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들에게.


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SBS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평론 

- 폭력과 저항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 정의와 자비의 길로 -


 지난 7월 6일 밤에 방영된 SBS의 기획물 “신의 길 인간의 길” 제2부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는 이슬람에 관해 소개하며,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화해와 소통의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의 경전이 예수를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선지자라고 기록하며 또한 무슬림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이 화해의 접촉점으로 제시된다.

 또한 이 방영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해과 소통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이 극복해야 하는 차이점들도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을 믿되 이슬람은 예수를 신으로 믿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비폭력과 사랑이 강조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과연 이슬람과의 화해를 위하여 더 이상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그저 위대한 선지자로 믿어야 하는가? 이러한 교리적 문제만 극복하면 이슬람이 기독교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십자군 전쟁이나 이라크 침공 등의 군사적 폭력에 지지를 표한 실천적 행동 때문이다.

 이슬람이 폭력의 사용을 중단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하면 기독교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는가? 이슬람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허용한다면 미국이 아랍 지역에서 가진 석유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 세력의 무력 사용이 계속 되고 경제적 착취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 세력의 대응 폭력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이 사용하는 폭력은 서방 세계의 폭력에 의해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기독교 세계의 권력자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아랍 지역을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침공하기를 즐겨왔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미국의 이라크 침공까지 돈에 눈이 먼 서방 세계의 권력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지원 아래 무슬림의 피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슬림의 저항 폭력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믿지 말고 그저 선지자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이것은 무슬림에게 기독교와 화해하기 위하여 그들의 경전과 무함마드를 버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강요이다. 화해와 소통은 자신의 본질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정체는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정된 죄명으로서의 신성모독과 관련된다. 대제사장이 “네가 메시아냐?”고 질문하자, 예수는 “그렇다. 내가 권능자(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마가복음 14:62). 여기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아니다. 메시아는 순교자 저스틴(Dial. Trypho 49)이 후에 인정하였듯이 단지 “사람들 중에 하나”일 수 있다. 신성 모독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에 발생한다. 자신의 정체를 단지 메시아일 뿐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고 밝힌 예수의 주장을 인간들이 부정한 것이 예수의 죽음이었고, 이러한 예수의 주장을 하나님께서 긍정한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때 그를 신적인 존재로 믿게 되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고 유대인 지도자들이 결론 내렸지만 돌로 치는 종교형에 처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 정치형인 십자가형을 받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를 나무 형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신명기 21:23)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선언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저주 선언을 무효화시키는 사건(부활)이 없이는 예수가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믿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부활로 인해 율법의 저주 선언이 무효화되고 예수가 메시아로 믿어지게 될 때에는 예수의 주장대로 신적인 메시아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 기획물의 제 2 부는 이슬람의 문제점이 그들의 경전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잘 지적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점도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세계 속에는 사랑과 용서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어 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자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속에 들어온 이 암세포는 오늘날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암세포는 속으로 기독교를 부패시킬 뿐 아니라 밖으로는 타종교와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든다.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된 데에는 재물을 추구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거짓 기독교인들의 공로가 크다. 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실상을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가리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기독교의 이미지마저도 실추시키고 기독교 복음의 전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십자군 전쟁은 아랍 지역의 선교를 힘들게 만들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이슬람 세계가 미국과 기독교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통치의 경우에도 인도네시아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도네시아가 무슬림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신앙을 명분으로 삼아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슬림이 이슬람 세계에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먼저 명분을 준 것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 준다는 핑계 아래 세속 정권이 하는 사악한 일을 지지한 사이비 기독교 세력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은 사람이 소에게 제공한 동물성 사료이듯이 이슬람의 폭력성의 원인은 서구 세계가 아랍 세계에 제공한 폭력과 착취이다. 이러한 폭력과 착취를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면 이슬람 세계는 말로는 예수를 전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비일관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눈앞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비성경적인 국정운영에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을 요구하며,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불신자들에게마저도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단체들은 결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지 말고 자신을 비워 아낌없이 세상을 비추는 촛불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만이 참으로 예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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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 신약학 연구소 "SBS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평론"


