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상호본문성의 한계

성찰 2018. 5. 29. 10:21

상호본문성(intertextuality)은 저자의 의도 보다는 독자들의 반응에 중점을 두고 본문을 해석하는 독자반응비평과 비슷한 방식으로 남용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가령, 특정 본문을 읽고 연상되는 본문들이 있다면, 독자는 저자의 의도는 검토하지 않은체 자신의 이해대로 둘 사이를 연결해서 해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오늘날 제멋대로 성경본문들을 연결해서 설교하는 목사들을 연상하면 된다. 다행히도, 현대 성서학자들은 상호본문성을 저자의 의도와 동시대 독자들의 이해를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현대인들은 저자의 의도와 동시대 독자들의 이해를 분석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보다 더 나은 해석을 이끌려 내려는 시도는 자제할 줄 아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더 완전한 의미"(sensus plenior)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

Audacity

언어공부 2018. 5. 24. 06:11

듣기 영역(listening part) 공부를 위해서 오디오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토플 공부를 위해 다녔던 어학원에서는 강사가 사운드포지(Sound Forge)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음악 재생 프로그램은 청취 중심이라서 구간 반복 재생을 위한 구간 설정이 쉽지 않은데, 사운드포지와 같은 오디오 편집 프로그램은 이러한 기능이 탁월하다. 사운드포지가 유명하지만 유료라서 구매 비용이 제법 비싸고, 최근 들어 제작사에서 해당 제품을 단종시키고 다른 브랜드를 출시한 모양이다.

최근에 Audacity라는 프로그램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무료이고 기능이 뛰어나서 팟캐스트 편집용으로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나는 어학 시험 준비용으로 사용하련다.


Audacity

https://www.audacityteam.org

,

미가서를 훑어보니 대략 네 군데 정도 목자 은유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다윗 계열의 구원자 사상(Davidic messianism)과 목자-왕 은유(Shepherd-King metaphor)가 동시에 나타나는 본문은 5장 1-5절이다. 


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3.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보통 선지자들은 다윗 계열의 새로운 왕을 예루살렘과 연결하는데,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향해 예언을 선포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윗의 출생 장소가 베들레헴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라는 표현에서 미가는 목자와 군왕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선지자 미가는 주전 722년 사마리아의 멸망 전 앗수르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스가랴 9-14장의 저자는 아마 주전 500년 전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두 본문은 국가의 멸망 이전의 위기와 이후의 처참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스가랴 9-14장은 묵시적 언어가 사용되어 있는데, 당시 묵시주의자들은 현재 악한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읽어버렸다. 그들은 우주적인 전쟁, 즉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 - 랄프 스미스, 미가-말라기, 13-4.


미가 2-5장과 스가랴 9-14장은 모두 목자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황에서 목자 은유가 사용된 목적은 무엇일까?

,

벌써 칼빈신학교에서 3학기를 마쳤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이후로 방학을 맞이하고 있지만, 오늘 도서관 개인열람석을 비워줌으로서 진정한 휴식을 맞이하고 있다. 당분간 강제 휴무.


이제 다음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하게 된다. 이 말은 곧 박사 진학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재로서는 연말에 OPT를 신청해서 진학 준비에 전념하고, 지금은 성적과 추천서를 위해서 학업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매 학기마다 욕심 만큼 공부하지는 못하지만, 다행히 이번 학기에는 자율연구를 통해 소정의 성과를 거두었다. 지도교수인 게리 버지 박사는 내 연구에 만족하는 분위기이고, 지난 학기에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나중에 추천서를 요청하면 잘 써주실거 같다. 무엇보다, 내 예상대로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담화'는 박사과정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번 연구로 샘플페이퍼는 준비된 셈이고 앞으로 연구제안서 준비는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다음 학기에는 구약에 나타난 목자 모티프를 중점적으로 연구할 계획인데,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면 박사 과정에서 시간을 아낄 수 있겠다는 예상이 든다.


문제는 영어성적이다. 내가 희망하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성적은 최소 토플 100/아이엘츠 7.0 혹은 토플 110/아이엘츠 7.5이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박사과정 요구조건으로 최소 토플 100/아이엘츠 7.0을 요구하니, 당연히 그 정도는 충족시켜야겠지만, 토플시험으로 고생을 좀 해본 입장에서는 걱정이 된다. 리딩은 그렇게 오래 공부했는데 고득점이 쉽지 않고, 리스닝은 반복해서 들어도 잘 안 들리기는 마찬가지이고, 스피킹은 예상한 질문이 나와도 버벅거리고, 라이팅은 한두 문장에서 실수하면 바로 아웃 오브 토픽이다. 쩝. 현 상황에서는 영어성적이 박사과정 진학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작년에 몇몇 학교에 진학 문의를 해봤는데, 담당자들로부터 내가 미국 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고, 이미 신학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지원하거나 앞으로 영어성적이 웨이브될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히 보장할 수는 없다는 답변을 받았었다. 그러니 내가 지도교수로 문의하게 될 교수들이 나에게 영어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한, 무조건 점수를 내야 한다. 이번 여름 방학에 영어 시험 공부를 할건데 올해 안이나 내년 초에 성적이 나와주면 환상적인 시나리오이다.


주변에서는 연구제안서와 영어성적으로 고전분투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내 경우는 수월한 편이긴 한데, 시험이 나한테는 쥐약이라 걱정이 앞선다. 남들 보기에는 "준비된 신약학자"인데 그들이 내 속을 알랑가 몰라.

