와 사무엘상은 "왕"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두 본몬은 군주제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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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초막절 단락(7:1-10:21)의 기능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이 글의 내용은 대체로 내 분석에 근거하며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학위 논문에 포함될 예정이다. 

초막절 단락이 시작하기 앞서 저자는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을 다룬다 (6:66-71). 이 단락에서 저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한다 (vv.70-71). 이어 예수의 활동 무대는 갈릴리로 옮기시고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이 명시된다 (7:1).

본격적으로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이 언급되고 (v.2), 명절의 중간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기 시작한다 (v. 14). 여기서 초막절과 성전이 연결된다.

7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성령에 관한 가르침이다 (v. 37-39). 나는 이 단락의 기원을 스가랴 14장과 연결한다. 선행 연구에서는 초막절의 헌수 의식(water libation ceremony)에 초점을 맞추지만, 초막절의 기원은 출애굽의 구원이며, 점차 농사를 위한 비와 관련지어져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감사하는 절기로 정착된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v.37),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v. 38)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 이러한 초막절의 배경을 근거로 한다.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은 예수께서 생수의 강을 성령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v. 39).

이어 그리스도 논쟁 (7:41-42)을 위치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요한은 초막절 단락에서 그리스도/다윗 기독론의 절정을 의도하고 있다.

8장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33-59). 예수의 정체는 아브라함을 능가한다.

9장의 핵심은 모세의 제자와 펼쳐지는 논쟁이다 (특히, vv.28-41). 예수의 정체는 모세를 능가한다.

10장의 핵심은 선한 목자로서 예수께서 목자-양 유비를 사용해 자기 죽음과 부활을 가장 극명하게 가르치는 장면이다 (vv.1-18).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v.18). 선한 목자 담론은 예수의 구속 사역과 그의 권위를 통해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목자-양 유비는 왕권 사상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스가랴 14장에서 여호와의 날 이후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고 이방 나라에 초막절을 명령하시는데, 이 명령은 열방 국가의 통치자에 대한 순종, 여호와의 열방 통치를 상징한다. 요한이 선한 목자 담론을 통해 예수의 사역과 권위를 드러냈기 때문에, 이 담론의 배경인 초막절을 고려해 스가랴 14장을 적용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요한복음은 초막절 단락에서 예수의 왕권을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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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1권과 4권, 이렇게 단 두 곳에서 나타난다.

1권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위해 "양과 목자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에게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양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이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기술과 보수 사이의 상관관계를 통해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이유는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며 양을 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기서 목자-양의 관계가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4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목자를 언급하지만, 이곳에서는 목자-양 유비가 아니라 목자와 개의 관계를 사용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불의한 일에 대해 목자가 개를 부르는 것은 이성적 추론을 통한 통치를 의미하며, 개가 목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국가의 보조자들이 통치자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목자와 개는 통치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는, 목자와 개의 관계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변형이 있으나, 통치자와 피통치자에게 적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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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제일 관심은 국가 운영으로 보인다. 

『미노스』는 그리스에 영향을 미친 고대법(the ancient law)을 통해 전설의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를 등장시킨다. 소크라테스는 미노스를 이상적인 왕으로 칭하며,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찬가를 그 근거로 내세운다. 소크라테스가 미노스를 칭송하는 이유는 크레타 백성은 법을 준수하는 모범으로 알려졌으며, 법의 준수가 가능한 원동력은 고대 법이었고, 그 법을 통치 수단으로 입법화한 인물은 미노스였다. 다만 이 책은 영혼을 위한 배분으로써 법의 실재를 다루려는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끝맺음을 낸다. 내 짐작에 이런 결말은 저작 당시에 미완성된 저자의 사상에서 비롯되었거나, 자신의 다른 저작 『법률』에서 강화하려는 의도이거나, 한때 제기된 위작론을 고려하여 위작의 한계로 인해 플라톤의 경험과 사상을 오롯이 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화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소크라테스의 대담자들은 저마다의 정의에 관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각자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정리한다. 그에게 정의는 국가와 개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본서에서 통치자로 철학자를 지명한다.

『정치가』는 국가 운영의 실체로서 정치가를 지목한다. 본서에서 정치가는 입법이라는 국가 운영의 실체를 감당하며, 시민이 주도적으로 법이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세간에 『국가』가 플라톤의 주저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 플라톤의 정치 혹은 법에 관한 정점은 『정치가』에서 나타난다. 이 생각은 『법률』이나 다른 저작을 통해 바뀔 수 있음. 플라톤의 저작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적지 않지만, 내 주요 관심사는 아니라서 필요만 충족하는 선에서 매듭지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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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서 목자-양 유비가 나타나는 본문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이다. 이 논쟁의 화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트라시마코스느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소크라테스는 "전문지식은 강자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약자에게 이로운 것을 살피거나 명령한다"는 말로 반박한다.