 SBS가 기획하여 지난 6월 29일에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제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키며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한다. 이 기획물은 버미스(G. Vermes), 크로산(J. D. Crossan) 등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였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비교적 여과 없이 소개하고자 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물은 모든 편집물이 그러하듯이 보이지 않는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 주관성은 인터뷰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드러난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 전문가는 크로산이 유일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크로산은 비중 있는 학자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은 학계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 하나를 대변할 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미국의 마이어(J. P. Meir)와 샌더스(E. P. Sanders), 독일의 타이센(G. Theissen), 영국의 라이트(N. T. Wright) 등이 중요한데, 이들이 제외되고 크로산의 입장이 마치 정설인 양 소개되는 인상을 주며 방영물이 결론 내려진 것은 유감이다.

 크로산의 주요 방법론은 다중 증언(multiple attestation)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지만, 타이센, 샌더스, 라이트 등이 사용하는 “설명가능성 원리”를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비유사성 원리”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방영물에서 크로산은 요세푸스, 타키투스 등의 다중 증언에 입각하여 예수의 존재의 역사성을 변호한다. 이것은 이교도 신화에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허구라는 가설을 논박하는 중요한 논증이다. 그의 논증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유사성은 영향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유사한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미쳐서 발생하였을 필연성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가 그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 없이 단지 이야기 차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사성에서 인과관계를 끌어내는 논리적 비약이다.

 저자들은 어떤 사건을 서술할 때 유사한 평행구절들에 관한 독자들의 지식을 활용한다. 즉 저자들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독자들의 선이해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전달되어진다. 그리하여 여러 본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이러한 유사성의 면밀한 관찰이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현상을 간본문성(intertextuality)라고 부른다. 복음서 본문의 해석에는 구약성서, 중간기 문헌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구약성서과 중간기 문헌의 세계 속에 사는 저자들이 그러한 세계 속에 사는 독자들에 그들이 공유하는 언어 세계를 토대로 의사소통을 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본문성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본문 뒤에 놓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과 유사한 옷을 입은 사람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궤변이다.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 “설명가능성 원리”를 도입한다면 한 가지 비판을 더할 수 있다. 예수가 실재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가 과연 허구라면 그렇게 창작된 이야기를 믿고 기독교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허구 이야기를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고 죽음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예수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설은 기독교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타당성이 없다.

 이 기획물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신의 아들,’ ‘천국’의 개념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개념에 관하여 꼭 언급하여야 하지만 빠뜨린 것이 있다. ‘신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칭호이다. 4 Ezra 7:28(“나의 아들 메시아”)뿐 아니라, 쿰란문헌(4Q246 2:1)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 ‘메시아’라는 칭호에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을 담아 사용하며 고대하였으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 때, 이러한 개념에 따라 예수를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적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그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주)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후(마가 14:25)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심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마가 15:36).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취임하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획물의 의도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소통을 위한 것인데, 이러한 소통은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소통을 위하여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파괴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를 메시아(즉 하나님의 아들)라고 선언한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발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따라(신명기 21:23)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발생은 예수의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부활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예수 자신의 주장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받아들어지게 하였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를 묻는 이 기획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건드렸으나 ‘신의 아들’의 개념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게 된 배경인 십자가와 부활을 간과하였다. 예수를 정치적 이념을 가졌던 한 독특한 유대인에 불과했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인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획물은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파괴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도전 앞에 반응하며 수천년을 지내왔으며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도 언제든지 다루어지며 응전되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에는 많은 항체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획물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체가 없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참으로 해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부패이다. 어느새 기득권층이 되어버리고 기득권층과 타협하고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에는 미래가 없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힘으로 선교를 하려는 승리주의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하거나 정권을 창출해도 그것은 자멸의 길일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러한 기획물을 두고 분노할 때가 아니라 복음을 말로 왜곡하는 목회자들과 행함으로 왜곡하는 기독교 위정자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또한 이기적 기복주의에 빠져 복음을 왜곡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본질을 잃은 기독교는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으며, 변질된 복음은 더 이상 전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에 결탁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잘못된 대제사장의 교권세력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의 모습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정권과 교권이 결탁하여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여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의 뒤를 따라 이러한 부정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음성이 있는가? 교회가 정권을 배출하였을 때에는 교회가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교회에 돌을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교회를 버리실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장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이다. 교회는 돈과 권력을 택하기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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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미션 "‘만들어진 신’, 문제점 있지만 그 비판은 귀 기울여야"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이 책을 ‘무신론자의 책’이라고 그냥 덮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도덕적이어야 할 종교가 비도덕적일 때가 많다’는 그의 비판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영국서 70만부 이상 팔린 데 이어, 국내에서도 출판된 지 45일 만에 14쇄가 발행된 영국의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 대한 국내 한 조직신학자의 신학적 평가다.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의 중심 문제… ‘과학적 무신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부설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는 6일 오후 연세대 신학관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김균진(연세대 조직신학) 교수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그 타당성과 문제점 -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와 연관하여>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을 비판했다.

