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스가랴가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법 많다. 내 연구 범위에 한정해도, 에스겔의 예언을 스가랴가 발전시킨 흔적들이 발견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제법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스가랴 1-8장이 에스겔 40-48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9-14장의 묵시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가랴 9-14장이 에스겔 34-37장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스가라가 에스겔 전통을 계승한 이유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모두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하는데,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목자-왕 전승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지만, 이사야는 이 은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이외에 여러 면에서 이사야의 독자적인 위치가 눈에 뛴다.

현재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이사야의 역할이다. 분명 요한은 이사야를 잘 알았고 그의 복음서에 이사야를 연상시키는 본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특히, 10장의 선한 목자 담론에서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가르침이 이사야 53장에서 유래했다는 기존 견해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목자-왕 전승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목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나 역시 연구제안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이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의 자기 희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이사야 53장이 아닌 스가랴 9-14장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 나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다. 내 분석에 의하면 스가랴 9-14장 자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자기 희생과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가와 마태의 사례를 통해 그 같은 주장을 개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차후 이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다.

쉽게 말하자면 요한복음 10장이 어느 본문의 영향을 받았는지 밝히려면 이사야, 에스겔, 스가랴를 다루면서 세 선지서 중에서 누가 요한복음과 가장 밀접한지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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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amilton 교수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요한복음에 대한 이사야의 영향"이란 제목의 글이다. 비판할 내용이 많지만, 참고문헌들은 매우 유용해 보인다.


The Influence of Isaiah on the Gospel of John

https://jimhamilton.info/2007/11/19/the-influence-of-isaiah-on-the-gospel-of-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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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eschen, Charles A. "The Death of Jesus in the Gospel of John: Atonement for Si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72. No. 3 (2008): 244-261.


https://media.ctsfw.edu/Text/ViewDetails/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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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연구주제로 삼은 <Reading John 10:1–18 in light of Zechariah 9–14>를 통해 은혜를 많이 받는다. 포로귀환 이후 에스겔과 스가랴가 목자 모티프를 사용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솔직히, 내가 요한복음의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박사학위 취득의 용이함 때문이다. 내 신학석사 논문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에서 참신한 해석적 가능성을 개진했으므로,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에서 내 전제를 증명할 수 있다면, 요한복음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거라고 예상했다. 목자 모티프란 주제 하나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라는 두 분야에 숫가락을 얹을 수 있는 기회는 덤으로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이 연구를 진행하고 학기말이 다가오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한때 내 관심사가 포로기 신학이었다는 사실말이다. 당시에는 포로기 시대를 거쳐 묵시문학이 발현되므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차후 방향설정에 도움이 될거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석사 과정에서는 신약 내 묵시문학으로 간주되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내 관심사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계시록의 목자 모티프>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스가랴 9-14장은 구약 내 묵시문학으로 알려진 본문이다.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스가랴 9-14장에 집중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의 심령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포로기에 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반복적으로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 쓰인 구약성경과 목자 모티프가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목자 모티프야말로 예언자들의 심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수단이자 독자들을 설득하는 강력한 언어였던거다.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포로기 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왜 목자 모티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는듯 하다. 지금껏 나는 내 연구와 포로기 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칫 '우연' 혹은 '편의성'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끊임 없이 나에게 역사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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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을 해석하는데 서사비평이란 방법론을 탁월하게 적용한 책이다. 즉, 서술자가 내포 독자들이 서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초점을 두고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요한복임이 요한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했다는 전제를 두고 염두에 두고 서사와 요한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연결한다.


원래 이 주석서는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은 두 권은 언제 번역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말씀을 믿다
국내도서
저자 : 프랜시스 J. 몰로니 / 박경미역
출판 : 대한기독교서회 201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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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개론

추천도서 2017. 6. 14. 20:24

게리 버지 교수의 <요한복음> 수업을 위해 읽은 책이다. 사실 그의 저서인 <Interpreting the Gospel of John>를 읽어야 하지만, 레이몬드 브라운이라는 저자와 번역서라는 두 가지 장점이 작용하여 먼저 읽었다.

브라운은 정말 탁월한 성서학자이다. 비록 이 책이 미출판 원고를 바탕으로 작업한 내용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저자가 생전에 요한복음을 얼마나 치밀하게 연구했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단지 그의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방대한 자료와 깊은 사색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왔음을 느낄수 있다. 특히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주석 이후에 진행된 연구라서, 기존 입장과의 차이를 비교해볼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개론(introduction)이라고 하면 보통 입문서로 여기게 되는데, 제목 그대로 요한복음을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지, 절대 초보자들을 위한 책은 아니다. 내가 볼 때 이 책의 난이도는 중상 이상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번역과 편집에 대해서는 한마디해야겠다. 재번역이든 윤문이든 꼼꼼하게 고쳐서 재출간하길 바란다.


