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이번 학기 연구주제로 삼은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는다. 포로귀환 이후 에스겔과 스가랴가 목자 모티프를 사용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솔직히, 내가 요한복음의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박사학위 취득의 용이함 때문이다. 내 신학석사 논문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에서 참신한 해석적 가능성을 개진했으므로,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에서 내 전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거라고 예상했다. 목자 모티프란 주제 하나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라는 두 분야에 숫가락을 얹을 수 있는 기회는 덤으로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연구를 진행하고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한때 내 관심사가 포로기 신학이었다는 사실말이다. 당시에는 포로기 시대를 거쳐 묵시문학이 발현되므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차후 방향설정에 도움이 될거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석사 과정에서는 신약 내 묵시문학으로 간주되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내 관심사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스가랴 9-14장은 구약 내 묵시문학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14장에 집중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의 심령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포로기에 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반복적으로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 쓰인 구약성경과 목자 모티프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목자 모티프야말로 예언자들의 심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수단이자 독자들을 설득하는 강력한 언어였던거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포로기 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왜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는듯 하다. 지금껏 나는 내 연구와 포로기 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칫 '우연' 혹은 '편의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끊임 없이 나에게 역사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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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성서학의 주요 기류 중 하나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강조이다. 구약성경이라면 고대근동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고, 신약성경이라면 구약성경과 중간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러한 기류의 영향으로 신약연구의 경우 "신약의 구약사용"이란 방법론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방법론은 이전과 달리 본문을 해석할 때 비슷한 구절들을 서로 엮는게 아니라 해당 본문이 어느 전통을 따랐는지 파헤치는데 치중하는 풍토이다. 가령, 내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참고했던 Marko Jauhiainen의 The Use of Zechariah in Revelation, WUNT Ⅱ 199 (Tübingen: Mohr Siebeck, 2005)이나 지금 요한복음을 연구하며 분석하고 있는 Brian Neil Peterson의 John’s Use of Ezekiel: Understanding the Unique Perspective of the Fourth Gospel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15)이 이에 해당한다. 내가 짐작컨데 이 방법론이 주목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도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혹자 중에 이 용어에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이 방법론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조만간 대세에서 밀려날거라 짐작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때는 몇 십년 동안 더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 더구나 내가 짧은 기간 동안 "신약의 구약사용", 더 정확히는 "상호본문성"이란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연구자들의 빈틈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결함들을 비판하고 보완할 대안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출간된 연구가 모두 연구자들의 피와 땀이 묻어난 결과물이기에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무오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해석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성경을 연구할 때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현대독자들 보다 구약성경에 더 정통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성경 중 어느 본문이라도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구약성경 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현대독자들은 특정 본문에 치중하지 말고 다양한 해석적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비슷한 단락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말고, 저자가 치열하게 고민했을 그 본문이 무엇인지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그 결과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독창적 해석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해석자들은 저자들이 거쳤을 고뇌의 흔적과 씨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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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날드 클레멘츠의 글을 인용해서 선지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Probably such a political possibility could not readily have been envisaged; a popular democracy was not then a recognized ideal in Israel. Instead, the full weight of responsibility is placed by Israel's prophets on the institution of kingship—and by implication on all related offices of public leadership—as a form of commitment and service for the benefit of others. - Clements, Ezekiel, 155-6.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중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언급은 시대착오적이다. 그 당시 대중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생성되어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므로, 클레멘츠의 진술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선지자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타당하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조 체제라 하더라도 선지자는 왕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 그 앞에 서서 그들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적용해보면, 목회자들은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제사장 역할만 부각시키고 선지자의 책무는 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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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클레멘츠(Ronald E. Clements)는 자신의 『에스겔』 주석에서, 다윗 왕조의 몰락 이후 다시 등장하는 다윗 계열의 왕조에 대해 주해하면서 대중민주주의(a popular democracy)를 언급한다.
Probably such a political possibility could not readily have been envisaged; a popular democracy was not then a recognized ideal in Israel. Instead, the full weight of responsibility is placed by Israel's prophets on the institution of kingship—and by implication on all related offices of public leadership—as a form of commitment and service for the benefit of others. - Clements, Ezekiel, 155-6.
비단 고대 이스라엘 시대만이 아니라 중세시대에도 왕권신수설처럼 왕의 권한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다. 이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만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강력한 권력이 민중들을 압박해온 탓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단순히 특정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탓의 탓이 더 큰 문제로 작용할 때가 많다. 엄밀히 말해서, 체계(system)가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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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가 다윗 왕조의 멸망을 경험한 세대들에게 목자 모티프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선포하는 이유를 고민해 보게 된다. 스가랴의 목자 모티프를 통해 절망 속에 한 줄기의 희망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절규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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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emains, however, an incomplete account of Ezekiel’s picture of the new Israel, for God’s people are once more to be led by a monarch. -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Ⅱ: The Theology of Israel’s Prophetic Traditions, Translated by D. M. G. Stalker (New York: Harper & Row, 1965) 235.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한 에스겔의 그림이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번 더 왕조의 통치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이스라엘 본토로 복귀한 선지자 에스겔은 목자 모티프(34장)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비록 목자 모티프를 통해 야웨께서 이상적인 목자가 되신다는 희망적인 선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바벨론 포로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야웨의 회복을 말해야 할 때 그는 그야말로 처참한 심경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거 같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 받는 다윗 조차도 궁극적인 왕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왕조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한계성을 절감했을 때 에스겔이 느꼈을 참담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거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은 얼마나 절실했을지 생각하면 내 가슴이 울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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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4장에서 다윗 언약 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다. 여러 학자들이 시내산 언약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다윗 언약 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주장한 경우는 없었다.