김 교수는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의 중심 문제로 과학의 방법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과학의 인식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과학적 무신론’(scientific atheism)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도킨스는 과학의 방법으로 검증될 수 있는 물리적ㆍ물질적 세계, 곧 ‘자연계’만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삶의 영역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도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과학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자연계에 속하지 않은 모든 현상들은 ‘delusion’(환상, 망상, 거짓된 것, 기만)이므로 신의 존재도 ‘delusion’이라 정의한다”고 밝혔다.

도킨스의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은 20세기 전반기 비엔나 학파의 (과학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물리적 현실만을 인정할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실증주의’와 그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김 교수는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학문적 깊이를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적 무신론은 이미 세계 신학계에서 상세히 연구ㆍ검토됐다”며 “한국교회가 <만들어진 신>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신학적 기초가 부실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과학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물리적 ‘현실’ 아니다

김균진 교수는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서 ‘하나님은 과학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물리적 현실(reality)이 아님’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실증주의 사고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경험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의 ‘현실’이지만, 그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존재 유무는 과학의 방법을 통해 검증될 수 없다”며 “과학의 방법을 통해 검증된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과학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자연계’의 사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을 통해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망상(delusion)’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물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의 그 ‘느낌’이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의 느낌은 망상(delusion)’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김 교수는 “과학적 인식만이 유일하게 신빙성 있는 인식이라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길도 과학적 인식에 있어야 한다”며 “과학은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는 침묵한다”고 꼬집었다.

무신론에 대한 책임은 기독교에도… 도킨스의 비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김 교수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문제점이 많이 발견된다고 해서 이 책을 무조건 덮어버리지 말고,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을 겸허하게 경청해 ‘종교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김 교수는 “이 책이 특히 한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간이 만든 하나의 ‘망상’ 내지는 ‘기만’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종교의 오류와 거짓을 폭로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소위 ‘반기독교적 정서를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그의 비판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비판은 기독교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개혁해야 할 많은 타당한 점들을 제시한다”며 기독교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반성해야 할 몇 가지 점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특히 한국교회가 유의할 점으로 ‘세속적 욕심, 곧 물질적 욕심에서 자유로워져야 함’을 꼽았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세속적 명예와 권세에 대한 과도한 욕심, △교회의 물량적 팽창과 교세에 대한 욕심, △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도덕적이어야 할 종교가 비도덕적일 때가 더 많다’는 도킨스의 비판도 한국교회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점으로 지적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적 정서’의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기독교의 비도덕성’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김 교수는 한국교회를 향해 “무신론에 대한 책임은 기독교에도 있다”며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도킨스의 종교비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개혁하는 일에 앞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편 이날 김 교수의 발제에 앞서 문화평론가 진중권 교수는 ‘맘몬’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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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앤조이 "믿음에 관한 두 이야기"


종교적 믿음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과학적 인식과 종교적 인식이 다르다고 믿는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이 질문 자체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물음에 주저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있다.

종교적 믿음을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두 권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요, 또 하나는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의 생물학자로서 동일하게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종교적 믿음을 분석하고 있다. 종교적 믿음이 인간의 진화 결과라고 보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동일하다. 말하자면 종교적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유전자적 소인이 인간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적 믿음의 기능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무척 다르다.

