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위키피이아[각주:1]에서 건져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grammatical construction in which a word takes the gender or number not of the word with which it should regularly agree, but of some other word implied in that word. It is effectively an agreement of words according to the sense, and not the morphosyntactic form.

규칙적인 일치에 어긋나는 성이나 수를 취하는 단어을 가진 문법적인 구문이긴 하지만,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를 함축한다. 의미를 따르는 단어의 일치에 효과적이고, 형태동사적 형식이 아니다.


Glossary of Greek Grammar Terms[각주:2]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A construction in which the sense of a word or phrase is considered and not necessarily the grammatical form. For instance a singular noun which refers to a number of people, e.g., , will often take a plural verb. The agreement is to the sense of the noun and not its form. See Solecism.

단어나 구의 의미가 고려되고, 문법적인 형식은 필수적이지 않은 구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수를 참조하는 단수 명사는 종종 복수 동사를 취한다. 일치는 형식이 아닌 명사의 의미를 따른다. 파격 참조.


두 정의를 종합해보면, "모범적인 문법 보다는 매끄러운 문장을 따른다"[각주:3]라고 정리된다. 추가적으로 '문법적인 성'[각주:4]은 전체의미를 담지 못한다. 신현우 교수의 설명[각주:5]에 따르면, 이 문법은 "의미에 따른 문장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BDF §134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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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심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결심문을 지킬 있도록 내게 능력 주시기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잊지말고 매주 한 번씩 이 결심문을 읽자.


1.나의 전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지금 당장이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든지 간에 시간은 전혀 고려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인류 전체의 행복과 유익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내가 부딪히게 될 어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한 그 어려움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자.

2.전에서 언급한 사항을 잘 지키기 위해 도움을 주는 어떤 새로운 수단이나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노력하자.

3.혹시라도 내가 넘어져 점점 무감각해져서 이 결심문 중의 어떤 내용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회개하자.

4.하나님의 영광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영혼에 관계된 것이든지 육체에 관계된 것이든지 또는 적든지 많든지 간에 어떤 것이라도 절대로 하지 말자. 만일 내가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5.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6.내가 살아 있는 동안 힘껏 살자.

7.만일 내 생애의 최후 순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면 절대로 하지 말자.

8.모든 면에서,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도 나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는 것처럼,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범한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사람의 실패를 나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계기로 삼고, 나의 죄와 비참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기회로만 삼자.

9.매사에 나의 죽음과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자.

10.고통스러울 때는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자.

11.해결해야 할 어떤 신학원리가 있을 때, 만일 상황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즉시 하자.

12.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고 있다면 즉시 그런 것들을 버리자.

13.도움과 사랑을 꼭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

14.절대로 복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지 말자.

15.비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화라도 내지 말자.

16.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자. 그렇게 하는 것은 다수간 다른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17.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 일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18.내가 최고로 헌신한 상태일 때, 그리고 내가 복음과 천국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때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살자.

19.마지막 나팔 소리를 듣기 전, 최후의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을 때라고 가정하고 그 때 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자.

20.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

21.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 가운데 내가 판단하거나 생각하기에 경멸받을 만한 행동이나 비열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자.

22.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의 힘, 능력, 활력, 열심, 적극성을 다하여 가능한 한 천국에서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2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행하자. 그리고 그 일의 원래 의도와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원인을 파악하자. 만일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일을 ‘결심문4’를 어기는 것으로 간주하자.

24.내가 어떤 현저한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추적하자. 그런 다음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나쁜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과 내 힘껏 싸우도록 하자.

25.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26.내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버리자.

27.절대로 고의로 어떤 일을 태만하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태만은 예외지만, 자주 내 태만을 점검하자.

28.성경을 아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자주 연구하자. 그렇게 해서 깨닫고, 쉽게 이해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라가자.

29.절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거나, 기도로 인정하거나, 기도의 간구라고 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바랄 수 없는 것을 죄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30.지난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31.결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어떤 말을 하지 말자. 그러나 성도의 명예를 아주 실추시키거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저해하는 것에 대한 비난은 정당하다.

32.잠언 20장 1절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기록된 것이 나에게 해 당하는 말이 되지 않도록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내 신념에 충실하자.

33.다른 면에서 지나친 손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언제나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방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자.

34.이야기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참되고 단순한 진실만을 말 하자.

35.내가 지킨 의무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생길 때마다 그 일로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이 깨어지면 의문 사항들을 기록하고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 하자.

36.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말자. 단 그렇게 하는 것이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경우는 예외다.

37.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가 자신을 부인했는지 등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또한 매주 말, 매월 말, 매년 말에도 그렇게 하자.

38.일에는 절대로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를 하지 말자

39.절대로 합법성에 의문이 많이 제기되는 일을 하지 말자. 동시에 그런 일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일이 합법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조사하자, 또한 만일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합법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40.매일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보자.

41.매일, 매주, 매달, 매해의 마지막에 어떤 면에서 더 낫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 보자.

42.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할 때 진지하게 하였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 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

43.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양 행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인양 행동하자. 토요일에 깨달은 것과 일치하게 행동하자.

44.다른 어떤 목적도 아닌 신앙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자. 신앙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동하지 말자.

45.신앙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에도 절대로 쾌락이나 고통, 기쁨이나 슬픔 등을 느끼지 말자. 어떤 감정도, 조금의 감정도 품지 말자. 그리고 그런 것과 관련된 어떤 환경도 만들지 말자.

46.부모님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심려도 끼쳐 드리지 말자. 가능한 한 말이나 눈동자에 전혀 내색을 하지 않도록 해서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가족 중의 누구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조심하자.

47.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선하고, 보편적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만족하고, 편안하고, 자비롭고, 관용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적이고, 의무를 다하고, 부지런하고 근면하며, 자애롭고, 침착하고, 인내하고, 절제하고, 용서하고, 진지한 성품에 도움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말자. 그리고 항상 이러한 성품이 되도록 하자. 그리고 매 주말마다 내가 그렇게 실천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점검하자.

48.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임종의 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회개할 무관심의 죄를 조금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아주 세밀하고도 부지런하게 그리고 가장 엄격하게 내 영혼의 상태를 조사하도록 하자.

49.만일 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절대로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자.

50.내가 내세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한 것이 최선이었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었다 고 판단하게 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자.

51.죽을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그렇게 하자.

52.나는 종종 노인들일 자기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겠다라고 말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노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때 가서 ‘내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자.

53.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일 때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내 영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던지고 맡기자.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자.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자. 이로써 내가 나의 구속주를 알므로 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54.어떤 사람을 칭찬하는 내용을 들을 때마다 나도 그런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본받도록 노력하자.

55.이미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을 맛 본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56.아무리 내가 실패하더라도 내 안에 있는 부패와의 싸움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말고 조금도 긴장을 풀지도 말자.

57.불행과 불운에 대한 염려가 생길 때, 내 의무를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의무를 다 하도록 결심하자.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자. 할 수 있는 한 나는 내 의무와 내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자.

58.대화를 나눌 때 불쾌하거나 초조하거나 화를 낸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친절한 모습을 보이도록 하자.

59.나쁜 성질과 분노가 가장 많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 가장 많이 노력해서 좋은 성격이 드러나도록 행동하자. 그렇다. 그럴 때 비록 다른 측면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때는 경솔하게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성격을 드러내도록 하자.

60.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 아주 불편한 마음이 생기거나 감정이 밖으로 일관성 없이 표출될 때는 내 자신을 엄격하게 검사해 보자.

61.핑계가 무엇이든지 간에- 사실 게으름은 핑계 거리를 만들도록 하는 경향이 있지만- 신앙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내 생각을 흐트러뜨리고 풀어지게 하는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62.결코 어떤 일을 의무감으로만 하지 말고, 에베소서6:6-8에 따라서 기쁘고 자원 하는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든지 간에 그는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63.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 하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

64.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119:20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 을 다하여 이것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 해지지 않도록 하자.

