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에스라 4서는 3~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에서 목자-양 비유는 단 한 번(5:18) 등장한다.

5:18 Rise up then, and eat bread, and forsake us not, as the shepherd that leaves his flock in the hands of cruel wolves.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는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늑대 무리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목자인 지도자들의 방임은 이방 세력의 침략과 포로기를 가져오게 된다.

이 구절은 늑대가 목자-양 비유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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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목자-양 비유를 살펴보면, 이 비유가 다양한 용례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직분과 위기를 표현할 때 목자-양 비유를 사용하는 사례이다.

이 중 첫 번째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직분을 목자에게 비유한다(17:16).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전통적으로 목자는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이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두 번째로,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양에 빗대어 표현한다(11:19; 12:3).

11: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이러한 두 용례는 목자-양 비유를 전형적인 목자-왕 전승에 한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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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서 목자-양 은유는 총 다섯 번 사용되었다 (5:17; 13:14; 38:12; 40:11; 44:28).

5:17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13:14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각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38: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의 용례는 네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목양의 상태에 따라 다른 상황에 놓인 양 떼의 상황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그린다 (5:17; 13:14). 두 번째는 목자의 장막 이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 즉 성전 파괴를 예고하고 있다 (38:12).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약속이다 (40:11). 네 번째는 이례적인 이방 목자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44:28).

이 같은 용례는 이사야가 목자를 하나님과 왕/지도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데 활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목자-양 은유 혹은 목자-왕 전승의 전형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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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 아래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요한계시록과 연결하는 시도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아래는 그 중 하나의 예이다.

이 예언적인 "만화"는 그 선지자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이었을 것이며 십중팔구 그 묵시로 통합되기 전에 요한 학파의 구성원들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출처]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443.


난 이미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목자 은유를 살펴 본 적이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스가랴 9–14장의 목자-왕 은유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 요한계시록을 배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현 연구에서 후대 자료는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이 나에게 도움만 되는 건 아니다. 특히,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계시록을 인용하는 편이 수월하다. 역으로, 요한복음에서 두 주제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요한복음의 흐름 전개를 아주 치열하게 분석해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

내 추정에 의하면, 요한복음에서 '어린 양'과 목자-왕 전승은 유대 절기라는 또다른 장치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절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데, 과연 내 관찰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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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 사역을 말하는 동시에 차후 요한공동체에 닥쳐올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요한공동체의 수난을 암시할 수 있다.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서 목자-양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과 마찬가지로, 목자의 죽음을 진술하고 있다.

두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초대교회, 좁게는 요한복음의 청중들이 마주하고 있는 수난을 담은 본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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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선한 목자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10:1-21에 이어 10:22-42에도 목자-양 은유가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앞서 강도와 목자의 구분, 목자의 희생 등을 가르치셨고 (1-18절),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분쟁(19-21절)이 벌어졌다. 이 분쟁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확답을 얻고자 질문을 던지고 예수께서 대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2-42절).

유대인의 질문은 "당신이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요한복음은 모세와 율법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윗 계열의 메시아 사상(Davidic messianism)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라는 사상을 통해 군중이 기대하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상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크다. 아마도 이 '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오랫 동안 예언되어 온 다윗의 후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해도 종교 심판을 받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신다(25절). 더나아가 목자-양 은유를 사용해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26-27절).

그리고 다시한번 목자-양 인유를 통해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신다.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시며, 우리는 그를 따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어긋한 대화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 즉 로마로부터 이스라엘 독립을 이룰 군사적 메시아(24절)와 예수의 긍극적인 사역, 즉 영생을 주는 것(28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이 관계로 예수께서 답을 마치신다(28-30절).

여기서 배경으로서 '수전절'(22절)을 이해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절기는 문맥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수전절에 관해서는 구약과 중간기 문헌을 살펴봐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짥막한 인용으로 대신한다.

"수전절의 제정은 제1마카비서 4:59에서 묘사된다. ... 그런데 그것의 목적은 이제 안디옥으로부터의 구출과 성전 예배의 갱신을 기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383).

