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제목] <The shepherd imagery in Zechariah 9-14>

[저자] D. F. O’Kennedy (University of Stellenbosch)

[출처] http://www.scielo.org.za/pdf/ote/v22n2/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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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연구주제로 삼은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는다. 포로귀환 이후 에스겔과 스가랴가 목자 모티프를 사용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솔직히, 내가 요한복음의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박사학위 취득의 용이함 때문이다. 내 신학석사 논문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에서 참신한 해석적 가능성을 개진했으므로,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에서 내 전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거라고 예상했다. 목자 모티프란 주제 하나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라는 두 분야에 숫가락을 얹을 수 있는 기회는 덤으로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연구를 진행하고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한때 내 관심사가 포로기 신학이었다는 사실말이다. 당시에는 포로기 시대를 거쳐 묵시문학이 발현되므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차후 방향설정에 도움이 될거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석사 과정에서는 신약 내 묵시문학으로 간주되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내 관심사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스가랴 9-14장은 구약 내 묵시문학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14장에 집중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의 심령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포로기에 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반복적으로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 쓰인 구약성경과 목자 모티프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목자 모티프야말로 예언자들의 심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수단이자 독자들을 설득하는 강력한 언어였던거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포로기 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왜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는듯 하다. 지금껏 나는 내 연구와 포로기 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칫 '우연' 혹은 '편의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끊임 없이 나에게 역사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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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다윗 왕조의 멸망을 경험한 세대들에게 목자 모티프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선포하는 이유를 고민해 보게 된다. 스가랴의 목자 모티프를 통해 절망 속에 한 줄기의 희망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절규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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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 presents an account of the visions of Zechariah concerning the significance of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and it looks forward to the time when YHWH will remove the corrupt “shepherd” or leaders of the people, here understood as a reference to the Persian monarchs, in order to manifest divine sovereignty over the cosmos and nations at large from Zion. - Marvin A. Sweeney, The Twelve Prophets Vol. 2: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Malachi, Berit Olam: Studies in Hebrew Narrative & Poetry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00)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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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는 소선지서 가운데서 가장 길고 애매모호한 책이다. 소선지서 중에 두 번째로 긴 책인 호세아서가 14장 197절인 반면, 스가랴서는 14장 211절이다. 주후 5세기 초에 제롬은 스가랴를 "12선지서 가운데 가장 애매모호하고 긴 책"이라고 불렀다(J. Steinmann, Saint Jerome, trans. R. Matthews[London: Geoffrey Chapman, 1950] 298). 중세에는 두 유대인 학자가 스가랴서의 애매모호한 점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아라바넬(Arabanel, 1508년)은 “스가랴의 예언이 너무애매모호해서 아무리 능숙한 주석가들이라도 그 예언을 능통하게 설명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라쉬(Rashi, 1040-1105)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솔로몬 벤 이삭(Solomon ben Isaac) 은 "스가랴의 예언은 몹시 난하다. 왜냐하면 그 예언에는 해석을 요구하는 꿈과 비슷한 환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는 의로운 스승이 오기 전에는 결코 참된 해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참조. T.W. Chambers, Zechariah, trans. P. Schaff[Lange’s Commentary on Scriptures, New York: Ch.Scribner, 1874] 7). 스가랴서의 애매모호한 점 때문에 그 연대, 저자, 통일성 그리고 해석에 관해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스가랴서는 신약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961년에 폴 라마르쉐(Paul Lamarche)는 스가랴 9-14장의 구조와 메시아 사상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즉 스가랴 9-14장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고난의 이야기가 선지서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부분이며, 에스젤을 제외하고는 스가랴가 구약 중에서 계시록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을 내렸다(Zacharie.ⅰ-ⅹⅳ 8, 9) , 다른 이유가 없다면, 스가랴서는 신약에 미친 영향 때문에 그것을 주의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 랄프 마틴, 미가-말라기, WBC,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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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서는 에스겔과 스가랴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두 본문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려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아래 출처는 Mark J. Boda, Haggai, Zechar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9) 201이다. 각주 20번에 언급된 자료들은 나중에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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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매카이(Cameron Mackay)은 "Zechariah in relation to Ezekiel 40–48"란 소논문에서 스가랴가 에스겔 40–48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번째는, 스가랴의 생존연대이다. 스가랴는 포로의 귀환을 목격한 세대이다. 두번째는, 스가랴서와 에스겔 사이에 존재하는 본문의 유사성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회복 등 서로 중첩되는 주제가 존재한다. 세번째는, 지형적 배경이다. 두 본문 모두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글은 매우 흥미로우며, 실제로 그의 주장대로 스가랴가 에스겔 40–48장에 대한 이상을 계승 받았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현재 내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나는 에스겔 34장의 이스라엘 목자들을 향한 예언이 스가랴 9–14장의 목자 모티프와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근거는 두 본문 모두 동일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데 있다. 첫번째, 이스라엘 목자들을 향한 심판. 두번째,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신다.

만약 내 전제가 옳다면, 이스라엘 목자들을 향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구조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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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스가랴서와 에스겔 40-48장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물이다. 

https://biblicalstudies.org.uk/pdf/eq/1968-4_197.pdf


1968-4_19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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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슥 13:5)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를 끊으시고 선지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2절), 예언은 사라지고(3절) 선지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4-6절).


요 몇 일 기독교선교단체의 공금횡령이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재빠른 사실관계 확인으로 소속단체와 당사자에 대한 정보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듯 싶은데, 한국을 대표한다는 대형교회에서 큰 사건들을 연이어 터뜨려주고 있어 착잡한데 선교단체까지 비리가 발생했다고 하니 꽤나 실망한 분위기이다.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하락하면서 개신교인들은 자신이 교회다닌다는 사실을 왠만하면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도 작용했을 터이다.


이런 이유에서인가 목회자들도 교인들과 무리지어 다닐 때 목사라는 칭호를 부담스러워 하곤 한다. 유난히 큰 목소리로 자주 불러서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지, 교회 내부의 주된 문제요인으로 지적 받는 탓인지 알 길이 없지만.


논문을 위해 이 구절을 주해하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선지자 대신에 목사라는 단어를 넣어 읽어도 적절한 적용이 되는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교회에서든 밖에서든 성도들은 개교회 소속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전도사라고만 해도 살갑게 대해준다. 목회자들이 감당해야 할 수고와 현실적 어려움을 공감해 주시기 때문인텐데,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야 할 시대가 다가온다면 얼마나 참담할까?


존경받는 목회자는 못 되어도, 신분을 감추는 목회자는 안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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