65.전 생애 동안 이것을 있는 힘을 다해 연습하자. 즉 맨톤 박사의 시편 119편 설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나의 모든 죄와 유혹과 어려움과 슬픔과 두려움과 희망과 소원 그리고 모든 것과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열어 놓자.

66.어느 곳에서나, 어느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친절한 태도와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자. 의무상 다르게 행동해야 할 때는 예외다.

67.고난 후에는 고난으로 인해 내가 더 나아진 점이 무엇인지, 어떤 유익을 얻었는지,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도록 하자.

68.약점이든지 죄이든지 간에 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 솔직히 고백하자. 만일 그것이 신앙에 관련된 것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필요한 도움을 간구하자.

69.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저렇게 했으면 하는 것들을 항상 행하도록 하자.

70.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자.



The Resolutions of Jonathan Edwards


Being sensible that I am unable to do any thing without God’s help, I do humbly entreat him, by his grace, to enable me to keep these Resolutions, so far as they are agreeable to his will, for Christ’s sake.

Remember to read over these Resolutions once a week.

1. Resolved, that I will do whatsoever I think to be most to God's glory, and my own good, profit and pleasure, in the whole of my duration, without any consideration of the time, whether now, or never so many myriad's of ages hence. Resolved to do whatever I think to be my duty and most for the good and advantage of mankind in general. Resolved to do this, whatever difficulties I meet with, how many and how great soever.

2. Resolved, to be continually endeavoring to find out some new invention and contrivance to promote the aforementioned things.

3. Resolved, if ever I shall fall and grow dull, so as to neglect to keep any part of these Resolutions, to repent of all I can remember, when I come to myself again.

4. Resolved, never to do any manner of thing, whether in soul or body, less or more, but what tends to the glory of God; nor be, nor suffer it, if I can avoid it.

5. Resolved, never to lose one moment of time; but improve it the most profitable way I possibly can.

6. Resolved, to live with all my might, while I do live.

7.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which I should be afraid to do, if it were the last hour of my life.

8. Resolved, to act, in all respects, both speaking and doing, as if nobody had been so vile as I, and as if I had committed the same sins, or had the same infirmities or failings as others; and that I will let the knowledge of their failings promote nothing but shame in myself, and prove only an occasion of my confessing my own sins and misery to God.

9. Resolved, to think much on all occasions of my own dying, and of the common circumstances which attend death.

10. Resolved, when I feel pain, to think of the pains of martyrdom, and of hell.

11. Resolved, when I think of any theorem in divinity to be solved, immediately to do what I can towards solving it, if circumstances don't hinder.

12. Resolved, if I take delight in it as a gratification of pride, or vanity, or on any such account, immediately to throw it by.

13. Resolved, to be endeavoring to find out fit objects of charity and liberality.

14.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out of revenge.

15. Resolved, never to suffer the least motions of anger to irrational beings.

16. Resolved, never to speak evil of anyone, so that it shall tend to his dishonor, more or less, upon no account except for some real good.

17. Resolved, that I will live so as I shall wish I had done when I come to die.

18. Resolved, to live so at all times, as I think is best in my devout frames, and when I have clearest notions of things of the gospel, and another world.

19.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which I should be afraid to do, if I expected it would not be above an hour, before I should hear the last trump.

20. Resolved, to maintain the strictest temperance in eating and drinking.

21.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which if I should see in another, I should count a just occasion to despise him for, or to think any way the more meanly of him.

(Resolutions 1 through 21 written in on setting in New Haven in 1722)

22. Resolved, to endeavor to obtain for myself as much happiness, in the other world, as I possibly can, with all the power; might, vigor, and vehemence, yea violence, I am capable of, or can bring myself to exert, in any way that can be thought of.

23. Resolved, frequently to take some deliberate action, which seems most unlikely to be done, for the glory of God, and trace it back to the original intention, designs and ends of it; and if I find it not to be for God's glory, to repute it as a breach of the 4th Resolution.

24. Resolved, whenever I do any conspicuously evil action, to trace it back, till I come to the original cause; and then both carefully endeavor to do so no more, and to fight and pray with all my might against the original of it.

25. Resolved, to examine carefully, and constantly, what that one thing in me is, which causes me in the least to doubt of the love of God; and to direct all my forces against it.

26. Resolved, to east away such things, as I find do abate my assurance.

27. Resolved, never willfully to omit anything, except the omission be for the glory of God; and frequently to examine my omissions.

28. Resolved, to study the Scriptures so steadily, constantly and frequently, as that I may find, and plainly perceive myself to grow in the knowledge of the same.

29. Resolved, never to count that a prayer, nor to let that pass as a prayer, nor that as a petition of a prayer, which is so made, that I cannot hope that God will answer it; nor that as a confession, which I cannot hope God will accept.

30. Resolved, to strive to my utmost every week to be brought higher in religion, and to a higher exercise of grace, than I was the week before.

31. Resolved, never to say anything at all against anybody, but when it is

perfectly agreeable to the highest degree of Christian honor, and of love to mankind, agreeable to the lowest humility, and sense of my own faults and failings, and agreeable to the golden rule; often, when I have said anything against anyone, to bring it to, and try it strictly by the test of this Resolution.

32. Resolved, to be strictly and firmly faithful to my trust, that that in Prov. 20:6, "A faithful man who can find?" may not be partly fulfilled in me.

33. Resolved, always to do what I can towards making, maintaining, establishing and preserving peace, when it can be without over-balancing detriment in other respects. Dec.26, 1722.

34. Resolved, in narration's never to speak anything but the pure and simple verity.

35. Resolved, whenever I so much question whether I have done my duty, as that my quiet and calm is thereby disturbed, to set it down, and also how the question was resolved. Dec. 18, 1722.

36. Resolved, never to speak evil of any, except I have some particular good call for it. Dec. 19, 1722.

37. Resolved, to inquire every night, as I am going to bed, wherein I have been negligent, what sin I have committed, and wherein I have denied myself: also at the end of every week, month and year. Dec.22 and 26, 1722.

38. Resolved, never to speak anything that is ridiculous, sportive, or matter of laughter on the Lord's day. Sabbath evening, Dec. 23, 1722.

39.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that I so much question the lawfulness of, as that I intend, at the same time, to consider and examine afterwards, whether it be lawful or no; except I as much question the lawfulness of the omission.

40. Resolved, to inquire every night, before I go to bed, whether I have acted in the best way I possibly could, with respect to eating and drinking. Jan. 7, 1723.

41. Resolved, to ask myself at the end of every day, week, month and year, wherein I could possibly in any respect have done better. Jan. 11, 1723.

42. Resolved, frequently to renew the dedication of myself to God, which was made at my baptism; which I solemnly renewed, when I was received into the communion of the church; and which I have solemnly re-made this twelfth day of January, 1722-23.

43. Resolved, never henceforward, till I die, to act as if I were any way my own, but entirely and altogether God's, agreeable to what is to be found in Saturday, January 12. Jan.12, 1723.

44- Resolved, that no other end but religion, shall have any influence at all on any of my actions; and that no action shall be, in the least circumstance, any otherwise than the religious end will carry it. Jan.12, 1723.

45. Resolved, never to allow any pleasure or grief, joy or sorrow, nor any affection at all, nor any degree of affection, nor any circumstance relating to it, but what helps religion. Jan.12 and 13.1723.

46. Resolved, never to allow the least measure of any fretting uneasiness at my father or mother. Resolved to suffer no effects of it, so much as in the least alteration of speech, or motion of my eve: and to be especially careful of it, with respect to any of our family.

47. Resolved, to endeavor to my utmost to deny whatever is not most agreeable to a good, and universally sweet and benevolent, quiet, peace_able, contented, easy, compassionate, generous, humble, meek, modest, submissive, obliging, diligent and industrious, charitable, even, patient, moderate, forgiving, sincere temper; and to do at all times what such a temper would lead me to. Examine strictly every week, whether I have done so. Sabbath morning. May 5,1723.