,

도서관과 학교 수준

끄적 2018. 5. 18. 10:34

솔직히 웨신대 시절에는 도서관 이용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우선 내가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어서 공부하러 도서관에 갈 일이 없었다. 학교 규모가 작아서 도서관 내 서적 보유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M.Div.와 Th.M.까지 공부하는데 큰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도서관에 필요한 자료가 없으면 주변에 위치한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을 이용하면 되었다. 그곳에 가면 국내 성서학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감사하게도 성서학 분야만큼은 교수진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세계 정상급 수준의 신진학자들을 통해 최신 경향의 방법론들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도 본문비평, 내러티브 비평, 텍스트언어학 등 당시에는 생소한 방법론들을 터득한 신진학자들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 이 부분은 해외 유학을 나온 지금도 경쟁력이 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국내 학자들의 역량이 왠만한 영미권 학자들 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칼빈신학교 학생은 칼빈대학 헤크만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다. 관내 지역에서는 나름 규모가 있는 학교로 평가 받고 있고, 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사용자 입장에서 불편함이 없다. 다만 성서학 박사과정이 없어서 인지 내가 필요한 책들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럴 경우 미시간 내 타 도서관 자료들을 대여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자주 기분이 나쁜데, 내가 타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책들 대부분이 제칠일안식교 학교 도서관 소유이다. 미국에서는 제칠일안식교가 이단 혹은 사이비가 아니라고 하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다.


요새 자주 하는 생각 중 하나가 도서관과 학교 수준의 상관성이다. 내 생각에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 있을 수록 학교 수준도 높다. 교수진의 역량이 뛰어날 수록 학생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높기 마련이고, 교수들의 연구활동과 학생들의 학업을 위해서는 장서 보유량이나 관련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다. 학교가 높은 학문적 수준을 유지하려면 교수 확보와 도서관 관리에 전념해야 하는 구조이다. 신학교는 신학 노선을 최우선 순위에 두기 때문에 도서관 관리에 신경을 못 쓰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나는 책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요즘 들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학생이 교내 도서관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그 학교의 수준이다. 즉 학생들이 책 구입에 돈을 안 쓰게 하는 학교가 좋은 학교이다.

,
최근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의 목자 은유(shepherd methaphor)가 나타나는 본문은 3-4곳 정도이다.

◎Anthony R. Petterson (10:1–11:3; 11:4–17; 13:7–9)
◎Joseph Blenkinsopp (11:4–17; 12:10–14; 13:7–9)
◎Kelly D. Liebengood (9:9–10; 11:4–14; 12:10; 13:7)
◎Mark J. Boda (10:1–3; 11:1–3, 17; 13:7–9)
◎Paul L. Redditt (10:2–3a; 11:3, 4–16[17]; 13:7)
◎Young-Sam Chae (9:9–15; 10:1–6; 11:4–17; 12:6–14; 13:1–9)

학자들마다 목자 은유에 대한 견해는 조금씩 다르지만, 스가랴 9-14장의 주제가 심판과 회복이며, 그 중심에는 목자 은유가 있다는데 다들 동의한다. 특히, 11장의 목자의 두 막대기 상징 행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는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나는 기존 견해 보다 더 나아가서 9-14장 전체에 걸쳐 목자 은유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데, 그 단서가 스가랴가 목자 은유를 사용할 때 꼭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데 착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고대근동에서 오랫 동안 목자가 왕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주목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은 목자이고, 목자는 왕이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목자-왕'(Shepherd-king)이라고 한다. 주변 국가에서는 이 용어를 왕에게 적용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일차적으로 야웨에게 적용했고, 그 다음으로 왕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이러한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다. 현세의 왕은 야웨의 대리인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고대근동에서 왕의 주요임무 중 하나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판은 정의 실현의 방편이다. 스가랴 9장의 시작은 이방 국가들을 향한 심판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여호와의 전쟁(Divine Warrior)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경우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큰 그림을 놓치기 쉽다. 대신에 왕의 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스가랴 9장은 처음부터 목자-왕 은유로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4장의 야웨의 날 역시 동일하게 목자-왕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9절의 왕의 등극 선언은 14장 전체의 핵심이자 목자-왕 은유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방국가들을 향한 초막절 준수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열방통치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스가랴서가 마무리 된다.

이렇듯 고대근동의 목자-왕 은유를 염두에 두고 9-14장을 읽으면, 선지자 스가랴가 꿈꾸었던 그리고 전하고자 했던 심상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책 읽다가 스가랴 9장의 도입부부터 목자-왕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는 글을 쓰다니, 아닌 밤 중에 홍두깨인가 신령한 은사인가.


,

에스겔이 지역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다. 


"After the fall of the city Jerusalem is never again mentioned by name. The oracles of salvation and restoration scrupulously avoid mention of Jerusalem, and marital and sexual imagery is entirely absent from the descriptions of Israel’s future.” " - Julie Galambush, Jerusalem in the Book of Ezekiel: The City as Yahweh’s wife, SBL Dissertation Series 130 (Atlanta, GA: Scholars Press, 1992), 145.

"도시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 다시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신탁은 철저히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결혼과 성적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묘사에서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스가랴도 자신의 예언에서 "성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표현이 "하나님의 집"(the LORD's house, 14:20, 21)이다.


에스겔과 스가랴는 자신들이 꿈꾸었던 성전의 재건이 실현되기 전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냈다.

,

[제목] <The shepherd imagery in Zechariah 9-14>

[저자] D. F. O’Kennedy (University of Stellenbosch)

[출처] http://www.scielo.org.za/pdf/ote/v22n2/10.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