유대인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사이에 수전절의 기능이 드러난다. 즉 영적 죽음에 놓인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그리고 더이상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 10:22-42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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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한 이유를 자신의 사명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1]예수께서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에스겔 34장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를 연상시킨다.[2]에스겔 34장은 백성들을 향한 의무를 무책임하게 등져버리고 개인의 탐욕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3]즉 에스겔 34장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이 에스겔 34장과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한다.[4]하지만 에스겔 34장은 새출애굽 모티프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5]특히 ‘찾다’라는 의미의 דרשׁ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목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을 나타낸다.[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34),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통해 이 약속을 이루신다.[7]또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비유도 연상시킨다(4, 6).[8] 이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15:4).[9]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10]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15:5).[11]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15:6).[12]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하셔서 하늘의 관점과 기쁨의 강도를 강조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13]이 구절에서 회개에 대한 누가의 이해가 드러난다.[14] 누가복음에서 회개는 중요한 주제로,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3:3, 8; 13:1-5; 15:7, 10; 16:30; 17:3-4; 24:47).[15] 그리고 회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구원자에 의해 이뤄지는 경험이다.[16]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의 사명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준다.[17] 결국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노력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나, 모든 결과는 예수의 사역에 달려있다.[18]예수의 사명과 죄인의 회개에 대한 말씀은 5:31-32를 떠오르게 한다.[19]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5:32).[20] 이 비유에서 건강한 자는 의인과 병든 자는 죄인과 연결된다(5:31-32).[21] 비록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의인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22]오히려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다(특히, 11:37-52).[23]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양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죄인’ 혹은 ‘악인’과 동의어”로 사용된다.[24]하지만, 예수께서는 죄인을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했다.[25]따라서 이 비유는 모든 사람들이 치료의 필요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26]물론 여기서 치료는 육체적인 질병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치료이다.[27]삭개오와 그의 집은 ‘잃어버린 것’에 해당한다.[28] 이 비유에서처럼 삭개오와 그의 집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 가치를 상실한 상태였으나, 예수로 인해 회복되었다.[29] 이 이야기는 청중/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30]삭개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수군거렸던 무리들과 같은 경향의 집단에게는 예수의 사명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도전하게 된다.[31]부자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회심한 부자의 사례를 제공한다.[32] 삭개오 이전에도 부자가 예수께로 나온 경우가 있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33]특히, 부자 관원이 그렇다(18:18-30).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로 약속했고 구원을 받는다. 삭개오를 통해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 Bock, Luke 9:51-24:53, 1523; Tannehill, Luke, 27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2]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OHanlon,Zacchaeus and the Lukan Ethic,18.

[3] Walther Zimmerli, Ezekiel 2: A Commentary on the Book of the Prophet Ezekiel Chapters 25:48,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222.

[4] Tannehill,Luke, 278.

[5] Leslie C. Allen, Ezekiel 20-4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29 (Dallas: Word, 1990) 162.

[6] Allen, Ezekiel 20-48, 162.

[7] Allen, Ezekiel 20-48, 165; Bock, Luke 9:51-24:53, 1523.

[8] Bock, Luke 9:51-24:53, 1523; Marshall, The Gospel of Luke, 698; Tannehill, Luke, 278; OHanlon,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8.

[9] Bock, Luke 9:51-24:53, 1300.

[10] Bock, Luke 9:51-24:53, 1300.

[11] Bock, Luke 9:51-24:53, 1301.

[12] Bock, Luke 9:51-24:53, 1301.

[13] Bock, Luke 9:51-24:53, 1302; Tannehill, Luke, 238.

[14] Tannehill,Luke, 238.

[15] Bock, Luke 1:1-9:50, 499.

[16] Tannehill,Luke, 238.

[17] Tannehill,Luke, 239.

[18] Tannehill,Luke, 278.

[19] Bock, Luke 9:51-24:53, 1302.

[20] Bock, Luke 1:1-9:50, 498; Bock, Luke 9:51-24:53, 1523.

[21] Bock, Luke 1:1-9:50, 498.

[22] Bock, Luke 1:1-9:50, 498; Tannehill, Luke, 238.

[23] Bock, Luke 1:1-9:50, 499; Tannehill, Luke, 238.

[24] Evans, Saint Luke, 664.

[25] Bock, Luke 1:1-9:50, 499.

[26] Bock, Luke 1:1-9:50, 499.

[27] Bock, Luke 1:1-9:50, 498.

[28]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29] OHanlon,The Story of Zacchaeus and the Lukan Ethic, 19.

[30] Tannehill,Luke, 278.

[31] Tannehill,Luke, 278.

[32] Tannehill,Luke, 278-279.

[33] Bock, Luke 9:51-24:5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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