48. Resolved, constantly, with the utmost niceness and diligence, and the strictest scrutiny, to be looking into the state of my soul, that I may know whether I have truly an interest in Christ or no; that when I come to die, I may not have any negligence respecting this to repent of. May 26, 1723.

49. Resolved, that this never shall be, if I can help it.

50. Resolved, I will act so as I think I shall judge would have been best, and most prudent, when I come into the future world. July 5, 1723.

51. Resolved, that I will act so, in every respect, as I think I shall wish I had done, if I should at last be damned. July 8, 1723.

52. I frequently hear persons in old age say how they would live, if they were to live their lives over again: Resolved, that I will live just so as I can think I shall wish I had done, supposing I live to old age. July 8, 1723.

53. Resolved, to improve every opportunity, when I am in the best and happiest frame of mind, to cast and venture my soul on the Lord Jesus Christ, to trust and confide in him, and consecrate myself wholly to him; that from this I may have assurance of my safety, knowing that I confide in my Redeemer. July 8, 1723.

54. Whenever I hear anything spoken in conversation of any person, if I think it would be praiseworthy in me, Resolved to endeavor to imitate it. July 8, 1723.

55. Resolved, to endeavor to my utmost to act as I can think I should do, if I had already seen the happiness of heaven, and hell torments. July 8, 1723.

56. Resolved, never to give over, nor in the least to slacken my fight with my corruptions, however unsuccessful I may be.

57. Resolved, when I fear misfortunes and adversities, to examine whether ~ have done my duty, and resolve to do it; and let it be just as providence orders it, I will as far as I can, be concerned about nothing but my duty and my sin. June 9, and July 13 1723.

58. Resolved, not only to refrain from an air of dislike, fretfulness, and anger in conversation, but to exhibit an air of love, cheerfulness and benignity. May27, and July 13, 1723.

59. Resolved, when I am most conscious of provocations to ill nature and anger, that I will strive most to feel and act good-naturedly; yea, at such times, to manifest good nature, though I think that in other respects it would be disadvantageous, and so as would be imprudent at other times. May 12, July ii, and July 13.

60. Resolved, whenever my feelings begin to appear in the least out of order, when I am conscious of the least uneasiness within, or the least irregularity without, I will then subject myself to the strictest examination. July 4, and 13, 1723.

61. Resolved, that I will not give way to that listlessness which I find unbends and relaxes my mind from being fully and fixedly set on religion, whatever excuse I may have for it-that what my listlessness inclines me to do, is best to be done, etc. May 21, and July 13, 1723.

62. Resolved, never to do anything but duty; and then according to Eph. 6:6-8, do it willingly and cheerfully as unto the Lord, and not to man; "knowing that whatever good thing any man doth, the same shall he receive of the Lord." June 25 and July 13, 1723.

63. On the supposition, that there never was to be but one individual in the world, at any one time, who was properly a complete Christian, in all respects of a right stamp, having Christianity always shining in its true luster, and appearing excellent and lovely, from whatever part and under whatever character viewed: Resolved, to act just as I would do, if I strove with all my might to be that one, who should live in my time. Jan.14' and July '3' 1723.

64. Resolved, when I find those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 (Rom. 8:26), of which the Apostle speaks, and those "breakings of soul for the longing it hath," of which the Psalmist speaks, Psalm 119:20, that I will promote them to the utmost of my power, and that I will not be wear', of earnestly endeavoring to vent my desires, nor of the repetitions of such earnestness. July 23, and August 10, 1723.

65. Resolved, very much to exercise myself in this all my life long, viz. with the greatest openness I am capable of, to declare my ways to God, and lay open my soul to him: all my sins, temptations, difficulties, sorrows, fears, hopes, desires, and every thing, and every circumstance; according to Dr. Manton's 27th Sermon on Psalm 119. July 26, and Aug.10 1723.

66. Resolved, that I will endeavor always to keep a benign aspect, and air of acting and speaking in all places, and in all companies, except it should so happen that duty requires otherwise.

67. Resolved, after afflictions, to inquire, what I am the better for them, what good I have got by them, and what I might have got by them.

68. Resolved, to confess frankly to myself all that which I find in myself, either infirmity or sin; and, if it be what concerns religion, also to confess the whole case to God, and implore needed help. July 23, and August 10, 1723.

69. Resolved, always to do that, which I shall wish I had done when I see others do it. Aug. 11, 1723.

70. Let there be something of benevolence, in all that I speak. Aug. 1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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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Joï-hm;

랍비 시몬스의 대답[각주:1]http://judaism.about.com/library/3_askrabbi_o/bl_simmons_matovu.htm'>에 따르면

"Ma Tovu"는 아침에 회당에 들어가면서 읊는 (민수기 24장 5절에서 시편들까지의) 운문 묶음이다.  성전을 대신하는 회당에 대한 찬양과 존경의 표현이다. (출처: "Seder Amram Gaon" Tefillot U'Bekashot, "Siddur Kol Yacov" - Artscroll).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서 찾았다.

Ma Tovu(히브리어로 "오 얼마나 좋은지" 혹은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뜻)는 회당과 다른 예배 처소를 향한 존경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유대교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민수기 24장 5절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저주하려고 보낸 발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인들의 예배당에 압도되었다. 찬양의 첫 줄은 발람의 축복이며, 비 유대인에 의해 쓰여져서 유대인 예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일한 기도이다. 본문의 나머지 부분은 예배당으로의 입장과 그 이상의 기도(시편 5편 8절, 26편 8절, 95편 6절, 69편 14절)를 준비하는데 관련있는 시편의 악절에서 끌어왔다. 이 문맥에서는 유대인들이 회당에 들어가면서 암송하는 기도이다.


그 이상의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Ma_Tovu 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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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서 정의를 따르면,


파라샤는 타낙(히브리 성경)의 마소라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en.wikipedia.org/wiki/Parsha 를 참고하도록 한다. Jewish Torah Audio[각주:1]에는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파라샤는 "조각"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의 한 부분을 유월절마다 읽는다. 수천년을 거스러 올라갈 수 있는 일상적인 관습이다.  유대인들이 일주일 동안 한 주간 분량을 공부하는 전통이다. 매 주마다, 전 세계에서 그 주의 파라샤 강좌을 들으러 간다.

모세오경은 54 조각으로 나눠져 있다.

파라샤 강좌는 http://613.org/parasha.html 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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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linear Scripture Analyzer를 제공하는 곳. PDF로도 제공한다.
http://www.scripture4all.org


강세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발음 표기 역시 다르다. 이 두 가지만 보완된다면, 매우 유용할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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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koluth

고대언어/헬라어 2007. 6. 23. 18:57
anakoluth란?

In some cases, illustrated by Laporte: Caller Chris II, the projection is that of an 'anakoluth', a meaningful "coming-to-a-stop", which leaves the interactants with enough information to act upon and take over the turn that has come to a stop.[각주:1]


<IX.Die Dimensionen der Sprachvariation und die Auslastung der Varietatenraume im Vergleich>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Anakoluth = syntaktischer "Bruch¡" aufgrund einer Plananderung
(? Parameter d, e, h, Versprachlichungsstrategien i und ii),
in jeder spontanen Konversation, gleich in welcher Sprache, erwartbar.

위키피디아 http://de.wikipedia.org/wiki/Anakoluth 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두 자료 모두 독일어라 해석불가능.

참고로,
<현대독일어 인과문에 있어서의 주문장 어순 경향에 대하여>란 논문에서는 anakolth를 '파격문장'이라고 했다. 해당 파일 다운로드.


업데이트 2008년 4월 14일.
더 자세한 내용은 파격문장(anacoluthon)를 읽어보라.
  1. Wolfgang Imo, <A Construction Grammar approach to the phase "I mean" in Spoken English>, p.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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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문제중에서 세 가지를 택하여 작성한후 제출하시요.