도킨스는 종교적 믿음을 진화과정상 일종의 어긋난 부산물로 보고 있다. 마치 불나방이 불을 보고 날아드는 현상처럼 이해한다. 본래 빛을 향해 나르는 불나방의 특성은 자연적 조건에서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인간 문명의 발달로 불빛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아무 불빛이나 보고 날아들게 되었을 때 치명적인 결과를 빚는다. 종교적 믿음이나 행동 역시 이와 같이 과거에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에 이점을 주었던 어떤 성향이 본래 목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컨대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등을 신속히 판단하고 어른들이 말하는 경험법칙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살아가는 데 유리한 이점을 주었을 텐데, 그것이 맹목성을 띠게 된 데서 종교적 믿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추론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일상적 감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불합리성을 띠는 것처럼 종교적 믿음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킨스가 종교적 믿음을 진화의 불운한 부산물로 보는 것은 다분히 현실 종교의 부정적 측면 때문이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낳는 미국의 침략전쟁과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 그에 맞서 스스로의 생명을 버릴 뿐만 아니라 타인의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테러를 정당화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등에서 종교적 믿음의 극단적 폐해를 보고 있다. 그래서 도킨스는 차라리 신이 없다고 전제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서로 돕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다.

반면에 월퍼트는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적 가설을 전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믿음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종교적 믿음이 유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주장이 그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신중하다. 월퍼트는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서와 달리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해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믿음의 엔진과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간단명료하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그 믿음의 엔진이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니까 종교적 믿음이 인간의 생존 적응률을 높여준 긍정적 요인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이해한다. 오늘날 과학적 지식으로 볼 때 종교적 믿음의 내용이 많은 경우 신빙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성향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긍정적인 삶에 기여해왔다고 본다.

그렇다고 월퍼트가 종교적 믿음의 부정적 폐해를 비켜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유익한 종교적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사태를 그 역시 염려한다. 그래서 월퍼트는, 사람들은 끌리는 대로 믿음을 가질 권리가 있지만 그런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신뢰할 만한 믿음을 갖도록 근본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과학적 입장,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종교적 믿음에 접근하는 데도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흥미롭다. 종교적 믿음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아직 과학적으로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과학이 종교적 믿음마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입장에서 두 과학자가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현상은 다시 되새겨봄 직하다. 자신의 믿음이 타인에게 불편함을 야기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파괴력을 지니기도 하는 현실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 점을 유념한다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종교적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선택이요, 결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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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야말로 망상""


“나는 도킨스가 종교를 향해 보여주는 놀라운 적대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종교는 황소 앞의 붉은 천 조각과 같다.”

진화생물학자인 영국 옥스포드대학 석좌교수 리처드 도킨스가 지은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 ’도킨스의 망상’(살림 펴냄)이 번역돼 나왔다.

저자는 옥스포드대학 위클리프홀 학장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와 런던대학 히스롭 칼리지 종교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그의 부인 조애나.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경우 도킨스 교수가 몸담고 있는 옥스포드대학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연과학자 출신의 신학자이다. 그는 도킨스의 무신론을 비판한 책 ’도킨스의 신’을 2004년 발표하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번 책에서 “도킨스는 종교가 유아적이어서 인간이 성숙해지면 사라져야 하는 유치한 망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도킨스는 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후반기에 신을 발견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후퇴, 타락, 퇴화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도킨스는 종교적 전통 안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아동학대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면서 “그렇다면 ’만들어진 신’이 보여주는 심란하고 우습고 잘못된 종교적 진술을 아이들에게 억지로 주입하는 것은 정당한가”라고 반문한다.

저자들은 “도킨스의 주장은 ’과학은 종교가 거짓임을 증명했다’거나 ’종교는 미신이다’와 같은 주문에 기초하고 있다”면서 “이는 1950년대 소련의 아동교육 속에 끼워진 반종교 프로그램과 언짢으리만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종교에 대해 무모한 적대감을 보이는 도킨스의 무신론이야말로 진리를 외면하는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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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도킨스 씨, 당신이 틀렸소""


영국 옥스퍼드대 신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다. 같은 대학의 석좌교수인 리처드 도킨스가 연이어 저서를 통해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도킨스의 화제작 '만들어진 신'은 그의 누적된 분노를 격발시켰다. 게다가 맥그라스 교수는 청년시절 무신론자로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후 신학으로 돌아선 경우다. 2004년 '도킨스의 신'을 발표, 도킨스를 비판한 바 있는 저자는 런던대 종교심리학 교수인 부인 조애나와 함께 다시 펜을 도킨스에게 겨누었다.