Twice, however, Ezekiel took up the topic of the Messiah directly. In Ezek. XXXIV. 23-4 a shepherd is mentioned whom God is to set over his people, his “servant David,” and in Ezek. XXXVII. 25ff. the prophet again speaks in exactly the same way of the shepherd, the servant David, who is to rule over “Judah and Joseph,” now finally reunited as one nation. There is, of course, no mistaking the fact that in Ezekiel also the topic of the Messiah and the traditional concepts specific to it are not altogether properly drawn. He is strangely unable to expound the Davidic tradition. One looks in vain in Ezekiel for an exposition of the subjects connected with it: instead, in both passages he glides into the wording of the Exodus covenant tradition. In Ezek. XXXIV. 23f. the formula belonging to the Sinai covenant-I their God, they my people-follows upon the heels of what is said about the Messianic advent of the king, and in Ezek. XXXVII. 23 it immediately precedes it. How then is the covenant concept which appears in both places to be understoo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history of tradition? Is it a renewal of the covenant with David, or of the Sinai covenant? Undoubtedly the latter. We have just seen how little Ezekiel expounds the once-widespread Messianic-Davidic tradition. Thus Ezekiel fuses the Sinai tradition and the David tradition which Jeremiah still kept essentially separate. But the Sinai tradition dominates his thought-under the new David, Israel will obey the commandments (Ezek. xxxw. 24). -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2,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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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은 목자 모티프를 사용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더나아가 스가랴는 에스겔의 의도에 초막절 모티프를 더하여, 그 의미를 강화하는 동시에 성전 신학을 굳건하게 다졌다. Crag R. Koester의 『The Dwelling of God』이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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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에스겔이 목자 모티프를 통해 선포하고 싶었던 내용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Then, however, a final expansion makes it quite indubitably clear how much God’s desire for salvation really means the complete deliverance of his people, a deliverance in which those who hunger and thirst will be satisfied (Lk 6:21; Mt 5:6), those who are in danger of losing their peace receive “peace on earth” (Lk 2:14; Jn 16:33) and in which every heavy yoke of constraint and enslavement is done away (Jn 8:36). In the removal of all shame, God’s people will find their full glory (Jn 17:22). In all this, however, there is no question of the establishment of human dominion, but of the event in which God reveals himself as the God of his people. “Your God—among you.” Such a future is proclaimed to God’s people by his prophet.-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Translated by James D. Marti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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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연구방법론으로 상호본문성(혹은 신약의 구약 사용)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신약학 전공인데도 구약 본문을 자주 본다. 이번 학기에는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14장이 그 대상이다.

나는 상호본문성이란 방법론을 신약 본문의 저자가 인용(quotation)했다는 단서를 남겨두지 않았으나, 인유(allusion)했거나 반향(echo)했다는 추정할 수 있는 특정 본문이 무엇인지 분별하는데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목적에 맞추어 본문을 연구하다 보니, 저자의 의도와 상관 없이 언급되는 본문들이 남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실제 저자가 어느 본문을 염두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수 많은 연구자들이 A라는 본문을 연구할 때 B라는 본문이 떠오른다고 해서, 마치 실제 저자 역시 그랬을거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학기의 연구에서는 요한복음 10:1-18에서 에스겔 34장을 언급하는 경우를 지적할 예정이다. 이와 반대로 구약 학자가 신약 구절을 언급하는 경우도 자주 발견하는데, 이러한 접근은 지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구약 저자는 신약 구절들을 모른다. 그리고 신약 본문이 해당 구약 본문을 염두에 두었다는 가정하고 싶다면, 그 근거를 밝혀야 한다.

신약학 전공자인데 구약본문과 씨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니, 가끔은 내가 구약학 전공자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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