1.
종교개혁적 Sola Scriptura

 

2. 종교개혁적 이신칭의

 

종교개혁적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이며, 종교개혁 신학의 유명한 구호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이라는 말은 칭의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칭의론은 우리가 가진 교리 가장 중심적인 교리, , , 교회의 이라고 루터는 표현한다. 1537 논쟁에서 칭의에 관한 조항은 선생이요, 영주요, 주요, 인도자요, 모든 교회 교리가 증명하고, 유도하며, 우리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교리를 판단하는 심판자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에 대한 언급 앞에 놓인 지평이 바로 임박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루터에게는 어떻게 인간이 심판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다. “칭의에 관한 조항은 옳게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칭의 조항이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과 나뉘어져서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전개하는 것만이 칭의론을 바르게 다루는 것이다.

신앙은 오히려 모든 자신의 행위와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파하는 것이며,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가능하다. 칭의는 신앙으로, 다시 말해서 신앙의 형태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존하시고 신앙은 보물을 가지고 있기에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에서 그리스도는 현존한다. 이것이 칭의를 결정짓는 내용이요 인간의 중생의 근거이다.

루터는 칭의가 죄로부터의 무죄 선고이며 동시에 갱신이라는 둘의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특별히, 빌프리트 요에스트는 루터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진술들은 있는 그대로를 서로 불가분리의 연관성 속에서 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전체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부분적인 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죄인이요, 동시에 의인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찬가지로 신적인 칭의와 의롭게 함을 얻었다 할지라도 부분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죄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의인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 인간에게 행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함을 언제나 주장했다. 여기서는 오직 믿음만이 칭의를 얻기에 타당한 것이다.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루터는 행위의 필연성 확신했다. 행위는 구원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루터에게는 행위의 의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칭의와 연관된다면 행위를 강조해서는 된다.

사실 루터는 행위가 없다는 것은 신앙이 죽은 것임을 말한다고 가끔 설명한다. “믿음에 대하여라는 논쟁에서 그는 만약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으며, 단지 죽은 믿음임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칭의론에서는 참된 신응은 게으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와 뒤따르는 것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확인하고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가끔 루터는 가지 칭의를 구분하고 있다. 팔라디우스와 틸레만의 박사학위 논쟁에서 성경은 가지 칭의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요, 다른 하나는 행위를 통한 세상 앞에서의 칭의이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루터는 전적으로 바울 그리고 바울적인 의미로 해석된 복음서를 인용하여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이라는 칭의를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여기서 제쳐두고 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 행위들은 신앙 또는 불신양의 표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우위가 확보되고 있다. 루터가 칭의론에서 목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외식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이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다. “우리 신학은 우리를 우리 밖에 세우기 때문에 확실하다. 나는 나의 양심을 의지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속일 없는 진리를 의지해야만 한다.”

 

루터의 말대로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비추는 거룩한 태양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학은 칭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고, 십자가 신학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만큼 칭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행위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기는 하지만,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울 없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그의 전적인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해야 마땅하다.

3. 칼빈의 율법 이해

 

4. 칼빈의 교회론

 

5. 종교개혁적 교회와 사회/국가의 관계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과 모든 인류를 그룹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룹이며, 둘째는 세상 나라에 속한 그룹이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신자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정부도 법도 필요치 않다. 만약 세상 전체가 참된 그리스도인 , 참된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영주, , 통치자, 정부, 혹은 법으로부터 받을 아무런 도움이 없다.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은 세상 나라와 세속법 아래 있다. 그곳에는 참된 신자란 거의 없으며, 악에 저항하고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동떨어진 다른 하나의 정부를 주셨고, 인간이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연약한 점을 대처할 없기에 인간을 아래 살게 하셨다라고 루터는 말했다. 루터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나누어 생각했는데, 이는 바르트에 의해 왕국론이라 불려지기 시작했다. 루터는 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부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의를 만들어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평화를 가져오며 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어느 것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세상에서 충분치 않다. 어떤 정부도 독자적으로 수행 없는데, 세속적인 정부만 있을 경우엔, 사람을 경건케 하는 성령이 마음 속에 없을 것이며, 영적인 정부만 있다면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악이 횡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속 정부에 통치권과 권력을 부여하셨으며, 영적 정부에는 봉사와 직임이 있다. 왕국과 정부를 구분하는 의미는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 있는 인간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며, 그들의 상호간계와 차이점에서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명백하게 알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부 또는 국가만이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을 보존하고 계속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해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분과 일치한다.

 

칼빈은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와 시민적 질서는 완전히 상이하다고 했다. 상이성은 영역의 서로 다른 임무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이 생각하기로 마지스트라(magistrat)’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초대하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도록 보존하시기 위하여 쓰시는 외적인 수단이요, 보조 기관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통치 질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한 봉사자요, 중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나라는 보편적인 교회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이다.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성령의 새로 지으시는 권능이 확장되는 , 그것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가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릇된 교회임에 틀림 없다. 참된 교회는 자체의 말을 하거나 자체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며, 또한 세상의 어떠한 지배자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라는 성경을 기구이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이 말씀을 중심하는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말씀은 또한 직분자를 통하여 선포된다. 영역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근거에 두고 있으며, 자의 역할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한다든가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서는 된다. 때문에 칼빈은 정부가 하는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이와 반대로 정부가 교회에 간섭하려 때에는 망설임 없이 저항하였다.

 

 

6. 종교개혁적 신학이 초교파신학의 기초하는 주장에 대해

 

서병용 교수는 초교파신학 강의에서 종교개혁적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파주의는 핵심적인 공통성보다 부차적인 차이성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교파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문제다. 성경적 사고방식은 탈중심적이며, 초교파를 지향한다고 해서 교파를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학행위의 주체자는 초교파적 교회의 공동체 가운데 있으며, 초교파란 종말론적인 존재로서의 교회의 기본 관심이요 삶의 지평이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복음주의적 신학의 초점과 결정적인 표준으로서 복음적 초교파신학의 출발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발견하고 이를 성경적 기초 위에 두고 조직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칼빈은 이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이해하는 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이야 말로 개신교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학이라고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칼빈신학이 정통교리라고 믿는다. 흔히 그리스도교 3 신학자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꼽는데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교리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이며,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종교개혁적 신학의 기초를 다졌고,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하면서 루터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 루터, 칼빈 신학은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로 인정해야 함과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아 들여야 신학이다. 정리하자면, 어거스틴은 루터와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고, 둘은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서병용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이들의 신학이 종교개혁적 신학이며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이다. 나아간다면 그리스도교 정통교리이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학부시절에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받아들이는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므로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데 적극 동의한다. 나아가 모든 교파는 종교개혁적 신학을 자신의 교파의 핵심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개혁적 신학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온갖 논쟁을 통해 정립되어 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근본이라 해도 무방하며, 점차적으로 더욱 모순에 빠져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부시절을 보낸 성결대학교만 하더라도 칼빈신학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전통교리로 검증되지도 않은 웨슬리안 · 알미니안주의를 교리로 삼으면서도 자신들이 정통이며 복음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종교개혁적 신학이 복음적 초교파 신학의 기초라는 주장이 당위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동의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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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신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 모른다"


인생에서 끔찍한 게 하나 있다면 죽음이다. 즐거운 하루 하루가 실은 피할 길 없는 총살대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종교가 주는 위안, 자애로운 하느님과 영생(永生)에 마음이 기울어 왔다.

하지만 종교의 핵심, 요컨대 신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영원히 살리라는 믿음에는 이렇다 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 인생의 위기에 처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잃고 이렇게 묻는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어째서 이토록 아무 근거가 없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신앙이 가령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이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는 데’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던 순간은 몇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 따져보면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순에 찬 타협에 이른다. 일주일 중 엿새 동안 완벽하게 분별력 있던 사람들이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죽었다 살아났으며, 어느 날엔가 똑같은 육체로 부활하리라고 경배 드린다.

이처럼 도저히 논리적으로 옹호하기 어려운 믿음이 오랫동안 살인을 부추겨 왔다. 젊은 무슬림이 “자살 테러를 해서 최대한 많이 인명을 살상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 지식인 사회에서는, ‘신(新)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처럼 어처구니 없고 치명적인 신앙이 과연 시대의 흐름에 맞는지 따져 묻기 시작했다.