이 책은 서문에서부터 도킨스에 대한 냉소가 가득하다. "그에게 종교는 황소 앞의 붉은 천 조각과 같다." 저자는 "놀랍게도 '만들어진 신'에 과학적인 분석이 드물다"며 '믿음은 유아적이다' '믿음은 비이성적이다' '폭력을 초래하는 종교' 등 도킨스의 명제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가령 '믿음은 유아적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도킨스는 종교적 전통 안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아동학대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며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교리를 똑같이 속기 잘하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주입하려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아동학대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또 "도킨스의 반(反)종교적 논박의 특징들 중 하나는 병적인 것을 마치 정상인 양, 별난 사람들을 주류인 양 진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도킨스는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기도 하고, "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식의 막연한 인상으로 종교를 부정한다. 도킨스 주장의 핵심에는 "과학과 종교는 죽음에 이르는 전투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래서 도킨스는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고 어느 쪽이든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도식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만들어진 신'은 종교인들 그리고 그 외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공정하고 엄밀하게 논쟁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신념이 흔들리는 무신론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이 더 많은 것 같다"며 이렇게 말한다. "무신론이 신에 대한 망상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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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매일경제 "옥스퍼드 석학들이 벌이는 `神의 전쟁`"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vs 알리스터 맥그라스 `도킨스의 망상`
 
 
프리드리히 니체가 19세기 말 `신은 죽었다`고 외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서점가에서 `神의 전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21세기 초 신의 전쟁에 나선 대리인들은 리처드 도킨스와 알리스터 맥그라스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옥스퍼드대학 교수이자 세계적인 석학이다.

`만들어진 신`(김영사)이라는 책으로 먼저 포문을 연 도킨스는 생물학 교수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움직인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발표해 과학계에 사회생물학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도킨스의 망상`(살림)을 펴내면서 대응에 나선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신학 교수로 대표적인 복음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두 석학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이론은 정확하게 대척점에 서 있다.

도킨스는 창조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신의 부재를 주장한다.

가장 진화된 지성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어느 날 우주를 창조했다는 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

도킨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도 비판을 칼날을 댄다. 그동안 종교가 강자에게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약자에게는 삶의 위로이자 희망 역할을 하는 이중적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도킨스는 신이 사라진 이후의 시대가 오히려 더 이성적이고 희망적일 것이라고 역설한다.

근거는 이렇다. 여러 가지 실험에서 인간은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화 됐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신이 없어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답게 도킨스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을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반기를 든 맥그라스는 "도킨스는 종교가 유아적이어서 사라져야 할 망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도킨스의 그 생각이 바로 망상"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맥그라스는 "도킨스가 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후반에 신을 발견하게 되는지, 사람들이 나이 들어 신을 만나는 게 과연 후퇴ㆍ타락ㆍ퇴화를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맥그라스는 도킨스의 무신론적 주장이 사회주의의 종교 부정 논리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의문도 제기한다. "과학적으로 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논리는 과거 옛 소련의 반종교 프로그램의 내용과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책이 품절사태가 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여기에 반박하는 맥그라스의 책이 출간되자 두 사람의 전쟁은 세계적인 동영상 사이트인 유트브로 확전됐다.

도킨스가 동영상을 통해 자신과 같이 과학을 전공했던 학자가 어떻게 종교 근본주의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자 맥그라스는 신앙이란 가장 최선의 대답을 찾기 위한 이성적 토대 위에 있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신앙은 그 자체로 이미 과학적 증거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도킨스가 다시 "맹목적 신앙은 위험하다"고 공격하자 맥그라스는 "맹목적 무신론은 더 위험하다"고 응수했다. "자연현상을 봐도 신의 존재는 개연성이 없다"는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신은 자연의 한 부분이 아닌 자연질서 전체를 조명한다"고 논박했다.