요한복음 개론
국내도서
저자 : 레이몬드 E. 브라운(Raymond E. Brown) / 최흥진역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1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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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리처드 보컴, 문우일 역, 새물결플러스)


이 책의 원제는 "영광의 복음"(Gospel of Glory)이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저자는 요한복음의 핵심을 영광으로 보고 있다. 3장의 제목이 "영광"이며, 4장의 주제인 "십자가, 부활, 승귀"에서도 "영광"에 대해서 다룬다. 8장에서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주요차이점으로 "영광"을 다룬다. 이렇듯 "영광"은 요한복음의 핵심주제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번역서의 제목은. 저자의 의도를 담아내지 못한다.


이외에도 익숙하지 않지만 중요한 개념들, 익숙하지만 교정되어야 할 개념들을 꼼꼼하게 다룬다. 책을 다 읽고나면, 추천자들의 평가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게 된다. 특히, J. 램지 마이클스와 폴 N. 앤더슨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


전반적으로 저자는 루돌프 불트만의 이해를 긍정적으로 보며,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는데 자주 인용하고 있다. 어쩌면, 불트만의 책을 이해하고 나서야 보컴의 주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국내도서
저자 : 리처드 보컴(Richard J. Bauckham) / 문우일역
출판 : 새물결플러스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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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2월 12일 최종 수정판


1. 원문의 진정성[각주:1]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2] 외증(외적 증거) 내증(내적 증거)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구절을 원문으로 없는 외적 증거가 여럿 있는데, 근거들은 크게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1)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2)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3)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내적 증거 역시 원문의 진정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1) 요한 문체가 아니다.

(2) 7:52에서 8:12로 이어지는 연결이 보다 자연스럽다.

 

(1) 문체가 요한 보다는 공관복음의 저자들, 특히 누가에 가깝다.[각주:3] 공관복음이 유사하긴 하지만, 누가는 특히 가난한 , 억압받는 ,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여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각주:4] parege,neto(그가 들어갔다) 누가가 2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뿐이다.[각주:5] pa/j o` lao.j(많은 사람들) 누가는 7 사용하지만, 요한은 그렇지 않다.[각주:6] 게다가, 공관복음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같이 언급되지만, 요한의 원문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각주:7]감람산”(to. o;roj tw/n evlaiw/n, 8:1)이라는 장소는 공관복음에서 7 사용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서만 언급된다.[각주:8] kate,krinen(정죄하다) avpo. tou/ nu/n(다시는) 역시 공관복음에서는 사용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각주:9] 더욱이,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생”(8:4) 아닌 랍비”(참조 1:38) 규정한다.[각주:10]

 (2) 7:53-8:11 인해 앞뒤 문맥이 부자연스럽고,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다.[각주:11] 오히려, 단락은 누가복음 21 38절과 근접하다.[각주:12] 그래서,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한 사본들이 발생했을 것이다.[각주:13] 이야기는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셨던 상황에 어울린다.[각주:14]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8:2-6a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15]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간음이 혼자 짓는 죄가 아님에도, 여자와 함께 남자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각주:16] 추측해보면 범죄현장이 발각되었을 남자 혼자 재빨리 도망쳤다거나, 현장에서 잡아들일 있었는데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각주:17] 이러한 불공정한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녀는 죄인이다.[각주:18] 어쨌든 간에, 고소자들은 공정한 판결 보다는 예수를 딜레마에 빠뜨리는데 관심을 두고 있음은 틀림없다.[각주:19] 죽음으로 죄값을 치러야 하는 죄인이라 하지만, 회당에 끌려와야 했으며(2-3), 한낱 고소거리로 전략해버렸다(6a).

 

간음은 여자가 유부녀이거나 약혼한 처녀일 때에 간음이 성립하며(22:22-24),[각주:20] 고소자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했으니, 여인은 약혼한 처녀일 가능성이 크다.[각주:21] 22-22-24 보면 유부녀는 죽이라고만 했으나, 약혼한 처녀인 경우에는 돌로 죽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쉬나(Sanhedrin 7:4)에서는 유부녀일 경우에는 돌을 던져 죽이도록( 심각한 죄라고 보았기에), 약혼한 처녀일 경우에는 목을 졸라 죽이도록 하였지만, 예수 당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에는 의심스럽다.[각주:22] 결과적으로, 여인은 약혼한 처녀에 해당한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여인이 유부녀이든 약혼한 처녀이든 간에,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과 처벌로 죽임을 당한다는 점이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a).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6b-9