신간 ‘신(神)이 있다는 착각(The God Delusion)’을 펴내 종교를 맹공격한 영국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 선수다. 도킨스가 이 문제를 처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조상 이야기’ 같은 전작을 통해 누구보다 명료하고 적극적으로 과학을 옹호해왔다.

도킨스는 당신을 자극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얘기를 맨 처음 들은 사람이 보인 반응은 자기는 이 책은 물론 이와 비슷한 그 어떤 책도 읽을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불쑥 내게 논쟁을 걸기까지 했다. 어쨌든 나는 종교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신(神)을 다시 생각해 볼 계기로 삼도록 추천한다.

같은 또래 영국 중산층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도킨스는 기독교에 친숙하되, 신학을 배운 적은 없고, 무엇보다 영적인 체험이 전혀 없다. 종교의 본성과 “신을 믿는다”고 고백한 과학자들에 대한 그의 단순화가 또 다른 종류의 옹졸한 편견(bigotry)으로 보일 수 있다. 책의 상당 부분이 무신론을 옹호한 도킨스 자신의 경험담이라는 것도 짜증스럽다. “이 책에서 신(神)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도킨스 자신”이라고 비꼬는 서평도 있을 정도다. 이런 비판은 그러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도킨스는 신의 존재 혹은 부재가 논증의 대상이자, 과학적인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주류 종교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 개념은 착각(delusion)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도킨스는 주장한다.

그는 이어 수많은 논제를 체계적으로 논증해간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없이는 도덕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 무신론자들은 빈자와 약자를 돕는데 가상의 신보다 더 나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신을 믿지 않고도 우리는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종교를 개인의 선택에 맡겨두지 않는가? 그건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게 도킨스의 주장이다. ‘종교가 뭐가 잘못됐나?’라는 장(章)에서 도킨스는 우리가 왜 종교에 유의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악행의 예를 찾느라 굳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다. 자살 테러범, 탈레반, 낙태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에 폭탄을 던진 미국 기독교도들 등 현대 사회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도킨스는 줄줄이 예로 든다.

언론과 비평가들은 이런 악행의 원인을 사회경제학적 맥락에서, 혹은 정책적 실패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9·11 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찾는 식이다. 도킨스는 그러나 이런 악행에는 보다 명쾌한 배후가 있다고 본다.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문자 그대로 믿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악당들과의 전쟁이 아니다. 도킨스는 이렇게 썼다. “자살테러범들은 악행을 저지르려는 게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종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을지 몰라도, 자기네 나름대로는 자신이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믿는 것이다. 낙태 시술 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살해한 기독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도킨스는 따라서 우리가 종교적 극단주의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선량하고, 점잖고, 법을 지키는 종교적 온건파들도 비판한다. “온건하고 중도적인 종교조차 장차 극단주의가 자라날 토양을 만든다”고 도킨스는 썼다. 이 책은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도 독자는 도킨스가 진실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인정할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고, 나아가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검증 받는 것마저 완강하게 거부하는 인간의 행태에 대해 도킨스가 마음 깊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듣고 배운 바와 같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치자. 신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지 모른다. 고대의 예언자들이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었을 뿐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신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미지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누가 알겠는가? 도킨스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그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더 행복해하고 있으며,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기적 유전자’를 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이며 옥스포드대학 교수다. ‘신이 있다는 착각(The God Delusion)’은 작년 9월 처음 나온 뒤 9개월 째 영미권 주요 베스트셀러 리스트의 윗순위에 올라있다.


그렇다면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의 강의도 들어보라.
1.
리처드 도킨스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과학과 신앙에 대한 토론을 담은 비디오[각주:1]  
2. "Dawkins God: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각주:2]
   
강의 MP3, PDF, Q&A MP3, 강의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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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목적

성찰 2007. 6. 8. 00:44

출처 : 한국성서학연구소 "Bonn 대학의 최근 신학동향"


초교파신학에서 배운 한스 요하킴 이반트(Hans-Joachim Iwand)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글.


본 대학 신학부의 한 교수는 한 심포지엄에서 성서이해와 성서에의 접근을 주제로 한 신학자들의 논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쟁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검색목적에는 부합하진 않지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구절이다. 끊임 없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타협은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논쟁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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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벨직 신앙고백서 13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카이로스(kairos) 대해 제일 먼저 서술하였고, 카이로스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예비'라고 보았다. 역사란 그저 흘러가는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다는 분명히 밝히는데 가장 적합한 표현이 카이로스이며, 실제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과 예비하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카이로스일까?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죽을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뮐러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필생에 걸친 최종적 연구 결과를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복음은 모든 희망의 성취이며, 모든 철학의 완성이고, 모든 혁명들에 대한 해석이며,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모든 물리적·도덕적 세계의 열쇠이다; 그것은 생명이다. 그것은 불멸이다.” 틸리히의 말대로 모든 역사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목적을 뮐러의 표현을 빌린다면 복음이라 있고, 이런 역사를 구속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으며, 따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사도들이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에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들의 교회에 역사적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증언과 그들이 전한 복음에, 그들에 의하여 혹은 그들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 말씀에 신앙과 생활의 근거를 두는 교회이다.

미국의 유명한 교회 역사가 빌헬름 파우크 박사와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는초대교회를 모르면 기독교를 모른다 말했다. 그만큼 초기기독교 500년의 역사는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서 모판과 같이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이유는 시대에 신앙의 원리인 정경이 확립되었고 참된 교회가 지향해야 신학적 교리가 체계화 되었으며 또한 예배의식과 교회의 조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것은 교회가 외적으로 로마의 오랜 박해를 받았으며 내적으로 이단과 분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에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허락하셨는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초대교회 역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으로 믿는 신앙고백이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때문인지 초대교회사 동안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초대 교회 시대의 기독론은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들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인지 하는 관심에서 삼위일체를 논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두고는, 그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그의 인격을 이루시는 것인지, 주로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다. 필립 샤프가 지적했듯이 확실히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는 곳에 마귀도 곁에 예배당을 세운다.” 그러나 온갖 오류에도 섭리의 손에 들리면 진리가 확연하고도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틀림없이 이바지한다. 오류들은 연구를 자극하고 방어를 강요한다. 이단들과의 잦은 논쟁 덕분에 초대교회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고히 다지게 되었다. 결국엔 처참한 심판을 받겠지만 악한 자들을 통해서도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초대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한 자기준비와 대처가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전통을 수립하거나 조직하는 , 특히 이단들에 맞서 교리를 체계화하는 것은 교회의 상시적인 과제였다. 한때 교회는 삼위일체와 기독론 같은 신학논쟁으로 혼란에 빠졌으나 이로써 더욱 말씀에 견고히 서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결과 여러 이단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소멸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세상의 어떤 도전과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에 굳건히 결과였다.

초대교회는 교리 논쟁 외에도 모진 핍박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어려운 시기였다. 스테반의 순교 이후 사울의 교회 탄압이 있었고, 로마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네로의 박해를 받은 후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 하기 전까지 줄곧 이유 없는 핍박을 받았다. 게다가 유대인 전쟁이 있었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기까지 하였다. 이단과의 논쟁은 교리를 체계화하는 계기로 허락하셨다면, 이런 일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로마의 패망 당시의 신자들이 그랬듯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며 혼란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하나님은 사건들이 자연적으로 해결되도록 하시거나 아니면 아무런 상관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만물을 내버려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신 것이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뜻대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심으로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없음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발생하는 어떤 죄에 대한 책임자가 없으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하심은 너무나 위대하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사단과 사악한 인간들이 불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는 가장 놀랍고도 의로운 태도로써 자신의 사역을 명하시고 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3 방식).” 우리가 납득하지 어려운 사건들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필립 샤프는 예루살렘 멸망은 기독교 교회가 본격적으로 유대교라는 누에고치를 영원히 뚫고 나와 자신의 성숙을 깨우치고, 정치와 예배로 세상 앞에 단번에 독립된 자태를 드러낸 중대한 분기가 된다.”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해 생각해 , 우리는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를 넘어 있는 놀라우신 뜻을 호기심으로 감히 찾아 수는 없으며, 다만 지극한 겸손과 경외함으로 우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따를 뿐이며,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여준 사실만을 배울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만족을 해야 것이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할 없는 위로를 주는데, 이유는 어떤 일도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어남을 교훈을 통하여 있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을 이해하게 된다.