두 석학의 논쟁은 그 자체로도 관심을 끈다.

같은 대학에서 같은 분자생물학을 공부했지만 한 사람은 무신론의 대표자가 됐고, 한 사람은 복음주의의 상징인물이 된 것부터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종교적 고민을 웅변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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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북데일리 "믿음 대신 의심 가르쳐라!"


얼마 전에 재미있는 칼럼을 읽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 칼럼리스트 이인식 과학 문화연구소장의 글이었는데 주제는 신경신학이었다. 신경신학은 인간의 영성과 뇌의 관계를 탐구하는 신생 학문이다.

칼럼은 “성당이나 절에서 신자들이 기도와 명상을 통해 절대자와 영적으로 일체감을 느끼는 신비체험을 할 때 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신경과학자인 앤드루 뉴버그에 따르면 명상이나 기도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머리 꼭대기 아래에 자리한 두정엽 일부에서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고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 오른쪽에서 활동이 증가되었다고 한다. 종교의 신비 체험은 간질과도 강관이 깊단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노먼 게슈빈트는 간질이 때때로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신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며 뇌 안에 항상 머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가 왜 종교를 마약에 비교했는지 이해가 간다.

지난 해 최고의 인문학 서적으로 선정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표현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 내지 망상이라고 단정 짓는다.

도킨스는 유전자의 특징이 이기적이고 인간은 유전자의 조종을 받는다고 주장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학자. 발표하는 책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모두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엔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는 진화론의 입장에서 창조론과 종교의 비합리적인 요소,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더 주목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섰다.

실제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저마다 관용과 사랑을 외치지만 실제 종교의 이름으로 불관용과 증오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필요한 이유는 도덕 때문이었단다. 한 사회가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이 신이나 내세 관념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굳이 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 될 것이라며 이성에 대한 낙관론을 편다.

500쪽이 넘는 두께에 내용도 난해한 편인데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이유는 뭘까? 저자의 인지도와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의성을 탔던 요인도 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분당의 샘물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였던 선교 활동과 인질 납치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의 배타적인 선교 방식에 대한 극렬한 찬반 논쟁이 우리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간의 충돌이 세계사적인 문명 충돌의 양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도킨스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균형적인 시각에서 문명충돌 의 본질을 냉철하게 파헤치고 있다. 원인 분석과 함께 대안을 다각도로 제시하고 있다.

어떤 걸까? 그는 신앙보다 더 위험한 것은 신앙을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라고 본다. 신앙이 교육과 결합했을 때 그 해악은 끔찍하다. 전에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자살 테러와 인간 폭탄을 양산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믿음 대신 의심을 가르치라고 주문한다. 의문 없는 신앙이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통해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자살 테러범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단다.

논술은 언제나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종교 문제는 서강대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갑자기 출제되기 시작했다. 11월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한양대 수시와 성균관대 수시에서 종교 문제가 출제된 것이다. 1월 3일부터 시작된 올해 정시 논술 고사에서도 분명 나올 공산이 크다.

혹시 “당신은 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신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이성을 신봉하는 나는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자에 가깝다.” 정확히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이다.

신을 찾는 개인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족이 죽었다든지,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 때 신에 의존하는 것까지 문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조직화됐을 때가 문제다. 종교든 뭐든 조직화했을 때 그리고 그 조직이 다른 조직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했을 때 부패와 타락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개인적 믿음이 조직화될 경우, 집단 광기나 집단적 증오로 연결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필자의 결론은 종교가 필요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 인간 내면의 차원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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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신학자―무신론리더 유튜브 동영상 대결… 옥스퍼드대 두 석학의 세기적 기독교 논쟁 후끈"


“기독교 신앙이란 확실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신을 믿지 않는다.”(리처드 도킨스)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앙은 과학적 증거를 뛰어넘는다.”(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대 석학들의 세기적 신학논쟁이 불을 뿜고 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품절사태까지 빚어질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모은 무신론의 대표적인 책. 이에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망상’에서 “도킨스는 과학의 이름으로 자신의 편견을 선전하는 무신론적 근본주의자”라고 응전했다. 같은 대학을 나오고 같은 무신론에서 출발해 한 사람은 무신론의 대표 주자가 됐고, 또 한 사람은 복음주의 신학의 최고 지성이 된 두 천재의 불꽃 튀는 논쟁은 저술에 이어 세계적인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로 옮겨붙었다.