예수께서는 즉시 대답하는 대신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6b). 예수께서는 무엇을 쓰셨을까?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레미야 17 13절로 근거로 해석해왔다.[각주:23]

 

u`pomonh. Israhl ku,rie pa,ntej oi` katalipo,ntej se kataiscunqh,twsan avfesthko,tej evpi. th/j gh/j grafh,twsan o[ti evgkate,lipon phgh.n zwh/j to.n ku,rion ( 17:13)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야훼 당신을 버리는 모든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당신을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야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역)

 

구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땅에 기록하셨다. 이러한 해석은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을 기록한다고 해서 어떠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각주:24] 이와 다르게 죄명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각주:25] 당시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으며, 제논 파피루스(Zenon Papyri) 죄명을 기록하다(κατὰ τούτων καταγέγραφέν σοι)라는 의미로 쓰인 사례가 있다.[각주:2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고소자들이 주위에 모여든 무리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자 반복적으로 묻는다(7).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다. 율법에 따르면 죄인들을 죽일 때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으나(참조 13:9; 17:7),[각주:27] 예수께서는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것이다.

 

율법

예수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율법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율법대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 하시지 않고, “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답하셨을까? 13:9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꾀임에 넘어가지 않은 자요 범죄에 동참하지 않는 자이다. 17:7에서 돌을 먼저 던지는 자는 범죄현장을 목격한 목격자이다. 구절에서 먼저 돌을 던지는 자의 조건이 다르다고 있지만, 죄를 짓지 않았으며 해당 범죄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해석으로 율법에 어긋나지 않게 답하셨다.[각주:28]

 

말을 마치시고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다(8). 여전히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 길이 없지만, 이러한 행위가 예수의 답변과 어우러져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나도록 했다(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없는 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어른부터 젊은이들까지 명씩 명씩 자리에서 떠나, 예수와 간음한 여인만 남았다!

 

10-11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만 남아 있음을 보시고, 여자에게 너를 고소하던 자들, 너를 정죄한 자들이 하나도 없느냐?” 물으셨다(10). 여인은 주여,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하고,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신다(11).

여기서 예수의 반응은 다소 의외다. 여인의 간음죄를 처벌하지 않으셨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율법에 대해 해석을 달리 하시긴 했지만)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대로 행하라고 답하셨다. 그럼에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을 던져 악을 제하여야 자들이 자리를 떠나버렸다(9). 그래서 여인을 처벌할 자가 없어졌다(그렇다고 해서 간음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심판자가 되셨다. 고소한 자들이 죄를 처벌하지 않고 모두 떠나버려, 여인을 남겨두고 같으니, 예수께서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공의로운 심판자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답변을 주의하자. 예수께서는 죄가 용서 받았다 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더욱이 앞으로 범죄하지 말라 하셨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앞으로는 죄를 반복하지 않고 회개한 자로써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인자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1.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ed.),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nd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4), 188-190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BC (Dallas: Word, 2002), 143-144 읽어보라. [본문으로]
  2. Andrew T. Lincol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New York: Hendrickson, 2005) 비롯한 몇몇 주석에는 구절을 아예 다루지 않았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3. Gerald L. Borchert, John 1-11,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1), ***; Charles H. Talbert , Reading John (Georgia: Smyth & Helwys Publishing, 2005), 152. 보르헤르트는 o;rqroj(아침)라는 단어가 8:2 이외에 Lk 24:1; Acts 5:21에서만 쓰였다고 지적했는데,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빈도수로 따지면, 누가 문체에 가깝다. [본문으로]
  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5.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Borchert, John 1-11, ***. 보르헤르트는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8(5:20; 12:38; 23:2, 13, 15, 23, 27,29;참조 의심스러운 본문 7:5 순서가 반대인 15:1), 마가복음에서 1(2:16; 참조 순서가 반대인 7: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이라고 7:1), 누가복음에서 3(5:21; 6:7; 11:53; 참조 순서가 반대인 5:30; 15:2) 쓰였다고 한다. ** 각주 7 확인 필요 **;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8.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9.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0.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1. Talbert , Reading John, 152. [본문으로]
  12.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3.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4. Borchert, John 1-11, ***. [본문으로]
  15.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Borchert, John 1-11, ***;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본문으로]
  1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4. 카슨이 언급한대로, 고소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여자에게 두는 배타적인 남성우월주의자들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예수를 모함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와 달리 여성들에게 관대했던 예수에게 여자 혼자만 데려와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가능성이 크다. [본문으로]
  18. Ibid.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유대인들은 약혼한 여인은 약혼자의 아내로 간주하였다(참조 22:23-24). [본문으로]
  21.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5-336. 카슨의 지적대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을 쓴다고 해서 여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본문으로]
  25. Ibid. T. W. Manson 처음으로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6. BDAG, 516. 전문은 다음 페이지를 읽어 보라. Zenon Papyri http://www.perseus.tufts.edu/cgi-bin/ptext?doc=Perseus%3Atext%3A1999.05.0092&query=head%3D%23141 (검색일: 2007. 11. 1) [본문으로]
  27.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336. 13:9; 17:7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카슨은 간음죄도 동일하게 처벌했다고 보는 하다. [본문으로]
  28. 예수의 대답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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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의 진정성