이제는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있다. 기간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고, 기독교의 근본 되는 진리와 체계를 세우시고, 시대를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도록 하셨다. 우리는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벨직 신앙고백서 13장을 통해 이제는 사건에 매여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니라 사건에 대한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2. 어거스틴의 신학 정리

 

 

도나투스 논쟁

교회를 성도들의 회중으로 보는 도나투스파는 교회가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들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성결이 교회 구성원들의 성결에 근거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가 가라앉은 이후 배교한 자들이 교회로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3세기 중엽 노바티안과 그의 추종자들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상황과도 비슷하다.

도나투스파의 분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가 성결한 생활을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생활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설사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때문에 그들의 성결 생활은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분파의 죄는 배교보다 무서운 죄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내의 선한 자와 악한 자는 심판 때에 가려지는 것이며, 교회의 성결은 교인들의 성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성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나투스파는 성례와 국가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도나투스파는 자파 이외의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에서 받은 세례도 신자가 가톨릭 교회에 돌아올 때는 그대로 유효하다고 했다. 교회는 로마 정부에게 핍박을 받아왔으나 국가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도나투스파는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와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지를 견지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고, 감독들은 재판소에 관여할 바가 없다고 했다. 도나투스파 신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방 문학이나 지식과 이방의 생활 양식 전부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투스파가 염세적이며 분리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게 것은 그들이 로마 제국에 반감을 가졌던 정치, 사회적 배경과 금욕, 고행, 순교, 기적 등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그들의 토속 종교의 배경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타협적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토속 종교의 배경에서 살아온 하층 계급의 대중들은 국교화되어 가는 로마의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고 반로마적인 도나투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도나투스파의 분파 운동이 교회의 도덕 생활과 경건을 강조함으로써 독선적인 면을 가졌다. 운동은 기독교의 근본적이며 정통적인 교리에 충실하면서 국교화되고 세속화되어 가는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교회의 성결을 강조한 나머지 비타협적이며 극단주의적 교회 분립을 단행한 운동이다.

411 호노리우스 항제의 칙령으로 411 카르타고에서 신학 논쟁을 위한 회의가 열렸는데, 논쟁을 주도한 신학자는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 감독 페틸리안이었다. 황제의 대리인은 가톨릭 측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회의 이후 도나투스파는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7세기에 아프리카가 이슬람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도나투스파 교회는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와 함께 소멸되었다.

 

도나투스 논쟁과 연관 지어 생각해 있다. 그건 바로 일제 강점기를 거친 부류 그리스도인들이다. 칠흙 같은 시대를 거치면서 살아간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 지혜로운 같은 자들, 회개자, 배교자로 나눠지는데, 안타깝게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이들은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 지혜로운 같은 자들이었으며 배교자들도 많았다. 해방 이후에는 배교자들 중에서 신앙을 저버린 대한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며 교회로 돌아온 이들이 있는데, 회개자의 처리는 한국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감싸주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노바티안파와 도나투스파가 교회의 순결을 외치며 분파 운동을 일으켰듯이 그들을 배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걸까? 쉽게 결론을 내릴 없지만, 노파티안파와 도나투스파의 분파운동의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교훈을 얻을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알기로는 노파티안파는 서방에서 로마의 감독 코넬리우스의 지도하에 60명의 감독들이 노회로 모여 노바티안과 그의 추종자들을 출교시켰고, 노바티안은 발레리안의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도나투스파는 411년에 열린 신학 논쟁 이후 세력이 약화되면서 7세기에 소멸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우리는 회개자들을 포용하기를 힘써야 한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맡겨드려야 한다.

좀더 말하자면 교회의 성결을 강조하는 바람직하지만, 그로 인한 분파는 된다. 사도들도 항상 완전하면서도 현실적인 교회, 다양한 지역들과 국가들 그리고 다양한 시대에 존재하는 신자들의 모임들이 구체적으로 출현되는 교회의 몸을 염두에 두었지만, 교회가 여전히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회의 기반이 되는 실재의 계시이며 세세토록 수행되어지는 하나님의 모략의 현실화이다.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에 대해 서술하기 전에 1세기부터 어거스틴 이전의 서방교회까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유는 펠라기우스 논쟁 이전까지 구원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와 은혜의 교리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통적인 교회 지도자들 조차도 각기 다른 견해를 가져온데다가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단들의 끊임없는 반론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1세기에는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은혜 교리가 언급되는 글을 찾아볼 없다.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이 은혜 교리에 관심을 갖지 못한 이유를 꼽아 있다.

먼저는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주의적인 전통과 배경에서 산상보훈의 엄격한 윤리적 요청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보다 나은 의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교회에서 행하는 참회를 회개의 은혜라고 하였다. 둘째로는 이와 전혀 다른 방향의 영지주의의 영향을 있다. 영지주의는 4세기 초까지 기독교를 위협하는 사상이었다. 영지주의는 물질을 악으로 보는 이원론적 사상이었으므로, 교부들은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변증하였다. 그리고 지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영지주의의 논의에 대항하여 사람은 선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과 윤리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밖에 고대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과 짝해서는 되고 멀리해야 하며 금욕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반 종교적인 구원 이해를 별로 벗어나지 못한 데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은혜 교리를 영지주의의 영향 때문에 철학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 삼위일체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 간의 긴장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은혜 교리도 이러한 테두리에서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능력의 일이 하나님의 경륜, 구원 사역이라고 한다. 때문에 초대 교부들의 은혜 교리를 면밀히 이해하려면 창조와 구원 사이의 구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사람 아담과 하와는 계속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물질세계에 정신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형상의 은혜를 박탈당하여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본성이 무지와 우상 숭배로 실추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사람이 몸의 불사(不死)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불사는 그대로 보유하며 자신의 의지도 자유롭게 유지한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져 없어지는 것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말씀을 활용하여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먼지로 뒤덮인 그럼처럼 되었으나 형편없이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담의 죄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거나 혹은 도덕적인 정죄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4세기 동방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 이전의 서방 교회에서는 인간의 초기 상태는 초자연적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죄를 범한 것은 그의 영혼이었으나 범죄 행위가 육체도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가 안에 거하게 되었으며, 몸을 죄의 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죄는 아담과의 연합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본다.

암브로시우스는 은혜가 공로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주시는 이의 뜻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며, 기독신자가 되겠다는 결정은 하나님에 의하여 미리 준비된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거룩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빅토리아누스 역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까지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이해가 그러한 서방의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있다.

동방과 서방의 이러한 차이점은 서방의 전통이 헬라 철학이나 동방의 신비 종교 율법주의적인 유대교의 영향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방이 형이상학적 사색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방에서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인간과 구원에 대한 교리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 당시에 바울 서신의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인간론 중심의 은혜 교리가 발전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교리의 합의점에 다다름과 동시에 대립을 나타내는 부분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간의 논쟁을 통해 잘못 이해해왔던 바를 바로잡도록 하셨고, 체계적으로 교리를 다듬어 갈수 있도록 하셨다. 이단들을 통해서 전통적인 교리를 확립해나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제 남은 구원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와 은혜의 교리의 상관관계이다. 또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간의 논쟁을 통해 명확한 답이 내려지게 하셨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견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펠라기우스는 도덕주의자로서 인간성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혐오하였다. 인간은 어쩔 없이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견해는 창조의 원리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동방 신학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말을 하였다. ,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이성과 자유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창조의 은사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주적인 양육과정에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계명과 언약과 교육, 그리고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참회록에서 말하는 당신께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라는 기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면 인간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이에 반발하여 그의 신학 사상의 핵심이 되고 있는 무조건적인 자유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심어 주신 죄짓지 않는 가능성을 비롯하여, 영원한 상급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율법의 계시,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모범적인 행위 등이 은혜라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원한다면, 죄를 짓는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행할 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는 한층 과격하게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다. 아담은 창조될 때부터 그가 죄를 범한 사실과는 관계없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원죄를 강력히 부인하면서 아이들이 세례를 받지 않아도 영생을 얻을 있다고 말하며, 은혜와 자유의지가 양립할 없는 개념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완전한 자유를 향유한다고 한다. 결국 켈레스티우스는 412 카르타고에서 정죄를 받았으며, 416년에는 카르타고와 밀레붐에서, 그리고 418 카르타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대회에서 정죄를 받았다. 렐라기우스의 사상은 431 7 22 에베소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파문되었다.