화제의 동영상은 ‘모든 악의 뿌리’와 ‘리처드 도킨스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논쟁’(이하 ‘논쟁’) 등 두 편. 편집되지 않은 총 80분짜리 영상 7개로 구성돼 있는 ‘모든 악의 뿌리(Root of All Evil)’는 도킨스가 만든 다큐멘터리 시리즈 영상물로 도킨스가 7명의 학자들과 대화하는 형식이다. ‘논쟁’은 지난해 가을 옥스퍼드대학교 문학 페스티벌에 초청된 두 사람이 학생들 앞에서 강연하고 질문을 받는 내용이다.

도킨스는 자신과 같은 과학을 전공했던 맥그래스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는지 공격한다. “과학자가 어떻게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캠프에 들어가게 됐냐”는 것이다. 이에 맥그래스는 “기독교는 이성적 관점을 가진 종교이며 다양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받아친다.

도킨스는 “신앙은 확실한 증거 위에 있지 않다”며 “종교인들이 가진 믿음이란 증거가 불충분하면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맥그래스는 “신앙이란 가장 최선의 대답을 찾기 위해 이성적 토대 위에 있다. 신앙은 과학적 증거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도킨스는 또 “맹목적 신앙은 너무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맥그래스는 “맹목적 무신론 역시 맹신적 종교만큼이나 악하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되받는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도킨스는 “자연 현상을 볼 때 신의 존재는 개연성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맥그래스는 “하나님은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이 아니라 자연 질서를 조명하신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나로서는 그냥 생겨난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진화된 하나님을 차라리 더 믿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과학과 신앙의 문제도 얘기했다. 도킨스는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를 묻는다. 맥그래스는 “서로 모순될 수도 있고 선기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함께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맥그래스는 도킨스에게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유를 묻는다. 도킨스는 답한다. “기독교는 질문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기 때문”이라고.

두 사람의 논쟁이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으자 장신대 김중은 총장은 “신학부에서 시작된 옥스퍼드대의 대표적인 교수가 이런 기독교 적대감을 선전하는 현실이 통탄스럽다”며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견”이라고 말했다.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는 “처음에 같은 길을 간 두 사람이 이렇게 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을 주목하고 싶다”며 “맥그래스에게는 도킨스에게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과학적 신학’ 영역 개척

알리스터 맥그래스(54) 영국 옥스퍼드대학 석좌교수는 22세에 옥스퍼드대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가 신학박사를 취득한 특이한 경력의 학자다. 지금까지 50권이 넘는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출간했다. 1995년 출간된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는 "세계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의 계속적인 성장과 성숙에 달려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000년대부터는 '과학적 신학'이라는 영역을 개척했고 그 무렵부터 서구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진화론적 무신론'과 적극적인 논쟁을 벌이면서 기독교 변증 사역에 뛰어들었다. 최근에는 리처드 도킨스에 대항, '도킨스의 신' '도킨스의 망상'이란 제목의 책을 펴내 무신론이 얼마나 허구에 찬 망상인지를 밝히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진화론 입장서 기독교 반박

리처드 도킨스(66)는 노벨상을 받은 옥스퍼드대 동물행동학교수 니코 틴버겐의 제자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생물학을 전공한 도킨스는 첫 저서인 '이기적인 유전자'(1976)에서 생물 개체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운반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쳐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글을 쓰는 그는 '눈 먼 시계공'에서 생물의 복잡성이 하나님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했고, '만들어진 신'에서는 논리와 과격한 언어를 동원해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전투적 무신론자'로 불리는 도킨스는 무신론의 대표적 학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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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봐야 할 책.


== 관련 도서 ==

Richard Dawkins, 만들어진 신, 이한음 역, 파주: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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