자신의 주장이 전복된 상황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양과 목자를 언급하며, 목자가 양을 목양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양 치는 기술은 그 대상인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을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감정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부분에 한정하면, 내가 볼 때 소크라테스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그는 그저 현실감각이 뒤처지는 논리 이상주의자라는 인상을 준다.

내 역할은 일차적으로 이 대화에 나타난 목자-양 유비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타난 플라톤의 저작이 가진 특징을 서술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유대 문헌과 비교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굳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할 필요가 없으니, 이 정도만 언급하고 내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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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미노스』에는 목자가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 용례는,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왕으로 미노스를 칭송하는 이유 중 하나로 호메로스가 훌륭한 장군을 "양 떼의 목자"라고 부른 용례를 제시한다. 두 번째 용례는, 배분자 혹은 적임자의 사례 중 하나로 목자를 언급한다. 양 떼를 가장 잘 양육하는 사람은 목자이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법은 왕이 적임자라고 말한다. 두 용례 모두 목자-양 유비를 왕 혹은 지도자와 연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저작에서 목자-양 유비를 예시로 사용되었을 뿐 그 이상의 기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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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내가 살펴본 플라톤의 『정치가』와 『미노스』를 미루어 보아,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는 국가 운영이며, 법은 국가 운영을 위한 도구이다. 플라톤은 국가 운영의 조타로서 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으며, 그 결과로 법률 3부작으로 꼽히는 『미노스』(Minos: On the Laws), 『법률』(The Laws), 『에피노미스』(Epinomis: On the Laws)가 탄생했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미노스』와 『에피노미스』를 위작으로 간주했으나, 지금은 진작론이 대세라고 한다.

플라톤의 저작 여부와 저작 시기는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플라톤의 저작이라는 전제하에서는 『미노스』가 초기 작품에 『정치가』가 중후기 작품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결정적인 증거라면, 국가 운영의 도구로서 법에 대한 구체화가 『미노스』보다는 『정치가』에서 개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노스』가 영혼을 위한 배분에 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매듭을 짓지만 『정치가』는 더 다양한 예들을 통해 논의를 완성해 간다.

두 작품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왕에 대한 묘사이다. 『미노스』에서는 크레타 왕 미노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고대법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정치가』에서는 왕의 역할을 미비하게 간주하며 법 제정자로서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미노스』보다는 『정치가』가 저자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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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정치가』에서 크로노스 신화는 시대의 전환과 그에 준하여 인간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목적을 가진다. 크로노스 시대에 짐승과 인간은 신성한 목자, 즉 신의 돌봄을 받았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이 지성을 활용할 만큼 발전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현 제우스 시대는 분열의 시기로 이전과 달리 신을 의지하지 말고 인간이 신이 준 지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반면, 『미노스』에서 크로노스는 신화에 알려진 대로 그의 포악성을 통해 법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목적을 가진다. 작품에서 동료는 소크라테스에게 국가마다 다른 법을 갖고 있다고 항변한다.

두 작품 모두 크로노스를 제우스와 대비된 인물로 묘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정치가』에서 크로노스 시대를 이상향으로 그리지 않고, 반어적으로 읽어야 한다면 두 작품 모두 크로노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공통점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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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학계의 경향대로 『정치가』와 『미노스』가 플라톤의 저작이라고 전제하면, 두 작품에 존재하는 저자의 제우스에 관한 독특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역서의 해설에 따르면, 『미노스』는 한때 위작론이 대세였고, 지금은 진작론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먼저 『정치가』에서 제우스는 크로노스 신화에서, 크로노스 시대와 대비되는 현시대의 상징, 즉 플라톤이 처한 현실을 제우스의 유산으로 정의한다. 크로노스 시대에는 인간이 신성한 목자의 목양에 의존하면 되었으나, 제우스 시대에는 인간 스스로 지식/기술을 사용하여 생존해야 한다.

이어 『미노스』의 등장인물인 소크라테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한다. 미노스는 왕의 기술을 습득한 자로, 제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유일한 왕이었다. 미노스를 향한 찬사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저작에 잘 나타난다.

결국, 플라톤은 제우스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을 기술로 정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두 저작에서 국가 운영의 주체로서 왕과 정치가의 입장을 달리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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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설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대세이지만, 간혹 장로 요한을 주장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저자설과 무관하게 두 기록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는데, 내 관심사인 '어린 양'이 그중 하나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현재는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주창하고, 요한계시록이 완성했다는 잠정 결론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 (1:29)의 기원을 탐구하고 있으나, 아직 선례를 찾지 못했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려는 목적대로 '어린 양'을 그의 기록 초반부에 위치시켰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한은 '어린 양'을 왕권 사상과 연결하는 중요한 기여를 남긴다. 요한의 고유한 절기 사용은 그의 목적에 부합한 기교이다.

요한복음이 '어린 양' 신학을 정립하는 시작점이었다면, 요한계시록을 그 사상을 계승하여 종말론적 심판과 부활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린 양'을 왕권과 연결한다. 반면 요한계시록은 유대 절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한복음과 달리 절기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할 필요가 요한계시록에는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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