어거스틴이 서방을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은혜의 교리를 말하게 데에는 가지로 배경을 있다. 로마나 동방과는 대조적으로 북아프리카에는 일찍이 원죄 사상이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점에서 어거스틴은 첫째로 터툴리안의 원죄론을 유산으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북아프리카에는 이미 죄로 물든 인간의 성품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는 은혜를 논할 없게 되어 있었다. 죄로 물든 인간의 성품이라는 개념은 인간 안에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도 다를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행해지는 우주적인 교육의 고정을 통하여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동방 신학과도 다르다. 둘째로 어거스틴은 자신이 철학과 마니교에 탐닉했던 ,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육의 정육을 이길 없었던 , 인간의 부패성과 죄에 대한 자신의 무능함을 통감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은혜의 교리를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성경 공부를 통하여, 특히 바울 서신의 연구를 통하여 은혜의 교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로 인간의 성품이 손상되고 타락하게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함으로 인해 아담이 향유하던 자유를, 죄를 피할 있으며 선을 행할 있는 자유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점이 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을 선택할 있는 권리로 이해하고 있음을 있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의 자유의지로는 삶에서 당면하는 유혹들을 극복할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일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동하시는, 내적이며 신비한 능력이다. 그것은 놀라운 능력이어서 필설로 표현할 없는 것이라고 한다.

예정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두고 어거스틴은 단계로 해결책을 말한다. 첫째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임의로 선택할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실제로는 정욕으로 대기 속에서 숨을 쉬고 있으므로 죄를 택할 뿐이라고 한다. 둘째로, 어거스틴은 우리의 의지에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불가항력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모든 인간의 의지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전제한다. 셋째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와 자유를 구별한다. 자유는 선한 일을 하는 자유의지며, 죄와 유혹에서 해방된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람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의 역사는 시대의 교리적인 지식을 거점으로 하여 성경의 진리를 보다 새롭고 풍부하게 발견해온 역사이다. 기독교 교리의 역사는 헬레니즘적인 견해나 편견과 주변의 종교적인 견해를 제거하고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고 밝히 드러내려는 과정의 역사이다. 이는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서도 밝혀진다. 지금껏 불분명했던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가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 모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요 은혜로 되어졌다는 명백해졌다.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이요,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름이니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참고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으로 보고, 성경적 세계관은 예정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금껏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기독교 세계관 보다는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야 한다는 결론도 내려보게 된다.

 

 

참회록

어거스틴은 경건한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오류와 악의 길로 빗나가 오랫동안 이단과 회의주의의 미로를 헤맸으나, 마음은 안식을 몰랐고 하나님께 대한 향수에 괴로워했다. 마침내 서른세 살이 되었을 (386 9) 아프리카 고향집에서 멀리 떨어진 밀라노 근처의 어느 정원에서 영혼의 열기가 이상 주체할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그때 성령꼐서는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와 안토니우스의 수행과 키케로와 플라톤, 이사야와 바울에 대한 공부를 사용하셔서 실로 굉장하지는 않지만 사도 바울이 겪었던 것과 같은 진실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셨다. 어거스틴은 재에 앉은 심정으로 회개하고 구원 문제를 놓고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을 갑자기 하늘에서 다정한 음성이 들리기를 집어들어 읽으라, 집어들어 읽으라!” 하였다. 성경을 펴니 바울의 권고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음성에 순종했고, 삶의 방향을 철저히 바꾸었으며, 결과 당대의 가장 뛰어나고 유익한 교사가 되었다.

 

어거스틴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의 열심과 도나투스의 분파 운동에 대한 교훈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열심에서 확실하게 배운 사람에 대해 세우신 바는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께 설득 당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조상이라 하셨듯이 오랜 세월을 방탕하게 살고 이단에 빠져 있었던 어거스틴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셨기에, 지난 날을 뉘우치고 기독교 정통교리의 초석을 다지는데 쓰임을 받아 기독교 역사에서 루터와 칼빈과 함께 손꼽히는 자가 되도록 이끄셨다. 유진 포탈리(Eugene Portalie) 기술하기를, “고백론 영혼 속에 체험된 것으로서의 신학이요, 하나님이 개인 속에서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도성 인간의 역사 체계 속에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신학이며,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했는데, 참으로 적합한 말이다. 어거스틴의 삶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보여준다. 더구나 이는 개인적인 사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거스틴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인격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며, 대상의 이름이 하나님께 알려진 구체적인 인류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를 형성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선택의 목적은 유기적 조직체의 창조, 하나님의 위대성을 선포하고 이마에 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거듭난 인류의 구속이요 갱생이요 영화이다. 하나님이 시간 내에서 선택을 실행하실 , 하나님은 오직 은혜언약을 통해서만 일을 수행했으며, 또한 하나님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독립되어 있는 개인을 언약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 안에서 가정과 세대를 동시에 부르신다.

어거스틴의 인생에서 도나투스의 분파 운동에 대한 교훈이 떠오른다고 함은 불신자와 이교도들을 포함한 어떤 죄인이라도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백성들을 향한 계획에 맞추어 이끄신다. 누가 알았겠는가! 어거스틴이 회심하여 귀한 일들을 감당하게 될지를!

 

 

하나님이 도성

어거스틴이 그의 대작 하나님이 도성 쓰게 동기는 로마가 패망하게 되자 사람들이 기독교와 관련 지어 던진 질문에 답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비기독교인들은 로마가 옛날 신들의 보호 하에서 동안이나 안전했는데 기독교의 신은 어떻게 로마를 지키지 못하는 것인가 의문하면서, 로마 제국을 보호하던 신들을 버렸기 때문에 로마가 재앙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기독교의 신은 이교의 신이어서 로마를 지키지 못하며, 또한 로마는 로마제국을 지키는 신을 버린 대가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며 로마가 재앙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와중 410 고트족의 왕인 알라리크(Alaric) 군대를 이끌고 와서 로마시() 함락하면서 이러한 설명이나 주장들은 더욱 탄력을 받고 분명한 근거를 제시 받는 하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거스틴은 이러한 주장이나 의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변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의문이나 문제제기는 사실 불신자들이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제국을 기독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마치 메시아 왕국의 실현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로마의 패망은 도저히 이해할 없었던 것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자세하게 변증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413년부터 427년까지 로마가 패망하게 위기 상황에서 로마의 국교가 되고 있는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심혈을 쏟았다. 하나님이 도성에서 그는 로마의 다신교 신앙을 논박하며, 종말의 문제, 창조, 시간과 영원 등의 문제를 두고 그리스 철학을 신플라톤적인 견지에서 비판함과 동시에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변증한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신이시요, 밖에 모든 신들은 로마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루 없는 잡신일 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상의 모든 제국들과 문명들의 성쇠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며, 로마가 기독교적인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야만족들의 침공으로 인한 혼돈과 멸망에서 면제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의 이해(利害)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평화와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능을 다해야 하는 것이지만, 제국을 공략하는 야만족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도성에 ()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목적은 현세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지상의 국가가 외적인 공격이나 내적인 붕괴를 막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예정론에 근거하여 교회를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의 공동체(communio praedestinatorum)라고 한다. 그는 간혹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구원으로 예정하실 있다는 말을 하지만, 구원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교부 키프리아스의 전통을 철저히 따른다.