 

대다수의 학자들은 7 53-8 11절을 원문으로 여기지 않는다.[각주:1] 이유는 다음 세가지로 요약 가능하다.[각주:2]

 

(1) 초기 사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2)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들의 품질이 좋지 않다.

(3) 교부와 주석가들이 언급하지 않는다.

 

초기에 기록된 사본에 발견될수록 기록과 보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베자 사본은 5 세기경에 기록되었다.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은 주로 서방 계통이며, 특히 베자 사본(D) 대표적이다. 소수의 사본이라 할지라도 공관복음에 평행구절을 가지고 있거나, 다중증거(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서방 사본) 경우라면 원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원문이라고 하기에는 지원하는 사본이 다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방에 치우쳐 있다. 게다가 베자 사본의 품질이 미치지 못하며, 본문을 담고 있는 위치도 일정하지 않다. 구절을 7 36절이나 44 뒤에 넣은 사본도 있으며, 더러는 요한복음 21 25 뒤에나 누가복음 21 38 뒤에 삽입시키기도 한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내러티브를 생략하고 있으며, 10 세기 이전까지 동방교부들에 의해 인용된 적이 없었다. 12세기 유디미우스 지가베누스(Euthymius Zigabenus) 구절을 검토하긴 했으나, 역시 사본의 품질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굳이 여기에 삽입된 이유로는 7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8 15(너희는 육체를 다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설명하려고 했거나, 유대인들의 사악함과 예수의 없으심을 밝히려고 했을 것이다.[각주:3]

 

 

따라서, 요한복음 7 53-8 11절은 원문이 아닐 것이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4). 간음(moiceu,w)이란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각주:4]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하고 있으며( 20:14; 5:18), 어기면 죽는다( 20:10).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인만을 끌고 왔다(3). 여기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번째는 간음한 여인만 끌고 이유이고, 번째는 여인을 죽이지 않고 예수께로 끌고 이유이다.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본문이 간음한 남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아 저자의 관심은 간음한 여인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의 관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추측컨데, 혼자 저지르지 않은 (간음은 혼자 지을 수가 없다) 혼자서 치러야 한다는 형평성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각주: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힌 여인은 하나님의 계명이 지킴으로써 공평과 정의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보다는 고소거리로 전략시켜버렸다.

번째 의문은 금새 풀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십계명대로 처벌하기 보다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6).

 

여기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순된 행동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십계명에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 20:10)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소거리로 사용했다(6). 더구나, 예수께서 십계명을 지키시기 위해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했음에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없이 물러갔다(9).

 

예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기에 그들이 말없이 물러났을까?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죄를 선고하기 전에 죄목을 기록해야 했다.[각주:6] 예수가 그런 관습을 따라 했다고 단정짓긴 어렵겠지만, 무언가를 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니(9)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수께서 땅에 쓰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다(6). 그리고 집단에 의해 과분한 모욕을 당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범죄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을까?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분은 앞뒤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핵심적인 논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7:24 51, 8:15~16, 26,50절에 이어지는 심판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다.[각주: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본문을 통해 진정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드러내고자 함이다.


** 알림 **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수정판)

  1. 김동수 박사의 <요한 신학 렌즈로 요한복음>에는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다. 원문의 진정성을 주장하는 이로는 Zane Hodges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2. 자세한 내용은 Bruce M. Metzger <Textual Commentary> 읽어보라. [본문으로]
  3.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Grand Rapids, Michigan: Eermans, 1991) 334. [본문으로]
  4. moiceu,w 아내를 버리고 장가 들거나 버려진 여자에게 장가 드는 (마태 5:27; 누가 16:18), 우상숭상숭배( 2:22; 2:22) 의미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5.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7) 178. [본문으로]
  6.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79. [본문으로]
  7. 목회와신학 편집부 , “ 8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 1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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