이미 약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도성은 어거스틴이 410 야만인들이 로마를 침공하고 약탈함으로써 기독교의 도성 로마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것이다. 내용은 어거스틴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찰하면서 기술하는데, 크게는 부분으로 구분될 있다. 먼저 전반부인 1권에서 10권까지는 이교도에 대한 반론을 적고 있으며, 후반부인 11권에서 22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의 관계를 적고 있다.

후반부인 11-22권의 12권에서는 도성에 관하여 서술한다. 먼저 11-14권에서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의 기원과 종국에 관하여 설명하는데, 여기서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중요한 전제를 먼저 밝힌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없다는 것과 정경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간에 대한 설명과 죽음 종국에 대한 변증을 하고 있다. 15-18권에서는 어거스틴이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이러한 전제를 기초로 하여 도성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설명한다. 먼저 세상의 도성은 자신의 동생을 살해한 가인을 시조(始祖) 말하고, 이에 반하여 하늘의 도성은 지상에서 은총을 통해 순례자의 삶을 살다가 후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늘나라의 시민이 아벨을 시조로 말한다. 어거스틴의 설명은 나아가 아벨이 지상에서는 이방인이었으나, 동시에 하나님의 도성도 세상에 대해서는 이방인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세상의 도성에 있어서 시조인 가인은 세상에 도성을 세웠으나, 아벨은 도성을 세우지 않았다. (중략) 세상의 도성은 그리스도 이전에 이방왕국들의 발자취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반면에 하나님의 도성은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의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19-22권에서는 그들의 마지막 운명에 간하여 논한다. 성도들은 비록 여기에서는 땅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순례자로 사는 것이며, 육신이 부활할 때에 하늘의 도성은 나라의 시민들을 그곳으로 불러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일이 있을 근거는 바로 창조주의 전능하심으로 돌린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 대조하여 비교한다. 그러나 지상의 어느 사회나 공동체도 도성에 일치하는 것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도성 자체는 아니고 하나님의 도성을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교회의 지체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도성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술에 있어서 먼저 어거스틴은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오직 역사를 살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질문자들을 향하여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하기 이전의 시대가 결코 소위 말하는 황금시대 아닌 것을 먼저 역사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로마가 아무리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제국이라도 그것이 결코 메시아 왕국과는 무관하며,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것이 이민족 혹은 야만족의 침입이나 멸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있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제국인 로마의 이해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먼저 제시한다. 그래서 로마를 공격하는 야만족이 하나님의 공격하는 적으로 보는 도식적인 구조를 벗어나 야만족 가운데도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가 있고, 심지어 로마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적인 사람들이 있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며, 인간의 진정한 목적은 현세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전체적인 구성을 요약하자면, 지상 나라는 망하지만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영구불변하다는 것을 변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 나라의 관계를 역사신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전체 역사를 시작점에서부터 종국에 이르는 시간까지 도성,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를 분석하며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새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 어거스틴에 있어서 도성의 분석과 이해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역사와 문화에 제반 현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특징으로 보인다. 그는 정경으로 인정된 성경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설계 세부사항과 연관이 있는 정보를 얻을 있는 주요자원이라고 확신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이에 대해 마티누스 버스펠드(Marthinus Versfeld) A Guide to the City of God에서 만일 역사의 의미가 섭리적 계획 속에서만 발견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신적인 생명과 의지에 관해 우리에게 부여한 계시를 통해 우리를 그의 계획에로 끌어들이지 않는 역사의 의미는 영원히 우리에게 닫혀져 있게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성경에 기초를 두고 도성을 설명하며, 저술작업에 있어 인간적인 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처럼 자주 요청하고 있는 이유이다.”이라 했다. 어거스틴은 그의 성경적인 배경을 힘입어 역사에 대해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이상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신화적인 언어로만 묘사할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과 상상적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하는 실제적으로 현존하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이 성경의 정경을 계시된 진리로 믿는 그에게는 이상향적인 요소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신학이나 역사 그리고 여러 문제들을 변증함에 있어서 철학을 사용한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대신 판단이나 이해의 기준도 지성에 대한 신적인 조명을 말하며, 이것이 자신의 평가의 근거임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는 제반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에 비견되는 손상당한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그것이 바르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다. 이에 대해 고든 링컨 키이스(Gordon Lincoln Keyes) Christian Faith and the Interpretation of History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어떤 선험적인(a priori)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전제들은 역사적 증거에 대한 그의 자세와 역사과정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 양면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 전제들은 믿음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만, 모든 것들이 전제들을 부양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 () 문학이 좋건 싫건 간에 한결 같이 원형적 전제들의 그럴듯함을 증거하도록 강요를 받는다.”라고 했다.

역사의 과정은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도성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도성은 없을 정도로 안에 뒤섞여 있지만, 도성의 일원들은 최종의 만족으로 추구하는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 그들이 자신을 위해 향유하기 원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관심이 달려 있는 대상에 따라 구분이 된다. 하늘의 시민들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것도 궁극적인 헌신의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상의 도성에 속한 시민들은 보다 저급한 (Good) 좋아한다. 다시 말해서 도성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상이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성에 관한 설명을 통하여 진정한 구분은 외적이거나 정치적인 기준에 의하여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기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함을 언급한다. (중략) 따라서 어거스틴의 주장의 핵심은 진정한 나라는 눈에 보이는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어거스틴은 역사 눈에 보이는 역사나 그것을 넘어선 역사를 계시에 비추어 이해하는데, 모든 상황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

역사를 취급함에 있어서 어거스틴 당시의 역사이해와 비교할 , 분명한 차이점은 순환적인 역사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셨으며, 창조하셨으므로 공간과 시간이 있게 되었다. 영원은 오리겐이 말하는 에이온 끝없는 연속이 아니고, 연속 혹은 연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며, 영원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속하는 전적으로 단순하며 불변하는 현재이다. 역사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목표점을 향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과정은 하나님의 의지와 예정대로 전진해나가며, 동시에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우주는 완전하며, 창조된 모든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으며, 그렇게 역사와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조화된 우주의 과정을 거쳐 예정된 목적지로 반드시 인도될 것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침공도 로마가 이민족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도,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섭리되고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역사이해는 방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간단하게 신학적인 용어로 예정이라고 있다.

교회란 잠정적으로 순례자며 육신이 다시 부활 때까지 완전히 하나님의 도성과 통합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교회 자체는 도성이 혼동되어 있는 무대이다.

하나님이 의도한 창조의 완성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다. 교회는 잠정적인 제도이다. 세상 속에 독특하게 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의 이중성은 단지 종말론적인 나라에서만 없어지게 것이다. 현시대 또는 마지막 시대에 교회는 주님과 다가오는 그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 속에 존재해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살아가며 체험하는 격변의 시기 혹은 험난한 역사의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기술하였다. 당시의 많은 신자들 혹은 불신자들마저도 로마제국 흥망성회에 대하여 고민하고 관심 가지고 의문을 제기하던 현실속에서, 어거스틴은 유한한 로마의 기원과 성장 그리고 발전과 패망을 보면서도, 시작을 유한한 세상에만 그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립 샤프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하직을 고하던 이교의 세계 제국에게 던지는 장엄한 조사(弔辭)이며, 다가오는 기독교의 세계 질서를 맞이하는 숭고한 환영사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보는 역사의 특징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경륜을 이루는 것으로 알파 포인트(alpha point)에서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간다.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이를 구속사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하나님은 소명과 순종의 왕복과정을 따라 그의 구원의 드라마를 이끌어가신다고 보았다. 뢰비트는 이것을 단선적인 하나님의 중심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이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충격적인 로마의 패망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최고조로 달했을 어거스틴은 사건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고, ‘하나님의 도성 악마의 도성 대조하면서 지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삶의 자세를 제시해주었다. 때문에 학자들은 하나님의 도성 두고 역사신학이라고도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유진 포탈리가 하나님의 도성 인간의 역사 체계 속에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신학이며,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상기해본다면 충분히 공감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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